154화 도랑 치고 가재 잡고 게도 잡고
트럼프를 만나기 전, LA에서 할 일이 있었다.
“우진! 하하, 오랜만입니다!”
내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격하게 나를 반기는 인물.
래클런 머독.
루퍼트 머독의 장남인 그가 오늘의 만남 상대였다.
래클런은 저번 브렉시트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작게나마 나를 도와준 전력이 있었다.
트럼프의 기자회견에서 미래차 관련 대답이 나오도록 질문했던 폭스 뉴스의 기자가 바로 그의 사람이었던 것.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고.
“기사를 통해서 소식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번에도 큰돈을 버셨더군요.”
“운이 좋았죠. 그런 의미로 오늘은 제가 살 테니 마음껏 고르시죠.”
“하하. 제가 어디 가서 누구한테 얻어먹는 편은 아닌데, 우진에게는 어쩔 수 없겠죠.”
내 말에 기쁜 얼굴로 화답하는 래클런.
세계 최대의 미디어 그룹인 ‘뉴스 코퍼레이션’, 일명 머독 제국의 장남인 그가 나에게 이토록 호의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내가 써밋-MGM 엔터와 스웜을 통해 할리우드에서 디즈니나 워너 등에 크게 밀리지 않는 입지를 구축했다고는 하지만, 그건 할리우드에서의 얘기였지.
영화 업계를 떠나 전체적인 미디어 업계에서 보자면 아직 중소 왕국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저도 축하드립니다. 이번에 21세기 폭스의 이사회 의장을 맡게 되셨더군요.”
“감사합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요.”
그건 바로 그가 장남이다 뿐이지, 아직 머독 제국의 황태자가 아니기 때문.
아니, 황태자는커녕 오히려 지금 현재의 래클런은 능력 있는 차남으로 인해 제국에서 폐위될 위기에 처해 있는 위기의 황자에 불과했다.
‘<찬탈자>로 치면… 빅터 3세에게 밀려나게 된 왕세자와 같은 위치인 거지.’
래클런의 동생인 제임스 머독의 현 직책은 21세기 폭스와 SKY 방송사의 회장.
21세기 폭스에는 케이블 네트워크 사업과 영화 엔터테인먼트 사업, 텔레비전 사업 등의 알짜배기 자회사들이 속해 있고, SKY 방송사가 있는 영국은 머독 제국의 원류와도 같은 곳.
반면, 장남인 래클런은 뉴스 코프의 비집행 공동 회장 겸 21세기 폭스의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사회 의장이라고는 해도 CEO인 제임스에 비해 21세기 폭스 내 힘이 약했고.
거기에 3년 전 뉴스 코프가 21세기 폭스에서 분리되면서 자잘한 회사 몇 개와 월스트리트 저널 정도만을 자회사로 두고 있는 걸 생각해 보면…….
현 루퍼트 머독의 의중이 어느 쪽으로 향하는지는 명백해 보였다.
실제로 세간의 인식 또한 제임스를 루퍼트의 후계자로 보고 있는 상황.
‘막연히 어렸을 때부터 자기 것으로 생각했을 제국이 동생의 손에 넘어가는 걸 봐야 하는 기분은 어떨지… 어후, 잘 모르겠네.’
마음 같아서는 직접 그 심정을 묻고 싶은 지경.
혹 <찬탈자>에서 왕세자의 심정을 묘사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그런 사소한 이유 때문에 래클런의 심경을 자극해 현재의 파트너십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동생분께서는 최근 테슬라 이사회의 멤버가 되셨던데요. 하하, 테슬라는 좋은 투자처죠.”
“아… 제임스는 원래부터 전기차 쪽에 관심이 많았죠. 꽤 환경주의자적인 면모가 있거든요.”
“환경주의자라… 하하, 저와는 맞지 않는 성향이겠군요. 그러고 보니 동생분이 민주당을 지지했었죠?”
“예… 흠흠, 맞습니다. 그놈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후우.”
그 대신, 이렇게 자꾸 제임스를 언급하며 적당적당히 래클런의 경쟁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루퍼트의 의중도 그렇고, 세간의 인식도 그렇고.
모든 것이 제임스가 제국을 물려받을 거라 말하고 있지만… 글쎄.
당사자인 래클런마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단언컨대 아닐 것이다.
돈과 권력을 가져 보고 나니 알게 된 사실인데.
이것들이 주는 탐욕이란 게 얼마나 영악하던지,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한번 쥔 돈과 권력을 포기하지 못하는 게 사람이라는 동물이다.
돈과 권력이 주는 마력이 사람의 정신을 살짝 돌게 만든다고 해야 하려나.
괜히 정치인이나 재벌가 사람들이 그토록 정신 나간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었다.
여하튼.
래클런 또한 그런 인간 군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텐데.
지금 동생의 얘기를 하며 겉으로 웃고 있는 그가 속으로는 어떤 심정을 숨기고 있을까?
