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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도 잘하는 놈이 잘한다-124화 (124/267)

124화 군자의 복수는 10년을 간다

비엘사 감독과의 저녁 식사가 끝나고 다음 날.

“후우- 오랜만이네요?”

“예… 후욱- 훅- 전역하셨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군대에서 생긴 조깅 습관.

원래는 부대 내에서 의무적으로 시행되던 아침 구보가 언제부터인가 누군가의 마음의 편지로 사라졌었는데.

나 같은 경우는 자발적으로 부대원 몇 명과 함께 아침 구보를 뛰곤 했다.

그때 익힌 습관이 사라지지 않도록 되도록이면 전역 후에도 아침마다 이렇게 조깅을 하는데.

켄싱턴 가든 주위를 뛰다가 첼시의 구단주, 로만을 마주치게 됐다.

저번에 경기를 함께 본 이후로 이렇게 얼굴을 제대로 맞대는 건 또 처음.

내가 군대에 있던 도중 챔스 경기를 보기 위해 런던에 왔을 때 저 멀리서 마주친 적은 있긴 한데, 나를 알아본 로만이 황급히 자리를 피하더라.

하지만 지금은 로만 또한 조깅을 하다 코스가 겹쳐 버렸으니.

“후우- 후. 요즘 첼시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더라고요? 후우- 괜찮으세요?”

“…….”

그 말인즉슨, 이렇게 로만을 마음껏 조롱을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쫄리면 뒈지시든가.

이제 나와 로만이 사는 곳으로 돌아가려면 여기 이 길로 쭉 뛰어야 하는데, 조롱 듣기 싫다고 나를 피할 방법은 꼬리 말린 개처럼 도망가는 것 하나뿐이었다.

‘흐흐. 이걸 이렇게 마주치네.’

사실 군대에 있을 때 꽤 바라고 있던 로만과의 만남이었다.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늦지 않는다고.

그걸 상남자 선우진식 해석을 하자면 복수는 10년 내내 해도 모자람이 없다는 뜻이 될진대.

저번 경기 관람 이후로 이렇게 로만을 놀려 먹을 찬스를 또 잡게 되니, 오늘 하루가 무척이나 상쾌하게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올 시즌 팰리스가 전반기 내내 리그 테이블 최상단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

그건 그간의 영입으로 팰리스의 스쿼드가 다른 빅 클럽들과 비교해도 그리 꿀리지 않는 덕분도 있지만.

가장 큰 건 빅5로 일컬어지는 EPL의 맨유, 첼시, 리버풀, 맨시티, 아스날.

그중 아스날을 제외한 나머지 4개의 클럽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단체로 죽을 쑤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선 퍼거슨 경이 은퇴한 후 맹구라는 멸칭까지 얻은 맨유는 말할 것도 없었고.

지지난 시즌 EPL 우승과 지난 시즌 2위라는 성적을 거두며 오일 머니의 힘을 보여 주었지만, 스쿼드의 노쇠화와 계속된 부상 이슈로 올 시즌은 챔스권에서 빌빌대고 있는 맨시티.

시즌 도중 브랜던 로저스를 경질하고 위르겐 클롭을 새 사령탑으로 선임했을 정도로 부진한 성적을 보여 주고 있는 리버풀.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로만의 첼시까지.

‘가장 심각한 건 그중 첼시고 말이야.’

로만이 괜히 내 괜찮냐는 물음에 답을 하지 않고 똥 씹은 표정만 한 게 아니다.

올 시즌 부진하고 있는 저 네 클럽 중 최악을 뽑으라면 단연 첼시였는데.

‘역시 무갓동님…….’

한때 FC 포르투라는 자국 리그에선 강팀이지만 유럽 전체에서 경쟁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클럽을 이끌고 연달아 UEFA컵과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 주제 무리뉴.

그 명장(?)이 만든 한 가지 유행어가 있었는데, 바로 ‘무리뉴 3년차’라는 단어였다.

