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저울의 기울기
“반갑습니다, 선우진 대표님.”
언젠가부터 한국의 재계 인사들이 나를 부를 때 대표라 부르던데.
아마 작가라는 말이 입에 붙지 않아서가 아닌가 싶다.
뭐, 틀린 말은 아니라 굳이 정정하지는 않고 있다.
나도 업계 쪽 사람들이 아닌, 어디 기업 사장들이 내게 ‘작가님’ 하는 건 이상하게 느껴져서도 있다.
“저도 반갑습니다, 부회장님.”
오성그룹의 박재용 부회장과 악수를 나눴다.
언론에서 봤던 것처럼 꽤나 부드러운 인상.
유명세로 따지자면 이제는 내가 한참이나 위겠지만…….
과거로 오기 전에 하도 여기저기서 자주 봐서 그런가.
왠지 모르게 연예인을 만난 기분이었다.
오늘은 박재용 부회장과 나 단둘이서만 보기로 한 것이었는데.
오성그룹 회장 아저씨를 만나 보고 싶다는 내 바람은 성사되지 못했다.
‘벌써 이때부터 입원 중이었을 줄이야.’
예전 삶에서도 몇 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하다 사망한 거로 알고는 있었는데.
큰 관심은 없었던 터라 언제부터 투병 생활이 시작됐던 건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미 2년 전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박희건 회장이 입원했던 것.
이런 소식을 왜 내가 몰랐던 건가 했더니, 소식이 대중에 알려진 때와 내 훈련소 기간이 맞물렸더라.
사회와 격리되는 동안이라 미처 알지 못했던 거다.
심지어 훈련소가 끝나고 나서는 다들 내가 알고 있겠거니 하고 지레짐작했던 건지, 그 이후로 내 앞에서 박희건 회장의 투병 생활 얘기를 꺼내는 사람이 없다 보니, 아예 모르고 있었다.
아마 제이슨도 이전에 내가 했던 말을 회장이 아니라 그 아들인 박재용 부회장을 만나 보고 싶다고 해석했을 터.
그런데 사실, 오늘 박재용 부회장과 만나게 된 건 내가 그러자고 해서가 아니었다.
“절 뵙고 싶으셨다고요?”
박재용 부회장이 아니라 내 입에서 나온 말이다.
오늘의 만남은 내가 아니라 박재용 부회장 쪽의 요청으로 이뤄졌던 것.
우선 런던을 떠나 한국에 도착하고 일정을 조율해 볼 생각이었는데.
우리가 오성 측에 연락을 넣으려는 찰나에 반대로 먼저 연락이 온 것이다.
이게 무슨 우연의 일치인지.
내게 사업적으로 할 얘기가 있다고 하더라.
때마침 잘됐다 싶어 곧바로 약속을 잡았다.
“예. 사실 전부터 무척이나 뵙고 싶었습니다. 박정후 부회장을 통해 선 대표님의 얘기 많이 들었었거든요. 원체 유명하신 분이시기도 하고요. 하하.”
CM그룹의 박정후 부회장.
박재용 부회장하고는 사촌지간인데.
그러고 보니 약간이지만 서로 닮은 구석이 있다.
아버지대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해야 정상인데.
아무래도 사촌끼리는 어느 정도 교류가 있나 보다.
“정말요? 음, 왠지 저에 대해 좋은 얘기만 하진 않으셨을 거 같은데.”
“하하. 설마요. 제게 몇 번이나 강조하더군요. 선 대표님 같은 귀인 또 없다고요.”
“그러셨나요?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하죠.”
“…….”
농담 삼아 잘난 체 좀 해 봤는데.
박재용 부회장은 진심으로 알아들은 것 같다.
이 점은 박정후 부회장하고 조금 다르네.
나하고 유머 코드가 별로 안 맞는다.
그런데 뭐, 사업 얘기에 유머 코드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몇 분 정도 더 신변잡기식 얘기를 나누다 본론으로 들어갔는데…….
“좋습니다. 자세한 건 말씀하신 대로 나중에 다시 정리해 보도록 하죠.”
“예. 그러면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본론이 무엇이었냐 함은 앞으로 있을 스웜과 오성전자의 파트너십에 대한 것이었다.
다음 해 상반기부터 출시되는 모든 오성 스마트폰에는 ‘오성 데일리’라고 여러 콘텐츠를 큐레이션 하는 어플이 기본적으로 탑재되는데.
그 어플에 스웜의 자체 콘텐츠 추가 기능을 탑재하고 싶단다.
내가 오성 페이 때문에 아이폰에서 갤럭시로 갈아타서 오성 데일리도 좀 아는데, 원래는 넷플릭스와 협업했을 기능이었다.