경쟁심, 욕망, 질투 등등 온갖 부정적인 것들.
아마 그런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런 경쟁 심리가 더욱 불탈 수록,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우군에 대한 신뢰와 의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심지어 그 우군이 뒤처진 후계 싸움에서 상대를 따라잡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면 더욱 그럴 테고.’
내가 지금까지 래클런에게 준 도움은 다음과 같았다.
머독 제국에서 쫓겨 나 작은 사모 펀드를 운영하던 그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 후계 구도로 다시 복귀할 수 있게 해 줬고.
트럼프의 당선을 예측해 그에게 조언을 건네, 그 의견을 루퍼트 머독에게 직접 전달하게 했다.
듣기로는 그 말을 듣고 루퍼트 머독이 트럼프는 그저 광대에 불과하다며, 더럽게 멍청한 후보라 대통령이 되지 못할 거라 했다던데.
결국 그런 예상을 뒤엎고 트럼프가 당선되고 말았으니.
래클런을 보는 루퍼트 머독의 눈이 달라졌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만큼, 후계 구도에서 한발 앞으로 향하게 된 거였으니 래클런은 내게 더욱 감사하게 되는 거였고.
‘사실 내가 아니어도 벌어졌을 일인데 말이지.’
그러니까, 이건 이번 트럼프의 당선과 같은 거다.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그리고 래클런이 머독 제국의 후계자가 되는 것.
사실은 두 가지 일 모두 내가 관여하지 않았어도 알아서 벌어졌을 일들이다.
어차피 대통령이 되는 건 트럼프였을 거고.
어차피 루퍼트 머독의 뒤를 이어받는 건 래클런이 됐을 거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러한 사실들은 회귀자인 나만이 정확히 알고 있다는 거였는데.
그렇기에 나는 지금 거기에 일부러 끼어들어, 그런 결과가 나오는 데에 있어 내가 큰 도움을 주는 척을 하고 있는 거다.
마치 내가 아니었다면 네가 대통령이 되기는 힘들었을 거고, 후계자가 되는 건 불가능했을 거라 어필하는 것.
이후 나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 없도록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감사 인사를 잊었군요. 빠르게 트럼프와 연을 맺은 덕에 아버지 앞에서 면이 좀 섰습니다. 하하. 모두 우진 덕분입니다.”
“별말씀을요.”
지금 이렇게.
물론… 트럼프는 몰라도 아직 래클런은 약빨이 덜했다.
고작해야 후계 구도에 복귀시켜 주고, 트럼프의 당선을 예측하게 한 정도로는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말하기에는 부족했다.
즉, 여기서 강렬한 한 방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는데.
마침 좋은 게 있었다.
래클런에게 도움이 되면서도 내게도 이득이 되는 꿩 먹고 알 먹기식 한 방이.
“래클런, 제게 좋은 제안이 있는데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래클런과 식사를 나누던 와중 타이밍을 봐서 꺼낸 얘기.
이것이 바로 내가 때리고자 하는 강력한 펀치였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루퍼트 머독께서 21세기 폭스의 영화 스튜디오·TV 프로덕션 사업 일부를 매각하려 하신다던데요. 그게 사실인가요?”
“…예?! 그 사실을 우진이 어떻게…….”
“하하.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는 법이니까요.”
우선 몇 년 후면 세상 사람 다 아는 일로 허세 좀 부려 주고.
그다음은…….
“인수 대상은 아마 디즈니나 컴캐스트, 버라이즌, 소니 중 한 곳이 되겠죠? 대충 계산해 봐도 4~500억 달러. 그만한 자금을 낼 수 있는 미디어 기업은 전 세계로 따져도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맞습니다.”
이제 강렬한 그 한 방을 날릴 차례였다.
내년 말, 21세기 폭스를 두고 디즈니와 컴캐스트 등이 치열한 인수전을 벌이게 된다.
미국 미디어 산업의 큰 축을 두고 다른 큰 축들이 다투는 것.
그리고 그 인수전에서 최종 승리하는 쪽이 디즈니가 되면서 미국 영화 산업에 엄청난 변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기회를 남 줄 수는 없지.’
애초에 21세기 폭스라는 회사 자체가 너무 매력적인 매물이기도 했고.
눈앞에서 내 가장 강력한 경쟁자 중 한 곳이 더욱 커지는 걸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폭스의 IP 중 디즈니의 MCU에 편입시킬 수 있는 것들만 해도 여러 개인데.
하물며, 이걸 통해 래클런에게 커다란 빚을 지워 줄 수 있기까지 하다면야.
“아마 그 인수를 주도하는 건 현 CEO인 제임스가 되겠죠. 그리고 인수 건을 성공적으로 완료한다면, 루퍼트의 제임스를 향한 신뢰가 더욱 커질 테고요.”
“…….”
내 직접적인 말에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동시에 입술을 깨무는 래클런.
그 또한 알고 있는 거다.