무리뉴가 감독으로 부임한 지 3년째가 되면 그 팀은 항상 꼬라박게 된다는 뜻으로, 지금의 첼시가 바로 무리뉴가 이끄는 3년차였다.

그리고 현재 리그 테이블에서 첼시의 순위를 살펴보자면…….

[EPL 순위 테이블]

1. 크리스탈 팰리스 FC

2. 아스날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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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첼시 FC

바로 13위.

3위가 아니고 13위다.

꼬라박다 못해 지하실 바닥을 뚫고 저 아래로 가 있다.

순위표에서 한참이나 눈을 내려야 간신히 찾아볼 수 있는 순위.

심지어 이것도 무리뉴가 경질되고 명예 한국인 ‘히딩크’ 갓동님께서 임시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끌어 올린 순위였다.

한때는 16위까지 내려가며 국내 축구 커뮤니티에서 첼강딱, ‘첼시는 강등이 딱이야’라는 명언까지 제조한 끝에 나온 결과였던 것.

“아! 히딩크 감독님을 선임하신 건… 후우-! 참 좋은 선택이셨어요. 아시죠? 2002년 4강? 흐흐. 후욱- 언제 기회 되면 히딩크 감독님하고의 만남도 주선해 주세요.”

“…….”

“지금 후욱, 경기력도 엄청 달라졌다면서요. 어쩌면… 후우… 유로파… 후우… 리그에 나가실 수 있으실지도? 후우… 챔스는 물론 힘드시겠지만요.”

“…….”

뛰면서 하도 입을 털어 대니, 숨이 달리기 시작하지만.

지금의 찬스를 놓칠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로만이 내 말을 그만 듣고 싶다는 듯 조금 전부터 속도를 높여서 달리고 있는 터라, 이제 이럴 수 있는 시간이 몇 분 남지 않았다.

‘이런 장면을 다큐에 찍었어야 했는데.’

물론 저번과는 달리 로만이 초상권 등을 이유로 찍은 장면을 활용하지 못하게 하겠지만.

그래도 두고두고 소장하는 재미가 있었을 거다.

“후우… Блять…….”

그 와중 로만의 입에서 들려 온 한마디.

거참, 나도 그거 뭔 뜻인지 안다니까.

한국어로 ‘하… 씨발…….’과 같은 뜻을 지닌 방금 로만의 말이었다.

“후욱, 저번 홈경기도… 후우! 이기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으, 막바지에 실점을 하셔 가지고. 내가 다 아쉽더라고요.”

“…….”

하지만 그런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입을 쉬지 않고 있던 그때.

“…아.”

결국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아쉬운 탄식이 나왔다.

반대로 조용히 내 조롱만 듣고 있던 로만의 표정은 밝아졌고.

저기 300M 정도 전방에 나와 로만의 집이 위치한 구역이 슬슬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벌써 끝나다니, 아쉽네.’

마음 같아서는…….

‘야, 그거 해 봐, 그거.’

‘……?’

‘해 봐, 빨리.’

‘한 번의 패배 정도는 첼시 같은 빅 클럽이라면 쉽게 극복할 수 있다. 결국 리그 테이블에서 상단을 차지할 팀은 팰리스가 아닌 첼시.’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인터넷에서 떠도는 짤의 상황을 재현하고 싶은 기분인데.

시간이 왜 이리 빨리 지나가 버린 건지.

여하튼.

이제 헤어지기 전 로만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후욱- 그러면 다음에 또 뵙죠. 후우. 다음 달에 저희 홈에서 경기 있는 거 아시죠? 그때도 저번처럼 초대할 테니, 꼭 와 주세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초대를 할 거다.

물론 로만이 그 초대를 받고 팰리스 구장을 찾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그래도 로만이 오지 않더라도 그렇게 도망치는 선택을 하게 했다는 점에서 나름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 * *

힘세고 강한 아침!

하루를 상쾌하게 시작하니, 오늘 하루 좋은 일만 가득할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런던 시내 외곽에 위치한 아파트로 들어갔다.

경비원이 반갑게 나를 맞아 줬는데.

이 아파트가 내 소유였기 때문이다.

