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상부상조
파티는 꽤 즐거웠다.
오랜만에 보게 된 티모시와 할 얘기도 많았고.
“구아다니노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어?”
“단언컨대 그는 천재예요. 편집본이 나오면 우진도 바로 보셔야 해요. 음… 제가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선을 완전히 표현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하하. 구아다니노 감독도 비슷한 소리를 하더라.”
“어… 정말요?”
“그래. 네가 그의 감정선을 제대로 표현했는지 모르겠다는 부분 말고, 천재라는 부분. 그가 그러던데? 네가 천재라고.”
루카 구아다니노는 현재 티모시와 함께 영화를 찍고 있는 영화감독이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영화에는 약간의 관심 정도밖에 없었던 나도 기억하고 있을 만큼 유명한 작품이었다.
동성애를 다룬 작품이라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분명 내가 기억하기로는 작품의 주연을 맡았던 티모시를 엄청난 스타덤에 올리는 영화였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고, 골든 글로브 등의 상을 여럿 수상하게 됐을 정도였으니.
티모시와 에이전시 계약을 맺은 것은 물론, <찬탈자>의 남은 시리즈 출연 계약까지 맺은 나로서는 출연을 적극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번 기회를 통해 구아다니노 감독과의 연을 맺으며, 나름 용돈벌이 정도는 되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제작 및 배급까지 맡게 됐는데.
그는 이번 영화를 통해 빵 뜨게 되는 라이징 감독이 아니라 기존부터 명성이 꽤 있는 유명 감독이었다.
나도 할리우드의 사람인 만큼, 개인적으로 명작 영화에 대한 공부도 틈틈이 하고 있는데.
그것 중 꽤나 인상 깊었던 작품인 <아이 엠 러브>를 찍은 영화감독이 바로 구아다니노였다.
틸다 스윈튼이 주연을 맡았던 작품.
원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봉 감독의 뮤즈가 되며 써밋 엔터와의 사이도 깊어진 틸다 스윈튼이 그를 우리에게 연결해 준 것이었다.
‘아까 인사를 나눴지. 아, 저기 있네.’
봉 감독 또한 함께 있었다.
그녀는 최근 봉 감독의 신작인 옥자를 찍고 있는 중.
당연하게도 옥자는 스웜과 써밋 엔터를 통해 공급될 예정이었고, 올해 하반기의 기대작 중 하나였다.
‘극장 흥행이 어떠려나.’
옥자의 개봉에 앞서 확보한 미국 내 상영관은 대략 4,000개.
원래라면 미국에서 4~5개 정도의 상영관만 확보한 채 개봉했던 옥자였기에, 이번에는 그 흥행이 어떨지 미지수였다.
과거 옥자의 상영관 확보가 그렇게 적었던 건 당시 옥자를 제작했던 넷플릭스가 스트리밍 서비스와 극장 개봉을 동시에 진행했기 때문인데.
극장주와 배급사들이 OTT 동시 상영을 반대했던 것이다.
물론 나는 당시의 넷플릭스와 달리 극장과 온라인 스트리밍 동시 개봉을 추진할 생각이 없었다.
거기에는 꽤 여러 이유가 있었다.
우선 내가 OTT 플랫폼의 주인이면서 배급사의 주인이기도 하다는 것.
오로지 OTT 플랫폼만을 가지고 있는 넷플릭스와 달리 제 살 깎아 먹기라 볼 수 있었다.
심지어 극장과 온라인 스트리밍 동시 개봉에 부정적인 극장주들을 자극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으니.
괜히 그쪽에서 날 배척하고 경쟁자인 다른 메이저 스튜디오들에게 붙으면 나만 손해였다.
할리우드에 내 영향력이 꽤 상당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뭐, 언젠가 그렇게 만드는 게 내 목표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무엇보다 내가 굳이 OTT 동시 개봉을 추진할 필요가 없는 가장 큰 이유가 있는데.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어쩔 수 없이 극장업계에서 수그리고 들어오게 되어 있으니까.’
몇 년 후 있을 코로나19 팬데믹.
팬데믹의 가장 큰 직격타를 맞게 될 곳이 바로 극장업계였다.
