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머스크소의 뒷걸음질
후반전 시작 후 10분이 지나고.
첼시의 변화를 가장 먼저 느낀 건 원정 팬들이었다.
“Super, Super Frank. Super, Super Frank. Super, Super Frank. Super Frankie Lampard!”
그 변화를 이끈 선수의 응원곡이 원정 팬석에 울려 퍼졌다.
비록 전성기와 비교하자면 그 기량이 하락했다지만.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고.
램파드가 램파드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었다.
투욱-!
한때 리그 정상을 거머쥔 건 물론, 세계 최고의 중원을 노렸던 첼시의 레전드가 만들어 내는 공격 기회에 팰리스의 수비수들은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있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창조적인 패스가 패널티 박스 안쪽으로 쏟아지고.
그렇다고 스트라이커만 붙잡고 있자니 미들라이커로 불렸을 정도로 득점력이 뛰어난 램파드가 중거리 슈팅을 뻥뻥 때려 대고 있으니.
“좋아!”
“프랭키-! 고! 프랭키!”
원정 팬들의 기세가 다시 오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두 팀 모두 런던에 연고를 두고 있는 팀.
그렇기에 준비된 원정석은 빼곡히 차 있었는데.
전반 동안은 경기 내용이 그들의 예상외로 흐르는 탓에 기를 못 펴고 있던 그들이었다.
시작 4분 만에 선제골을 먹히고, 동점 골도 가까스로 넣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역전당하고 말았으니.
팰리스 홈팬들의 기세에 제대로 압도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램파드가 투입된 이후, 중원에서의 볼 배급이 안정화되면서 양쪽 날개가 살아나고 있었다.
아자르와 윌리안이라는, EPL 최고라고도 볼 수 있는 양쪽 날개가.
“와-!”
재차 원정석에서 들려온 함성.
윌리안이 브라질리언 특유의 창조적인 플레이로 두 명의 선수를 한꺼번에 제친 덕이다.
곧바로 반대쪽으로 길게 차 주며 아자르에게 이어진 패스.
그렇게 후반 13분.
뻥-
빠른 스피드를 활용해 중앙으로 꺾어 들어가며 반 다이크의 압박을 떨쳐 낸 아자르.
그가 쏘아 낸 공이 골대 안쪽을 향해 급격하게 꺾였다.
안타깝게도 팰리스의 골키퍼는 휘어지는 공의 움직임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 했고.
삐이익-!
득점을 선언하는 휘슬이 불렸다.
그와 함께.
“그래! 그거지! 흐하하!”
VIP 관중석에서는 기쁨을 표출하는 로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 *
삐익, 삐익, 삐이익-!
경기 종료를 알리는 주심의 휘슬 소리가 길게 울렸다.
추가 시간이 무려 6분이나 주어졌을 정도로 치열했던 경기.
한국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뭐 난다고.
그러면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 걸까.
웃다가 울어도 똑같은 게 엉덩이에 나려나?
뭐, 정답이 뭐가 됐든.
“Cука блять…….”
그런 말을 남긴 채, 떠난 로만의 엉덩이를 확인해 보면 정답을 알 수 있을 거다.
‘쒸카 블럇?’
저게 무슨 말이려나.
뒤에 붙은 블럇이라는 말이 대충 ‘씨발’ 비슷한 욕이었으니, 앞의 건 그걸 강조하는 접두사이지 않을까 싶었다.
즉, 코리안 버전으로는 ‘개씨발’ 정도겠지.
쯧쯧.
아무리 화났다고 해도 사람이 저렇게 욕을 남발해서야 원.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하하. 오늘 로만 구단주 얼굴만 따도 그림이 좀 나오겠는데요?”
그런 말을 하며 다가와 웃는 촬영 감독님.
감독님의 말대로, 한 편의 드라마가 그대로 담겨 있던 로만의 얼굴이었다.
‘경기 시작 전에만 해도 잔뜩 자신만만해 있다가…….’
선제골에 얼굴이 구겨지고.
그러다 동점 골을 넣으며 다시 환해졌다, 이어진 역전 골에 굳어지고.
후반전 13분에 터진 동점 골에는 다시 기세등등해지더니.
경기가 모두 끝이 난 지금은 욕설과 함께 퇴장하지 않았나?
[크리스탈 팰리스 FC 3 : 2 첼시 FC]
후반전 45+4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바로 2분 전에 터진 역전골 때문이었다.
뭐, 더 브라위너의 선제골이나 바디가 넣었던 헤딩 골처럼 아름다운 장면은 아니었고.
페널티 박스 안쪽에서 선수들이 뒤엉키며 우당탕탕거리다 넣은 골이었다.
일명 우당탕 골.
하지만 뭐 골 예쁘게 들어갔다고 점수 더 주고 그런 규정은 없다.
1점은 1점 그리고 승리는 승리.
결국 승점 3점을 가져가는 쪽은 팰리스였다.
