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재벌집 딸이 중매를 섬
CM 그룹 박정후 부사장과의 만남.
회귀하고 돈을 벌고 난 이후.
이곳저곳 좋은 데 많이 다녔다 생각했는데.
‘…와우.’
진짜 재벌들이 다니는 곳은 이런 곳인가 싶은 약속 장소였다.
뭐, 장소가 화려했다거나 그래서 한 말은 아니었다.
꿀꺽-
‘겁나 맛있네.’
음식의 맛이 미친 수준이었다.
원 테이블로 운영되는 한정식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었는데.
셰프분의 자택을 레스토랑으로 개조한 곳이었다.
총 14개의 코스 요리가 차례대로 나왔는데, 단 하나도 거를 타선이 없었다.
한식이란 게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나 생각이 들었을 정도.
‘미슐랭 2스타가 괜히 2스타가 아니구나.’
인생의 대부분을 서민으로 살아온 터라.
비싼 소고기보다는 기름 좔좔 흐르는 삼겹살을, 감성돔보다는 집앞 횟집에서 초장 푹 찍어 먹는 광어, 우럭을 더 선호하는 나였다.
그래서 내 입맛은 꽤 싸구려구나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아마 진짜 맛있는 걸 안 먹어 봐서 그랬던 것 같았다.
식도락(食道樂)이란 게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은 기분.
“음식이 입에 좀 맞으시나요?”
“아, 하하. 죄송합니다. 너무 맛있어서 정신없이 먹기만 했네요.”
입에 있던 산적을 꼭꼭 씹어 넘긴 후 대답했다.
나도 참, 먹는 데에 너무 혼이 팔려 있었다.
맛있어도 엔간히 맛있어야지.
여하튼.
박정후 부사장.
40대 중반이라 들었는데, 나이에 비해 젊은 외모.
재벌 중의 재벌이어서 그런가, 풍기는 분위기도 남달랐다.
저 비슷한 사람들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해외에서 만난 슈퍼 리치 중 창업이나 투자를 통해 부자가 된 사람들 말고 날 때부터 부자였던 사람들.
언젠가 봤던 드라마의 대사와 비슷하게,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 대부터 부자였던 사람들 특유의 분위기.
해외의 슈퍼 리치 중 오래된 가문의 역사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과 박정후 부사장의 분위기가 똑 닮아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떠받들어지고, 아랫사람들을 다뤄 왔을 이들이 보여 주는 모습.
뭐, 그렇다고 내가 그런 박정후 부사장의 분위기에 압도됐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오늘의 만남에서 아쉬운 쪽은 내가 아니라 상대니까.’
그냥 신기하다는 느낌이 전부였다.
왜, 내가 소설을 쓰다 보면 귀족이나 왕족의 첫인상을 쓸 때 이런 식으로 다루는데.
그걸 현실에서 보게 된 거였으니 말이다.
“제가 어떻게 불러 드리면 될까요? 작가님? 아니면… 회장님?”
“에이. 회장님이라고 하면 너무 틀… 아니, 좀 늙어 보이잖아요. 작가라는 호칭이 더 좋습니다.”
사실, SW 프로덕션 등에서도 나를 회장님으로, 하다못해 대표님이라 불러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도 있었는데.
그건 내가 극구 거절했다.
선 회장님… 선 대표님… 으음.
듣는 것만으로도 닭살 돋을 거 같았다.
“TVIM을 매각하고 싶으시다고요.”
“네. 맞습니다.”
이후로 박정후 부사장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식사를 마무리하고.
차를 마실 때쯤 본론으로 들어갔다.
TVIM.
스웜의 첫 출범 때야 내 마음속에서 TVIM은 국내 최대 경쟁 업체였지만.
그건 뭐라고 해야 하나, 내가 회귀한 탓에 생긴 크나큰 착각이었다.
내가 있던 미래에서만 해도 미디어 콘텐츠 제작, 유통, OTT, 엔터테인먼트 채널 등 모든 분야를 쥐락펴락하던 CM 그룹.
그 거대함 때문에 TVIM이 스웜의 가장 큰 경쟁 업체가 될 거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게 웬걸.
내 예상보다 스웜은 몇 배 더 빠르게 성장했고, 반면 TVM이나 TVIM의 성장은 내가 알던 것보다 몇 배는 더 지지부진했다.