거기에 오성의 스마트폰 관련 콘텐츠 제작 의뢰도 있었는데.
세부적인 건 실무자를 통해 관련 자료를 보내겠다고 한다.
‘딱히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네.’
조금 전 박재용 부회장이 말한 대로 세세한 건 실무자들이 알아서 할 일.
게다가 스웜과 오성의 파트너십 건은 이미 스웜을 통해 문의가 들어와 승인이 났던 일.
사실 콧대 높은 애플이 그런 걸 우리에게 의뢰할 리도 없고.
오히려 애플은 ‘애플 TV+’라고 자체적인 OTT 출범을 논의하고 있는 상황인지라 스웜의 차기 경쟁자라 봐야 했다.
즉, 딱히 부회장 선에서 얘기를 꺼내지 않아도 스웜-오성 파트너십 건은 알아서 잘 진행됐을 일.
그런데 굳이 이걸 빌미로 오늘 만남을 잡았다는 건…….
‘나처럼 상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다른 본론이 있거나.
“선 대표님께 또 하나 제안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사실 제가 오늘 선 대표님을 뵙자고 한 진짜 이유는 시그마 캐피탈에서 보유한 하만의 지분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하만의 지분을 사고 싶다는 박재용 부회장.
아까보다는 조금 더 진중한 표정.
역시 이쪽이 본론이었던 거다.
“정확히는 합병 계약서에 대한 동의를 구하려는 겁니다. 하만의 경영진 및 총 43.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뱅가드 그룹과 JP 모건, 프라이스 어소시에이트 등의 회사들과는 이미 합의를 마쳤습니다. 거기에 시그마 캐피탈에서 보유한 7.84%의 하만 지분을 합치면 50%를 넘게 되는 거죠.”
AMD와 NVIDIA 중 하나를 노리고 있는 만큼.
나도 요새 M&A에 대해서 공부 좀 했다.
박재용 부회장이 말하는 건 하만을 교부금 합병 방식으로 인수하길 원한다는 것.
주주총회에서 50% + 1주 이상의 동의만 있으면 합병 계약서를 가결할 수 있는데.
공개 매수를 통해 지분 100%를 확보하고 완전 자회사로 편입시키는 것보다 더 간편한 방식이다.
그리고 그 50% 이상의 의결권을 위해 내가 필요하다는 건데.
“제가… 아니, 시그마 캐피탈에서 갖고 있는 7.84%요?”
“네. 갖고 계신 7,84%. 561만 주에 대해 주당 112달러를 쳐드리겠습니다.”
561만 주에 112달러면 얼마야.
빠르게 머릿속 계산기를 돌려봤는데.
대충 6억 3천만 달러짜리 거래.
그런데 대체…….
‘하만이 어디야?’
시그마 캐피탈이 그런 회사의 지분도 갖고 있었어?
내 지시 없이 시그마 캐피탈이 자체적으로 운용하는 자금이 아마 20억 달러쯤 될 텐데.
그렇게 투자한 곳 중 하나인가 보다.
“현재 하만은 주당 75달러 선에서 거래되고 있죠. 경영권 프리미엄으로 50%, 실망스러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든 대금은 현금성 자산으로 지급될 겁니다.”
“현금이요?”
“예. 현재 오성전자에서는 33조 원 이상의 현금성 자산을 보유 중입니다.”
어… 방금 나한테 돈 자랑 한 건 아니겠지?
아무튼.
하만……?
어떤 회사인지 아는 척하면서 상황을 넘겨볼까 했는데.
“흠흠. 하만. 좋은 회사죠. 아주 좋은 회사. 그러니까, 하만이…….”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연기는 내 재능이 아닌가 보다.
하만에 대해 박재용 부회장과 조금 더 얘기를 나눴는데.
“혹시… 하만이 어떤 회사인지 모르셨던 겁니까?”
아까 전 내가 나한테 그런 회사가 있었나 생각한 게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기라도 한 듯.
박재용 부회장이 저렇게 물어본 것이다.
후우, 하는 수 없지.
우리 엄마가 그랬다.
나는 솔직함이 매력인 사람이라고.
그래서 나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솔직하게 답했다.
“아… 넵. 아까 50% 프리미엄을 얹어서 6억 3천만 달러라고 하셨죠? 그러면 제가 가진 하만 지분이 4억 달러 정도라는 건데… 하하. 제가 푼돈은 잘 기억하는 편이 아니라.”
“……!”
이번에 한 말은 농담이 아니고 진짜였다.
* * *
물론 4억 달러가 푼돈이라고 해서 허투루 넘겨줄 수는 없는 법이다.
만약 지금 나와 박재용 부회장 사이에 가상의 저울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박재용 부회장 쪽으로 기울어져 있지 않을까.