여하튼.
경기가 모두 마무리되고.
서로 인사 따위를 주고받은 감독과 선수들도 모두 필드를 떠나자, 비출 곳 잃은 경기장 카메라에 순간 내 모습이 떴다.
Woooooaaaah-!
태양-! 태양이시여-!
그러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홈팬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런 팬들의 모습을 빠짐없이 찍는 <웬 이글스 데어> 촬영 카메라들.
문득 든 생각인데.
사람 수로 따지면 당연 팰리스의 팬보다 내 소설의 팬들이 더 많겠지만, 나한테 열광하는 정도로 따지면 이 사람들이 더 위이지 않으려나.
아무리 글이 재밌고 빠져든다고 해서, 스포츠 팀을 응원하는 것처럼 글을 쓴 작가를 응원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 * *
첼시전 이후로 시간이 조금 흘렀다.
3주 정도.
그사이, 팰리스는 원정 경기 2번, 홈 경기 1번을 추가적으로 치렀는데.
원정 경기에서는 모두 승리, 홈경기에서는 무승부라는 성적을 거뒀다.
원정에서의 승리야 당연히 어느 팀이 상대이건 상관없이 언제나 기쁜 일이었고.
이번 홈경기의 상대가 최근 리버풀에게 1 대 5로 패하며, 팰리스와의 챔스 진출 경쟁에서 1점 뒤지게 된 아스날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것 또한 고무적인 결과였다.
여전히 1점의 리드를 유지할 수 있는 상황.
[로버트 패틴슨 - 이건 말도 안 돼…….]
[로버트 패틴슨 - 90분에 동점골을 먹히다니… 그것만 아니었으면 우리가 다시 4위로 올라서는 건데!]
개집 팬인 로버트한테서 경기가 끝나고 이런 연락이 오더라.
[나 - 벌써부터 슬퍼하지 마.]
[나 - 진짜 슬퍼질 순간은 시즌 막바지 아스날의 5위가 확정되는 순간일 테니.]
이렇게 답장하자 욕설 잔뜩 섞인 문자가 곧바로 날아왔다.
물론 가뿐하게 씹어 줬고.
<마지막 마법사> 촬영이 끝나면 날 보기 위해 한국에 한번 오겠다던데.
그때에는 시즌도 끝나 있을 테니, 로버트를 잔뜩 놀려 먹을 생각이었다.
뭐, 그러려면 당연히 팰리스가 지금의 리드를 쭉 유지해야겠지만.
[1. 맨체스터 시티
2. 리버풀
3. 첼시
4. 크리스탈 팰리스
5. 아스날]
현재의 리그 테이블.
사실 로만과 경쟁 구도 비스무리한 게 생기면서 첼시전에서 꽤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기는 했지만.
지금 우리와 진정으로 경쟁하고 있는 팀은 아스날이었다.
리그 초반만 해도 승승장구하며 리그 테이블 최상단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아스날은
후반기로 들어서며, 팀의 고질병이나 다름없는 부상 이슈로 현재는 5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다만, 팰리스와의 차이는 고작 1점.
라운드 한 번으로 바로 뒤집어질 수 있는 차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팰리스가 4위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 꽤 자신하고 있었는데.
[팰리스에서 잠재력을 만개한 더 브라위너, 4경기 연속 공격 포인트 달성.]
[아스날과의 경기에서 MOM에 선정된 케빈 더 브라위너.]
[크리스탈 팰리스의 돌풍, 어쩌면 시즌 종료까지 이어질지도? 경기 막바지 동점 골에 성공하며 자신의 이름을 팬들에게 각인시킨 모하메드 살라.]
우선 리버풀에게 1 대 5로 패배하며 기세가 제대로 꺾인 아스날과는 달리, 팰리스 선수단의 분위기는 지난 첼시전 이후로 더할 나위 없이 좋기 때문이었다.
모두 새로운 이적생들이 금세 팀에 적응하고, 그중 더 브라위너는 곧바로 리그 정상급의 폼을 보여 주기까지 하는 덕분.
원래 스포츠는 기세 싸움이라고.
팀 내의 긍정적인 분위기가 그대로 경기력에도 반영되고 있었다.
‘경기 일정도 꽤 널널하고.’
유럽 대항전이야 2부 리그에서 막 올라온 팰리스가 당연히 진출할 수 없었고.
FA컵이나 리그컵에도 조기 탈락한 덕분에 리그에 집중하기만 하면 되는 팰리스였다.
게다가 팰리스의 남은 시즌 일정 중 빅 클럽이라 부를 만한 구단과의 경기는 끽해야 맨유 하나뿐이었는데.
그와 달리 아스날은 오늘 이후로도 첼시와 맨유, 맨시티와의 경기가 남아 있었다.
분명 아스날 역사상 최악의 패배 중 하나인, 첼시와의 0 대 6 경기가 이번 시즌이었으니.