거리 두기 제한이 모두 풀리고 난 이후에도 원래의 성세를 회복하지 못할 정도.
달리 말하면, 이대로 시간만 지나면 알아서 극장업계에서 손을 뻗게 되는 것.
요즘 넷플릭스가 극장과 OTT 동시 개봉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던데.
괜히 걔네들처럼 힘은 힘대로 빼면서 보수적인 꼰대 극장업계 측의 미움을 살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파티가 꽤 무르익었을 때.
띠링-
클라이맥스를 알리는 알림이 왔다.
미리 구독해 놓은 뉴욕 타임스의 속보 알림.
기사의 제목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 비슷했다.
[할리우드 거물의 위계적 성범죄 행태.]
영화 산업과 미디어 산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오늘을 위해 따로 구독을 한 나하고는 달리, 이곳에 자리한 수많은 영화 관계자 중 몇 명 정도는 뉴욕 타임스를 원래부터 구독해 놓지 않았을까.
그런 내 추측이 맞을지는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어… 왠지 모르게 파티장이 조금 조용해진 것 같지 않아요?”
주위 분위기를 읽은 티모시가 그렇게 말했다.
티모시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파티장의 분위기가 아까와는 사뭇 달랐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얘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지금은 서로 귓속말을 하며 어느 한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
그 시선을 받는 당사자도 그 이상함을 눈치챌 정도로.
* * *
아까의 사건 이후로 하비 와인스틴의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할리우드 내에서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던 그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치욕을 맛보고 말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하비 와인스틴을 더욱 분노케 했던 것은, 면전에서 무시당하는 경험을 했음에도 저 빌어먹을 아시안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였다.
‘건방진 아시안 자식.’
머릿속으로는 선우진에 대한 온갖 욕을 토해 내는 그였지만, 입밖으로 낼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렇게 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할리우드의 거물 제작자로 남을 수 없게 될 테니.
그만큼 요즘의 할리우드에서 저 빌어먹을 동양인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분기별로 수억 달러 이상의 히트를 치는 영화들이 써밋-MGM에서 나오고 있었고.
극장업계를 바짝 추격해 올 만큼 커지고 있는 OTT 산업에서의 지배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수십 년 가까이 메이저와 미니-메이저 사이에 놓여 있던 거대한 벽을 혼자의 힘으로 정복해 버린 사내.
디즈니나 워너, 유니버설의 주인이 아니고서는 저 20대의 동양인에게 찍소리도 못 하는 게 작금의 할리우드였다.
심지어 돈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 또한 일반인과 비교할 수 없는 수억 달러의 자산을 지닌 거부였지만, 선우진의 앞에서는 부자라는 말을 감히 쓰지도 못할 정도로 초라해질 뿐이다.
아마 그가 한 해에 벌어들이는 돈을 최소로 잡아도 그의 전 재산을 훌쩍 넘을 거다.
그것도 투자의 귀재라 불리며 월 스트리트의 주목까지 받고 있는 선우진의 투자 수익을 모두 제하고도 말이다.
하비 와인스틴이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지금의 선우진이 상대였다면 몇 수 접어 줘야 했을 텐데.
예전보다 그 영향력이 옅어진 지금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이봐, 이거 한 잔 더 가져오게.”
결국 타는 속을 알코올로밖에 달랠 수 없는 노릇.
그런 그를 향해 파티 도중 다가와 아부를 하는 이들이 몇 명 있었다.
오늘 너무 들이켜시는 게 아니냐는 둥의 말 따위를 뱉으면서.
그럴수록 더욱 짜증이 솟구치는 하비였는데.
상대하기도 싫은 잔챙이들이라 대충 대답해 돌려보내다 보니, 일종의 기시감이 들었던 것이다.
아까 전 선우진이 자신을 상대할 때 보이던 태도.
그것이 지금 바로 그가 자신을 향해 아부하는 허접스러운 놈들에게 보이는 태도와 같았다.
즉, 자신은 선우진에게 있어 그런 존재였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비 와인스틴이 연거푸 잔을 들어 올리던 그때.
“……?”
어느 순간부터인지 파티장 내 몇몇의 시선이 자신을 힐끔대는 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지만 점점 시선이 노골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얘기를 잘만 나누던 이들도 있었는데.