21세기 폭스 매각이라는 희대의 이벤트가 머독 제국의 후계 구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지금 내가 이 얘기를 꺼내는 거다.
“100억 달러.”
“……?”
“루퍼트가 생각하고 있는 21세기 폭스의 가격이 얼마여도 좋습니다. 600억 달러? 700억 달러? 그것도 모두 현금으로 지불하는 조건이어도 상관없습니다. 그 금액에 정확히 100억 달러를 더 얹은 가격으로 제가 폭스를 사겠습니다.”
“예? 100억 달러를 더요?”
“네. 즉, 래클런이 할 일은 하나인 겁니다. 당신의 동생인 제임스가 기대에 부푼 얼굴로 당신의 아버지께 결과를 보고하러 왔을 때, 그때 딱 한마디만 하면 되는 거죠. 시간을 그렇게 들여 놓고 고작 그 가격이 전부야? 나는 당장에라도 거기에 100억 달러를 더 얹은 가격에 폭스를 팔 수 있다고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래클런의 입가.
조금 전까지의 얼굴과는 사뭇 다르다.
내가 방금 말한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직접 상상이라도 하는 걸까.
“그걸 들은 루퍼트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겠죠. 애초에 폭스를 파는 이유가 돈 때문이지 않습니까? 사양길을 걷고 있는 영화와 TV 사업.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OTT 시장에 투자를 해야 하는데, 그럴 바에는 아예 접고 그 자금으로 성장 가능한 신사업에 집중하는 게 좋아 보이는 거겠죠.”
“…정확하십니다. 분명 아버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죠.”
어차피 머독 제국의 후계자가 되는 건 래클런이다.
아까 그가 언급한 대로 진보적인 환경주의자인 그의 동생 제임스.
정치 성향 또한 그것을 따라가 친민주당인 제임스였는데.
결국 그런 이념 차이를 아버지인 루퍼트 머독과 좁히지 못하게 된다.
즉, 내가 하는 건 그런 정해진 최종 선택이 조금 더 앞당겨지도록 부추기는 것일 뿐.
하지만 당사자인 래클런에게 있어 지금의 내 제안은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빛 동아줄이나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그걸 굳이 그간 폭스의 경쟁사였던 디즈니나 컴캐스트에게 팔 이유가 있을까요? 제게 넘기시죠. 앞으로 저와 래클런의 파트너십이 족히 수십 년은 갈 텐데, 그게 래클런 입장에서도 편하지 않겠어요?”
“수십 년… 예.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지금의 나는 래클런에게 마치 헌 집을 주면 새 집으로 갚는 두꺼비와도 같은 존재였다.
헌 집(21세기 폭스)를 내게 줘.
그러면 널 새 집(머독 제국)의 주인으로 만들어 줄게.
진실이 뭐가 됐든, 그에게는 이렇게 느껴질 거다.
아무튼.
이제 슬슬 대답이 돌아올 차례였는데.
“우진… 왜 제가 지금까지 우진을 아버지께 소개하지 않았는지 아십니까?”
“흠, 글쎄요. 아무래도 나이 차가 나이 차라? 사실 래클런과도 20살이 넘게 차이가 나는데, 루퍼트와는 그 차이가 3배가 되니까요.”
“하하. 그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두 사람이 만나면 대체 어떤 대화가 오갈지 도무지 상상이 안 갔기 때문입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무서운 사람이시거든요.”
“……?”
“그리고 우진이 두 번째고요. 그런 두 사람이 만난다니… 하하, 지금 보니 참으로 잘한 선택 같아요. 상상만 해도 버거워지는 기분이니까요.”
결국 내 제안대로 하겠다는 말인 것 같긴 한데.
이걸 칭찬으로 받아야 해, 아님 욕으로 받아야 해?
물론 뉘앙스를 보면 당연 칭찬으로 들리기는 했다.
비록 80살 먹은 노인네와 내가 비슷하다는 의미 같기도 하지만…….
그나저나-
‘21세기 폭스 인수전이 본격적으로 심화되는 건 2년 후… 그때까지 7~800억 달러면…….’
어디 보자.
코인으로 적당히 돈 좀 불리고.
거래소 차려서 수수료로 좀 땡기고.
코인 붐과 함께 AMD도 떡상하는 걸 생각하면…….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네?’
그러던 그때.
갑자기 든 좋은 생각이 또 있었는데.
‘내일 트럼프 만날 때… 이것도 어필 좀 해야겠는데? 머독 제국의 주인이 래클런이 되도록 만들겠다고 말이야.’
공화당인 트럼프로서는 보수에 가까운 래클런이 후계자가 되는 게 더 좋게 느껴질 거다.
게다가 내가 저렇게 말을 하고, 실제로 그런 결과가 나온다면…….
아마 트럼프도 내가 여든 살 먹은 노회한 루퍼트처럼 무서운 사람이라는 래클런과 비슷한 착각(?)을 하게 될지도.
도랑 치고 가재 잡고 게도 잡고.
이것이 바로 일석삼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