그 덕에 스웜과 TVIM은 CM 그룹이 얼마나 많은 돈을 퍼붓든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벌어졌는데.
지금 시점에서는 사실 TVIM은 스웜과 비교하자면 OTT라고 부를 수준도 되지 못했다.
IPTV 플랫폼이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한 수준.
그나마 스웜 따라잡겠다고 투자를 거듭하며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춰 가고 있다고 하긴 하던데.
구색 갖춘 정도로는 나를 유혹하기에는 한참이나 무리였다.
즉, 내 입장에서 TVIM은 사도 그만, 안 사도 그만인 서비스라는 뜻이었다.
‘직접 관련 제안을 살피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야.’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은 180도로 바뀌게 되고 말았는데.
CM 측에서 넘어온 인수 제안서와 관련 협약의 서류를 받아 보았기 때문이었다.
‘향후 10년 동안 CM이 보유한 다수 종편 채널과 오리지널 콘텐츠, 각종 영화 콘텐츠들을 스웜에 독점 공급하겠다라.’
세부적인 조건들은 2년 단위로 재설정하기로 되어 있지만.
여튼 간에 10년의 독점 계약이면 사실상 CM이 OTT 사업을 포기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10년 동안 스웜에서 엄청나게 소비됐을 콘텐츠들을 가지고 새로 OTT를 차려 봤자 그걸 구독할 소비자들은 현저히 적을 테니까.
즉, 항복 신호인가 싶었는데 아예 항복을 넘어서 OTT 쪽에 있어서는 CM이 아예 스웜의 밑으로 들어오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 대신 CM이 가져가는 부분들도 있기는 했다.
‘우선 스웜을 통한 CM 콘텐츠들의 글로벌 진출.’
아직은 국내와 일부 아시아권에서만 서비스되고 있지만.
한두 달 내로 서구권 18개국에 서비스를 론칭하는 스웜이다.
또 몇 년 내로는 넷플릭스를 따라잡는 걸 넘어 추월할 예정이었고.
그리고 또 하나.
‘써밋 엔터나 SW 프로덕션에서 제작하는 영화의 국내 배급을 CM이 전부 담당하고 싶다니까.’
OTT를 내주는 대신, 국내 영화 산업은 온전히 자기들이 먹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제작 분야는 제외하고, 거기까지 가면 나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아무튼.
CM의 이런 제안을 두고 SW 프로덕션 측에서 열심히 계산기를 굴려 봤는데.
받아들이는 게 나한테 더 이득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어차피 국내에서의 배급이야 내 주력 사업이 아니었고, 애초에 멀티플렉스를 갖고 있는 CM이나 기타 회사들의 손을 빌려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거 빌리기 싫다고 굳이 점차 사장될 산업인 영화관에 내가 투자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국내를 제외한 해외 배급이야 써밋 엔터가 여전히 차지할 테니.
‘게다가 지금 기준으로도 내가 조금 더 이득이다? 그러면 OTT 시장이 훨씬 더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미래에는 더 커다란 이득이라는 소리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쪽의 이득이 더욱 커질 거다.
물론 그렇다고 CM이 손해를 보는 건 아니고.
저쪽에서 가져가는 건 작은 이득, 내가 가져가는 건 커다란 이득이 되는 거지.
흐으음. 하지만 역시 여기서 넙죽 받아들이면 섭하단 말이지.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TVIM뿐만 아니라 모회사인 CM 헬로비전까지 매각하시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습니다.”
“어차피 파시는 거 그거까지 얹어서 파시는 건 어때요? 가격은 꽤 괜찮게 쳐 드릴 테니. 아, 그렇다고 저 벗겨 먹으시려고 하시면 바로 취소입니다.”
“…….”
박정후 부사장의 얼굴이 순간 멍해졌다.
내가 너무 교양 없이 말했나?
* * *
구두에 불과한 거지만 CM 헬로비전까지 넘기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알고 보니 CM 측에서도 그 회사를 두고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던 거다.
원래는 SY브로드밴드에 매각 예정이었다는데, 독과점으로 이동통신 시장의 경쟁 질서가 훼손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매각을 불허했다는 거다.
아직 언론에 발표된 소식도 아니고, 회귀 전에도 내 관심사 밖의 일이었던 터라 미처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 굳이 숨기지 않고 말한 걸 보면…….’