“MR. 와인스틴…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그러던 그때,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보고하려는 듯 그에게 부하 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건네는 스마트폰에 떠 있는 기사 제목.
“…뭐?!”
‘이게 무슨!’
순식간에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한 하비 와인스틴.
그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 * *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나한테 내가 내 눈으로 본 걸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 기능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고.
그만큼 저번 파티장에서 보여 준 하비 와인스틴의 모습은 퍽 재밌는 부분이었는데.
[도날드 트럼프 후보, “이게 추악한 저들의 실상. 한 명의 정상적인 남자로서 이런 일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라고 밝혀.]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해. 그를 좋아한 사람들은 모두 민주당. 미셸 오바마가, 힐러리 클린턴이 그를 좋아했다. 그(와인스틴)는 민주당원들에 엄청난 돈을 지원했다”라며 하비 와인스틴과 엮어 민주당을 적극 비판하는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 후보.]
[놀랍게도 하비 와인스틴의 성추문을 밝혀 낸 건 도날드 트럼프?! 심지어 피해자들의 법률 상담에 대한 적극 지원까지?]
그 대신 트럼프가 나를 재밌게 해 주고 있었다.
사실 나도 트럼프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설 줄 몰랐다.
자신에 대한 여성 유권자층의 혐오를 떨치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힐러리를 까는 게 재밌어서일까.
대놓고 하비 와인스틴의 성추문을 세상에 알리게 한 게 자신이라며 인터뷰를 하고 다니는 트럼프였다.
[오바마·힐러리, 성추문 와인스틴에 “여성 경멸 역겹다”라며 선 그어.]
[할리우드 최악 성추문, 힐러리 후보에 큰 불똥.]
[와인스틴이 힐러리 후보에게 낸 후원금의 총액수는?! 이래도 몰랐나?]
그리고 언론도 그에 맞춰 트럼프를 도와주고 있었는데.
물론 모든 언론이 그런 건 아니었다.
진보 언론은 대부분 하비 와인스틴 개인이 저지른 잘못에 집중하고 있었고, 민주당과 관련된 기사를 쓰더라도 그들이 와인스틴의 성추문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내보낼 뿐이었다.
하지만 물어뜯을 게 산더미처럼 쌓인 보수 언론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살판이 난 거였는데.
피라냐 떼라도 된 듯 힐러리 후보와 와인스틴을 엮어 그들을 물어뜯고 있었다.
힐러리 캠프 측에서 지금까지 내세웠던 가치는 정의와 평화, 평등과 같은 것들.
그런 모습과 정반대의 모습이 그들의 지지자에게서 나왔으니.
‘선거에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
물론 그렇게 크지는 않을 거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한국과 달리 선거인단을 통해 이뤄지니까.
이번 성추문 파문이 꽤 크긴 하겠지만, 민주당 텃밭인 주의 대세를 바꿀 정도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을 거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이번 사태가 실제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 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결국 중요한 건 트럼프가 이번의 내 도움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것.
‘힐러리와 각축을 이루던 주 중에서 어차피 내가 없었더라도 트럼프를 지지했을 주들이 있지. 지금은 여론조사에서 힐러리 측이 우세인 몇몇 경합주. 하지만 실제로 까 보면 트럼프가 승리하는 곳들이지.’
이번 계기를 통해 트럼프는 그런 경합주들에서 승리하게 됐을 때, 그렇게 된 데에 내 영향이 지대했을 거라 생각할 거다.
지금 당장도 내게 무척이나 고마워하고 있는 그였으니까.
아무래도 마음껏 힐러리 측을 비난할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드나 보다.
실제로 어저께 트럼프가 개인 전화를 통해 내게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이제는 사업가가 아니라 정치인이라고, 꽤나 에둘러 말하던 트럼프였지만.
어제의 통화를 정리해 보자면 대충 이랬다.
‘매우 고맙. 내가 대통령 되면 톡톡히 갚겠음!’
즉, 내게 남은 건 AMD와 NVIDIA 중 한 곳을 고르는 것뿐이라는 것.
나머지는 그가 알아서 처리해 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