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좋은 놈 나쁜 놈 말고 이상한 놈
[써밋-MGM, 새로운 007 시리즈 제작 전격 발표! 영화와 함께 드라마까지?]
[이전에 없던 007 드라마 드디어 제작되나?]
[EON 프로덕션 성명문 발표. “써밋-MGM의 오너 선우진은 이 시대 최고의 스토리텔러. 그가 아니면 대체 누구에게 007을 맡기겠나?”]
[새로운 007 시리즈를 기다려 온 팬들에겐 희소식, 써밋-MGM “007을 최고의 프랜차이즈 시리즈로 만들 것.”]
기사를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 시대 최고의 스토리텔러라…….
얼굴에 금칠해 주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었다.
여하튼.
007 시리즈에 대한 기대가 꽤 뜨거웠다.
써밋-MGM에서 새롭게 제작될 예정인 극장용 영화 버전이야 원래의 007 인기를 그대로 이어 가겠지만, 기존에 없었던 드라마 형식의 007 제작에 대한 기대감이 전 세계 팬들 사이에서 꽤 크다고 들었다.
특히 007 시리즈는 영국의 상징, 영국 영화의 자존심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크리스탈 팰리스의 스태프들도 내게 007 차기작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더라.
“썬-! 당신 MR. 썬이죠? 사인 좀 해 줘요. 이왕이면 사진도 같이 부탁드리고요.”
런던 시내를 걷고 있던 내게 말을 건 크리스탈 팰리스 유니폼의 사내.
사진까지 전부 찍고는 떠나면서 내게 남긴 말이 있었는데.
“당신이라면 또 하나의 엄청난 007 시리즈를 만들겠죠? 젠장, 그만 좀 만들어요. 스웜 때문에 요즘 축구를 챙겨 볼 시간이 없을 정도라고요.”
꽤나 불만 섞인 투정이었다.
예전, 크리스탈 팰리스 서포터즈를 상대로 이벤트를 한 적이 있는데.
몇몇 서포터를 선정해 스웜 1년치 구독권을 선물하는 거였다.
얘기를 들어 보니, 이 팬 또한 그 이벤트를 통해 스웜을 접했다는데.
그런데 막상 스웜에 빠져들다 보니, 축구 경기를 뒤로 제쳐 두고 스웜에 있는 영화와 드라마들만 주구장창 보게 됐다더라.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상황.
그래도 그만큼 스웜의 작품들이 재밌다는 뜻이니 기분 좋았다.
“태양? 오! 태양이시여!”
“정말이잖아?”
군대 이전에는 그래도 지금처럼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 런던 시내를 걸어 다닐 정도는 됐던 거 같은데.
이제는 확실히 마스크로 가렸음에도 나를 알아보는 팰리스 팬들이 많이 늘었다.
이것 또한 <웬 이글스 데어>의 효과이지 않을까.
일부 팬들만 알고 있던 구단주라는 소설가의 얼굴을 이제는 팰리스 팬이라면 누구나 알게 되었으니.
그들로서는 구분하기 힘든 동양인의 마스크 쓴 얼굴을 이젠 쉽게 알아보는 것이다.
“요즘 팰리스는 정말 최고예요! 모두 당신 덕분이죠.”
“흥민 쏜, 구단 내에서는 쏘니라고 부른다면서요? 그 친구의 활약도 엄청 기대하고 있어요.”
그렇게 사인과 사진 요청을 들어주고 있는데.
“저 사인 한 장만 해 주세요!”
“와우!? 여기에다가요?”
“네!”
“저도요!”
그러다 등장한 한 여성 팬 무리.
총 세 명으로, 다들 어디 잡지 모델인가 싶을 정도의 외모들이었는데.
사인을 해 달라는 곳이 참… 좋은 곳이었다.
* * *
[선우진, 런던에서 포착! 크리스탈 팰리스 팬들의 인기 한 몸 세례.]
[너도나도 선우진에게 사진과 사인을 요청하는 런던 시민들. 심지어 라이벌 구단의 팬도 있어.]
[미녀 이글스에게 둘러싸인 선우진!? 얼굴에는 웃음 한가득.]
-씹ㅋㅋㅋㅋ 선우진, 야 이 개새끼야.
-와 ㅈㄴ 부럽다…….
-팰리스 팬들 개이쁘네; 무슨 모델인가?
-틱톡이랑 인스타 찾아보니, 모델 맞네.
-근데 선우진 저 새끼 가슴에 사인해 달라니까 헤벌쭉 웃는 거 보소 ㅋㅋㅋㅋㅋㅋㅋ 솔직하네.
-21개월 동안 군대 박혀 있다가 몇 주 만에 저런 거 겪으면 나였어도 좋아 죽음.
-ㄹㅇ 다들 노빠꾸 상남자 선우진 본받아라. 가슴에 해 달라니 넙죽 펜 갖다 대는 거 봐라.