박정후 부사장이 대화 도중 내게 했던 말이 진짜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CM은 나와 경쟁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고, 상생을 원한다 했던 것.
…뭐, 누가 비즈니스 자리에서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겠냐마는.
CM 헬로비전 얘기를 감추지 않은 것도 그렇고, 이후에 박정후 부사장이 내게 했던 제안을 생각하면 상생을 원한다는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인 거 같기도 했다.
그 제안이 뭐였냐면.
바로 맞선이었다, 맞선.
‘지금 만나는 사람은 있나요?’
‘…네에? 어… 그게…….’
‘잠깐만요.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설마 사십 넘은 제가 작가님을 노린다 생각하신 건 아니죠? 제 조카 얘기에요, 조카!’
‘하, 하하. 예. 그랬군요. 어, 그런데 조카분이요?’
‘네. 제 이름이 좀 남자 같죠? 저희 아버지가 집안 장손이셔서 첫째도 아들이길 원하셨거든요. 그런데 딸이 태어났다고 이름을 남자처럼 짓지 뭐예요?’
‘…….’
‘그런 분이 2년 후에 태어난 제 남동생을 얼마나 아끼셨겠어요? 아주 어릴 때부터 CM의 황태자처럼 키우셨죠. 그런데, 아시죠? 제 남동생.’
‘예. 몇 년 전에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맞아요. 그 탓에 제가 그런 게 아니냐는 말도 있었는데, 믿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전 진짜 아니에요. 당시에는 그룹을 갖고 싶다는 욕심도 없었고.’
‘…….’
‘그런데 이게 또 제께 될 거 같으니까 이야기가 달라지더라고요. 원래 그냥 안 주는 건 괜찮아도 줬다 뺏는 건 나쁜 거라잖아요.’
그러니까 박정후 부사장의 말은 이러했다.
자신의 조카, 즉 세상을 떠난 남동생의 유일한 독녀가 나와 나이대가 비슷한데.
혹시 결혼을 전제로 만나 볼 생각이 없냐는 거다.
재벌집 자녀 중 인물 좋고, 성격 좋기로 소문난 조카라면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던데.
그러면서 제 속내를 숨김없이 밝히더라.
‘아들 사랑 대단한 거야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떻게 된 게 딸 사랑보다 아들이 낳은 딸 사랑이 더 대단할 수가 있는 건지.’
그녀의 아버지이시자 CM 그룹의 회장이신 분이 요즘 따라 제 손녀가 눈에 밟히시나 보더라.
그래서인지 CM 그룹의 지분을 꽤 주고 싶어 하신다던데, 자기는 그걸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것.
남동생이 살아 있을 때는 자신은 배제한 채 철저히 CM을 남동생의 것으로 만드려 해 놓고, 이제 와서 일부라지만 손녀에게는 지분을 주려는 게 말이 되냐고 그러더라.
그렇게 말하며 굳이 나와 맺어 주고 싶어 하는 이유도 말해 줬다.
‘아무리 손녀 사랑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손녀사위가 그룹을 집어삼키는 건 보기 싫지 않겠어요?’
‘아하. 만약 제가 부사장님 조카분이랑 맺어지면 그룹을 홀라당할 수도 있으니, 상속에서 그룹 지배 지분은 배제하실 거다, 이거죠?’
‘정확하시네요.’
뭐, 대충 이런 거다.
여하튼.
사실 궁금해서 물어보기는 했지만, 구구절절한 사연은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제가 자만추라서.’
‘자만추요?’
‘네.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요.’
어차피 내가 그 맞선 자리를 거절했기 때문.
자만추라 말한 건 거짓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회귀 전부터 지켜 온 내 연애관인데…….
음, 그래서 회귀하고 나서 연애 한 번을 못 했나?
그나저나-
‘박 부사장이 주겠다는 선물이 뭐려나?’
TVIM 및 CM 헬로비전 인수가 확정되고 나서 박정후 부사장이 나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며칠만 기다리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라 했다.
분명 가진 돈으로 따지면 내가 자신보다 몇 배는 더 많다는 걸 잘 알고 있을텐데.
그런 박정후 부사장이 ‘절대 작가님이 싫어하지 않으실 선물’이라 밝힌 게 대체 무엇일지 참 궁금했다.
그리고 며칠 후.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침대에 누워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뻘글을 보는 거로 하루를 시작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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