서울 집값보다 몇 배나 비싼 곳이 런던이라고.

크리스탈 팰리스 직원들이 집세 등으로 고통받고 있기에, 근처의 아파트를 그냥 사 버렸다.

지금은 구단의 직원들 말고도 <웬 이글스 데어> 촬영 팀도 이곳에서 머물고 있는데.

“작가님!”

나를 보자마나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을 하는 최 PD.

예전에는 여느 제작 PD답게 초췌한 얼굴을 하던 그였는데, 오랜만에 보니 아주 얼굴에 살이 제대로 붙었다.

‘특이한 인간이야.’

영국에 살면서 영국 음식이 입에 맞아 살이 찌다니.

내가 미식가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최 PD의 입맛이다.

“<웬 이글스 데어> 인기가 좋더라고요.”

“하하. 모두 작가님 덕분이죠.”

<웬 이글스 데어>의 인기가 좋다고 말한 건 단순히 입발림 소리는 아니었는데.

실제로 스웜이 진출해 있는 전 세계 각국 모두에서 다큐멘터리 부분 TOP 3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그중 한국과 중국 그리고 축구가 인기 있는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는 확고부동한 최고 인기 다큐였고.

게다가 크리스탈 팰리스에서 자체적으로 분석한 결과, <웬 이글스 데어>를 통한 마케팅 효과가 상당했는데.

저번에 회의했던 오성 그룹과 나이키 이외의 후원 제안 중 상당수가 <웬 이글스 데어>를 통해 팰리스에 후원을 결정한 곳이라고 한다.

심지어 그런 마케팅 효과가 부러웠는지, 다른 구단들에서도 스웜을 통해 구단 다큐를 만들 수 있겠냐는 문의가 쏟아지고 있었으니.

하나의 성공이 다른 성공을 이끄는 것.

‘EPL 쪽에서도 그렇고, 레‧바‧뮌 모두 문의가 왔었지.’

특히 뮌헨에서 제시한 조건이 제일 좋았는데.

아무래도 다른 빅 클럽 대비 상대적으로 인기 및 마케팅 효과가 적은 바이에른 뮌헨이라는 구단의 특성 덕분인 것 같았다.

거기에 그런 뮌헨은 또 특이하게도 중국 내에서의 인기만큼은 최고 인기 구단인 맨유 못지않았는데, 중국으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스웜이기 때문도 있었다.

‘아직도 넷플릭스가 중국에 진출하지 못 했지.’

해외 온라인 콘텐츠 공급자에 대한 중국 정부 당국의 규제 정책은 내가 군대에 있는 사이에도 나날이 엄격해지고 있었다.

특히 내가 저번에 ‘느그 당서기 광둥성 살제?’라는 궁극기 사용으로 얻어 낸 중국 내 라이센스.

넷플릭스가 제일 난항을 겪는 게 바로 그 라이센스 취득에 대한 부분이었는데.

아마, 원래 역사처럼 이번 생에서도 넷플릭스가 중국에 진출하게 될 일은 없지 않을까.

여하튼.

넷플릭스가 없다고 해서 중국 내의 경쟁자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텐센트비디오(腾讯视频, WeTV), 바이두의 아이치이(爱奇艺), 알리바바의 유쿠(优酷).

스웜 이외에 존재하는 중국의 대표적인 OTT 플랫폼이 저기 세 곳이었는데.

내가 군대에 간 사이, 텐센트비디오는 사업을 철수했다.

나와 일찍이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만큼 경쟁을 피하려는 심산도 있을 거고, 무엇보다 결국 경쟁 끝에 살아남는 건 자신들이 아닐 거라는 결론을 내려서였다.

당장 텐센트비디오의 제일 인기 콘텐츠였던 검객무쌍이 스웜 진출과 동시에 계약이 만료되기도 했고.

계산기를 돌려본 결과, 차라리 발 빠르게 스웜에 합류해 자기네들 자체 콘텐츠를 스웜을 통해 공급하는 게 낫겠다 싶었던 거다.

뭐, 여러모로 잘한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다.