└ㅋㅋㅋㅋㅋ존나 꾹꾹 눌러서 사인하네.
-사진 찍는 거도 상남자임ㅋㅋㅋㅋㅋ 허리 꽉 잡는 거 보소.
-매너손 안 지키는 거 오반데;;;
└매너손은 시발ㅋㅋㅋㅋ 그게 찐따손이지, 매너손이냐?
└설마 매너손이 병신처럼 어깨나 허리에 손 못 대고 붕 떠 있는 거 말하는 거임? 그거 외국에서는 hover hand(헬리콥터 손)이라고 찐따 같다고 욕 먹음.
└오히려 더 매너 아님. 내가 더러워서 손 안 대는 건가? 이런 생각 든다더라.
-나도 연예인들 매너손 이러는 거 별로더라 ㅋㅋㅋ 어깨동무나 허리 가볍게 잡는 사소한 스킨십이 뭐 별거라고.
-여튼 인생은 선우진처럼 ㅇㅇ
-그거 앎? 저 새끼 또 열애설 남.
└ㄹㅇ?
└ㅇㅇ 저번에 한번 난 적 있었던 데이지 콜린스랑 이번에 또 남.
└오 ㅅㅂ 데이지 조온나 이쁘던데. 선우진 이 개새끼.
* * *
“에잇. 열애설은 개뿔.”
방 안으로 들어온 강주원이 내 방을 슥 훑더니 말했다.
요 며칠 방에 틀어박혀서 홀로 <찬탈자> 집필에 집중했는데.
원래도 치우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고, 돈을 벌고 나서는 남들이 아예 청소를 전담해 버리게 되니.
오늘 같은 날처럼 이틀 밤을 새워 가며 쭉 집필에 전념하다 보면 쌓이는 쓰레기들이 꽤 많았다.
다른 작가들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이렇게 하루 이틀을 통째로 갈을 때면 온갖 에너지 드링크, 커피, 음료와 과자 등을 달고 살았다.
‘글에 집중한다고 방에 아무도 못 들어오게 했으니까.’
으음…….
그 탓에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 좀 그렇지만 돼지우리같이 변한 내 방 안.
강주원의 뒤로 따라온 사용인들이 보이기에 부탁을 드리고 방을 나섰다.
“이런 놈이 연애는 뭔 연애. 좀 치우고 살아라. 저게 돼지우리지, 방이냐?”
“오… 우리 엄마랑 똑같은 말 하네. 그런데 열애설? 뭔 열애설?”
“아까 보니까 너랑 데이지 콜린스랑 연애한다고 기사 떴던데? 맨유전 직관까지 왔었다며.”
“아아, 그거.”
“아아, 그거? 뭐야, 진짜야?”
내 시큰둥한 태도에 몸을 기울이며 묻는 강주원.
사실 요 며칠 나한테 삐져 있던 강주원이었는데.
지금 보니 다 풀린 것 같았다.
내가 내 옆자리 티켓을 주겠다고 해 놓고는 경기에서는 나와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보내 버렸기 때문이다.
뭐,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게 퍼거슨 영감님이랑 우드워드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바람에…….
그래도 비즈니스인 만큼 강주원도 이해해 줬었는데.
그 이후, 퍼거슨 영감님의 사인을 꼭 받아 주겠다는 약속을 못 지켜서 내게 한동안 삐졌었다.
‘영감님이 바로 떠나신 걸 어떡하라고.’
형편없는 경기 결과에 우드워드와 설전을 벌이시고.
곧바로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신 퍼거슨 영감님이다.
사인이고 자시고, 인사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
나중에 박지성 선수를 통해 강주원에게 줄 사인을 부탁하기는 했는데, 내 부탁이라는 걸 듣고는 거절하셨다더라.
그 양반도 참.
은근히 속 좁단 말이지.
아니, 누가 데파이 사라고 했냐고.
아무튼.
“진짜는 무슨. 경기 보고 싶대서 티켓 보내 준 것뿐이야. VIP석도 아니었잖아요?”
“그래? 그런데 너한테 굳이 팰리스 경기를 보고 싶다 했다고? 뭐야. 그거 시그널 아니냐?”
“시그널은 무슨. 영국 사람이니까 팰리스 팬인가 보죠.”
“아오. 이러니까 네가 맨날 이렇게 혼자 궁상이지.”
“그거 자기 소개 아님?”
“인마, 형 모르냐? 북창동 연애 박사, 강주원. 내가 보기엔 데이지가 너한테 관심 있다.”
자칭 연애 박사 강주원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훈수를 둔다.
물론 내가 진짜 고자도 아니고.
가끔씩 틱톡의 DM 기능을 통해 연락해 오는 데이지가 내게 어느 정도의 관심이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아마 팰리스 경기가 보고 싶다고 한 것도 같이 보자는 의미였을 거다.
하지만 그걸 굳이 따로 티켓을 2장 보내면서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랑 보러 가라고 에둘러 거절한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할리우드식 연애는 아직 잘 모르겠단 말이지.’