애초에 그게 아니었다면 내게 하만의 지분을 넘겨 달라 하지 않았겠지.
원래 사람들은 다 자신들의 이득을 좇기 마련인 법이다.
‘지분 8% 정도가 6억 3천만 달러…….’
이것만 놓고 보면 작아 보인다.
하지만 총액을 따지면 다 합쳐 80억 달러짜리 거래다.
아무리 오성전자가 한 해 영업이익으로 300억 달러를 벌어들인다지만.
그중 4분의 1이 넘는 돈을 M&A에 쓰는 게 작은 일일까.
80억 달러면 웬만한 한국의 30위권 재벌 그룹의 자산 총액과 비슷한 정도다.
모르긴 몰라도 이 정도면 한국 기업의 해외 기업 M&A 시도 중 사상 최대 규모나 그다음 번째 정도는 되지 않을까.
거기에 지금 오성그룹, 아니 박재용 부회장의 상황을 합쳐 봤다.
부회장으로서 사실상의 회장 업무를 모두 대행하고 있는 그였지만, 아직 오성그룹에는 아버지인 박희건 회장의 그늘이 강했다.
당장 나도 그의 부재를 까맣게 잊고 있지 않았나.
모든 언론이나 대중이 박재용 부회장보다는 박희건 회장에 대해 더 주목하기 때문이다.
아직 오성의 주인은 박희건이다, 그런 인식이 강한 것이다.
물론 박재용 부회장은 아버지인 박희건 회장을 사랑하고 존경할 거다.
하지만 앞으로 그룹을 승계받게 되는 입장으로서 아버지의 두꺼운 그늘까지도 반기고 있을까?
나라면 아닐 거 같았다.
그리고 내가 역사를 깊이 배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섭렵해 온 수많은 대체 역사물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묘사되던 게 있다.
바로 어떻게든 선왕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후계자들의 모습.
‘박재용 부회장도 그 그늘을 빨리 거두고 싶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뭔가를 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할 거고.
그 첫걸음으로 총액 80억 달러짜리 M&A?
이야기가 그럴듯하단 말이지.
‘이건 <찬탈자>에 써먹어도 좋겠어.’
문득 떠오른 생각.
왕가의 사생아, 일찌감치 왕궁에서 쫓겨나 척박한 북부로 향했던 빅터 3세.
이제 <찬탈자>의 이야기는 북부에서 무력과 군사력을 획득한 그가 어떻게 왕위를 찬탈하는지를 그려 나갈 단계였는데.
빅터 3세가 속한 반더 왕국은 <마지막 마법사>에서 묘사되길 정복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내실이 탄탄했던 국가.
그런 국가를 본신의 무력과 북부에서 얻은 약간의 군사력만으로 찬탈한다?
그렇게 전개되면 너무 개연성이 부족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최근 집필에 차질을 겪고 있었다.
미리 구상해 뒀던 전개에 수정이 필요하다 느낀 것.
그런데 지금 박재용 부회장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막혔던 실타래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빅터 3세의 아버지, 반더 왕국의 늙은 왕은 장남인 왕세자의 나이가 60이 되도록 죽지 않던 것으로 그렸었지… 하지만 결국 노쇠한 그는 상왕으로 물러나고 왕위를 왕세자에게 양위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대륙을 살아가는 누군가에게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인 60.
그런 나이에 즉위한 후계자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
아버지의 그늘을 걷고, 그간 꿈꿔 왔던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고 싶겠지.
하지만 여전히 권력을 놓고 싶지 않은 늙은 상왕은 그걸 원치 않을 거고.
현재의 왕과 과거의 왕이 서로 권력을 두고 다투니.
왕궁은 물론이고 국가에 균열이 생기는 것도 당연할 터.
기회를 노리던 빅터 3세는 그 균열을 절대 놓치지 않을 거다.
‘으음.’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키보드를 투닥거리고 싶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럴 수는 없겠지.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어디 보자.’
내 가정이 맞다고 했을 때.
지금 저울은 박재용 부회장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즉, 내가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기울어진 저울을 수평으로 맞추거나.
아니면 내 쪽으로 기울이는 것.
“말씀하신 대로 50%의 프리미엄이면 훌륭한 제안 같으니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습니다. 물론 실무자들과 검토해 봐야겠지만요.”
“그럼요.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보기엔 네가 이걸 꼭 사고 싶은 거 같은데.
“아, 저도 오성그룹 측에 제안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예. 말씀하시죠.”
“제가 최근에 클라우드 컴퓨팅 사업을 준비 중인데요.”
“……?”
그러면 너도 나한테 뭘 좀 줘야 하지 않겠니?
“비용 절감과 비즈니스 전략 차원에서 오성전자의 AWS 비중을 어느 정도는 줄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