스웜의 중국 진출 이후 원래의 성장세가 엄청나게 꺾여 버린 아이치이와 유쿠의 현 가입자 수가 그걸 증명해 주고 있었다.

‘K-콘텐츠들이 저 두 플랫폼에서 모두 발을 빼 버렸으니.’

현재 중국 문화 시장을 점령하고 있는 건 한국의 콘텐츠들이었다.

우주남의 성공을 시작으로, 여러 K-드라마가 특유의 자극적인 맛을 통해 중국 시청자들을 제대로 중독시켰는데.

기존 텐센트비디오와 아이치이, 유쿠의 싸움은 적당한 양의 자체 제작 콘텐츠들을 만들어 내는 건 기본이고, 그 후 얼마나 많은 K-콘텐츠를 확보하냐에 달린 싸움이었다.

나와 긴밀한 관계였던 텐센트비디오 VS CM 그룹을 비롯한 다른 K-콘텐츠들을 방영하던 아이치이와 유쿠의 싸움이었는데.

내 입대 전 있었던 CM 그룹의 사실상 항복 선포와 스웜 진출 이후, 기존에 확보해 뒀던 콘텐츠들 이외로 추가적인 K-콘텐츠들과의 계약을 따내지 못한 것이다.

거기에 기존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며 계약이 만료되고는 스웜으로 넘어오게 됐고.

그 결과, 스웜은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며 중국 내 구독자만 3,500만 명 이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반대로 아이치이와 유쿠는 스웜을 따라잡기 위해 온갖 공격적인 투자를 서슴치 않고 있음에도 3년 전 예상했던 수치인 2,000만 명의 반도 확보하지 못 했다.

즉, 중국 내 OTT 시장의 50% 이상을 스웜이 독차지하고 있는 상황.

그리고 OTT 산업은 가입자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성장세도 더욱 높은 경향을 띄기 마련이었다.

다음 날 어제 본 드라마를 가지고 여러 얘기를 떠드는 게 또 하나의 재미인데, 몇 명 보지도 않는 드라마를 봐서 어디에 써먹겠나.

‘물론 조만간 한한령이 발동되기는 하는데…….’

그에 대한 대비는 어느 정도 다 끝내 두었다.

스웜의 중국 내 가입자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게 K-콘텐츠인 건 맞지만, 스웜이 경쟁 플랫폼인 아이치이나 유쿠보다 나은 점이 K-콘텐츠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텐센트에서 공급해 주는 중국 콘텐츠들도 있고.

내가 저번에 인수했던 중국 제작사를 통해 스웜이 판권을 갖고 있는 유명 영화들이 중국 버전으로 리메이크되어 공급되고 있기도 했다.

또한 K-콘텐츠 외에도 스웜만이 공급할 수 있는 할리우드의 영화들이 스웜의 큰 강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외에도 따로 내가 준비하고 있는 것도 있었다.

“아! <찬탈자> 2부 정말 잘 봤습니다. 런던에도 한국어로 된 버전을 팔더라고요.”

“하하. 그래요? 그건 또 몰랐네.”

“예. 한인들이 많이 살아서 그런가 봐요. 여튼 이번 작품도 너무 재밌었습니다! 역시 작가님!”

최 PD의 아부성 멘트.

나는 이런 걸 굳이 꺼리는 편이 아니었다.

이런 건 언제나 들어도 기분 좋은 법.

“조만간 신작도 나오니, 그것도 잘 봐 주세요.”

“어? 신작이요? <찬탈자> 다음 권이 아니라요?”

“하하. <찬탈자> 다음 권도 차질 없이 나올 겁니다. 이건 요즘 써 보고 싶은 장르가 있어서 도전해 본 거라서요. 중국 내에선 엄청나게 잘 팔릴 것 같기는 한데…….”

“와아! 무슨 장르신데요?”

“음. 선협이라고… 중국에서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장르인데, 아실는지 모르겠네요.”

선협(仙俠).

그게 요즘 중국 내에서 하도 핫하대서, 나도 한번 써 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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