원래도 요즘 할리우드에서 뜨는 핫한 여배우였지만, <마지막 마법사>의 성공으로 엄청난 스타덤에 오른 데이지 콜린스.
그녀 못지않게 인기를 얻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있다 해도 로버트 때문에 안 돼요.”
“로버트? 로다주? 아님 패틴슨?”
“패틴슨이요. 걔랑 제가 친하잖아요.”
당연 그녀의 상대역이자 <마지막 마법사>의 주연을 맡았던 로버트 패틴슨이었다.
저번 <마지막 마법사> 촬영에서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친구가 된 로버트.
그와는 군대 안에서도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는데.
주로 아스날의 팬인 그가 내게 울분을 토하고, 나는 그런 그를 놀려 먹고는 했다.
여하튼.
데이지 얘기하는데 굳이 로버트 얘기를 꺼낸 건 그 둘이 <마지막 마법사> 촬영 기간 동안 퍽 깊은 사이로 발전했었기 때문이다.
“뭐야. 둘이 사귀었다는 거 진짜였어?”
“넵. 듣기로는 한 두 달? <마지막 마법사>가 오지 촬영이 많았잖아요. 촬영 기간 동안 짧게 불타오르고 짧게 식었다던데요.”
발전했다가 아닌 발전했었다.
과거형인 만큼 지금은 헤어졌다는 의미였다.
물론 둘 다 할리우드의 쿨한 배우들이어서인지, 연애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어서인지 이후 촬영은 별다른 무리 없이 잘 마쳤다고 한다.
게다가 지금은 서로 연기 조언도 해 주는 좋은 친구 사이로 남았다고.
괜히 안 좋게 헤어져 서로 앙금이 남아 이후 있을 <마지막 마법사> 제작에 차질이 생겼으면 안 됐을 텐데.
<마지막 마법사>의 원작자이자 제작사 오너인 나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
“그러면 음… 친구 전 여친이 너한테 들이대는 거네?”
하지만 둘이 그렇게 쿨한 사이가 됐다고, 나까지 데이지의 어프로치를 쿨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죠? 할리우드란… 아, 한국 연예계도 비슷하려나?”
“뭐… 그런 경우가 없는 건 아니긴 한데… 에이, 모르겠다. 밥이나 먹자. 배고프다. 내가 너 일어날 거라고 쉐프님한테 부탁해 놨어.”
“오, 땡큐요.”
그렇게 오랜만에 제대로 먹은 식사.
식사 후 소파에 누워 TV를 보려고 했는데.
“야.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소 된다.”
…이 형이 점점 우리 엄마 같아지는 건 내 착각일까?
여튼, 강주원은 좀 쉬려는 내게 계속 함께 런던 구경 가자고 설득하고 있었다.
나야 팰리스나 기타 사업 때문에 런던을 하도 자주 찾으니 이제 구경할 것도 별로 없지만.
강주원은 이번이 영국에 온 게 두 번째라고 한다.
그나마도 저번에는 촬영 일정이 바빠 제대로 구경도 못 했고.
돈도 많이 버는 양반이 작품 욕심이 많아서 스케줄을 하도 빡빡하게 가져가는 탓에 해외여행은 몇 번 못 해 봤단다.
‘뭐, 내 알 바는 아니지.’
남자와 함께 둘이서 런던 구경이라.
글쎄, 친구 전 여친이랑 런던 구경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 아닐까.
[미국의 아이오와에서 열리게 될 첫 공화당 경선이 1주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가 현재 테드 크루즈를 상대로 전국적으로 우세를 점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난 19일 있었던 사라 페일린의 트럼프 지지 선언으로 인한 여파로 보이며…….]
채널을 돌리다 나온 뉴스 채널에서 들려온 소식.
‘아. 조만간 공화당 경선이구나.’
그러던 그때였다.
우우우웅-
소파 앞 테이블에 놔뒀던 내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는데.
강주원이 손을 뻗어 내게 핸드폰을 건네줬다.
통화가 오고 있던 것.
“뭐야? 누구길래 이상한 놈이라 저장해 놨어?”
건네면서 화면을 본 강주원이 물었다.
이상한 놈의 전화였구나.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있어요. 이상한 놈, 도널드 트럼프라고.”
“아아. 이름이 이상하긴 하네… 어!? 누구?”
내 대답에 놀라는 강주원.
그가 크게 뜬 눈으로 나를 한번, TV 화면을 한번 번갈아 바라봤다.
[2월 1일 경선이 열리게 될 아이오와에서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37%. 테드 크루즈…….]
저 사람이 이 사람이 맞다는 의미로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 MR. 선! 하하, 좋은 아침입니다.
뭐, 언젠가 갈아타야 하긴 하겠지만 앞으로 몇 년간은 꽤 쓸 만한 끈.
이상한 놈과의 통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