크리스탈 팰리스의 다음 시즌 챔스 진출을 꽤 자신할 만하다는 뜻.
여하튼.
“촬영 잘 마무리하세요. 필요한 거 있으면 제 이름 파시고요.”
“넵. 알겠습니다. 작가님도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 비엘사 감독님이나 선수들 심기 건드리시면 얄짤 없습니다. 아시죠? 전 이 다큐보다 제 구단이 더 소중한 거.”
“하하. 그럼요.”
최 PD를 비롯한 촬영 팀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런던에서의 일정이 마무리됐기 때문.
더 찍고 싶은 장면들이 몇 있기는 했다.
가령, 맨유와의 경기라거나 그런 것들.
이제 ‘한국인이라면 맨유 응원합시다!’에서 ‘한국인이라면 크팰 응원합시다!’로 바꿔야 하니 말이다.
사실 촬영 팀에서는 나와 관련된 장면을 더 찍고 싶다는 걸 내가 억지로 떠나겠다고 한 거기는 한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공항으로 바로 갈까요?”
“네. 바로 가 주세요.”
내가 지금 한국으로 가는 것도 사실은 그 이유 때문.
뭐, 굳이 한국에 갈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대응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리고 그게 무엇이냐 하면…….
“도착했습니다.”
“으어. 피곤하네요.”
비행 시간만 무려 12시간을 초과한 데다가, 영국 기준으로 적응된 시차 탓에 비행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무척이나 피곤했다.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 잠을 때리고 싶은데.
잡아 놓은 일정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직원의 안내를 따라가자 저 멀리 보이는 수많은 사람.
그중 한 명이 ‘어? 왔다! 선우진이다!’를 외치자 모두 내 쪽을 돌아본다.
파앙-! 파앙!
플래시가 일제히 터졌다.
그야말로 플래시 세례.
내 경호원들을 뚫고 내게 가까이 다가오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모두 실패했고.
아무리 코리안 기자들이 대단하다고는 해도, 미국 델타포스 출신 경호원들에게는 서너 명씩 덤벼도 무리다.
아무튼, 눈앞으로 보이는 수많은 기자와 방송용 카메라, 구경꾼 등등.
이게 바로 내가 런던에서의 일정을 끝내고 부랴부랴 한국으로 온 이유였다.
“선우진 씨, 기사 내용이 사실입니까?”
“다음 달에 현역 육군 병사로 입대하신다는 게 진짠가요?”
“갑자기 자원 입대를 택하신 이유가 뭔가요?”
그래.
굳이 언론에는 밝히지 않았던 내 군 입대 소식.
그게 결국 퍼지고 만 것이었다.
누가 퍼뜨렸냐고?
“일론 머스크의 의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일론 머스크가 말하길 남한은 선우진과 같은 인재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하는 이상한 나라라던데, 그 의견에 동의하시나요?”
말해 뭐 하겠나.
우리의 입 싼 친구, 항상 한 대 쥐어박고 싶게 만드는 그놈.
일론 머스크였다.
대주주와 최대 주주, 투자자와 경영자의 관계인 만큼 머스크 또한 조만간 있을 내 군 입대 소식을 알고 있었는데.
그걸 SNS에서 풀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뭐, 그렇다고 누구를 탓하랴.
그게 한국에 알리지 않은 정보라고 말하지 않았던 나를 탓해야지… 는 아니고.
다시 생각해 보니 머스크 탓이 맞다.
이렇게 된 거 나중에 이걸 빌미로 머스크한테 뭐라도 하나 뜯어내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옳았다.
실제로 머스크 탓이 맞기도 했고.
게다가 그렇다고 머스크가 마냥 병크만 터뜨린 것도 아닌 게…….
“원래라면 공익으로 가실 수 있는 걸 현역으로 자원 입대하신 거로 알려졌는데요. 혹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내가 저번 머스크와의 술자리에서 아픈 거로 군대를 빼려다 그냥 현역 입대하기로 결정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사석에서 한 말인 만큼, 내가 말하고자 한 거는 없던 병을 진단서상으로 위조해 빠지려고 했다가 포기했다는 건데.
머스크가 어떻게 알아먹은 건지 그걸 ‘선우진은 치료를 통해 현역으로 입대한 캡틴 코리아와 같은 존재’로 언론에 말한 것이다!
-와;; 역시 선우진; 지린다;
-ㅅㅂㅋㅋㅋㅋ저번에 선우진 군대 그래서 언제 가냐고 열폭 지리던 놈 몇 명 봤는데 ㅋㅋㅋㅋ 그 새끼들 지금은 어디서 뭐 하려나.
-이 악물고 구라 아니냐고 그러고 있을 듯ㅋㅋㅋㅋ
-근데 공익 갈 수 있는 거 맞음? 구라 아님?
└한 명 검겈ㅋㅋㅋㅋㅋㅋㅋ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번 기부 활동도 봐 봐. 참전 군인들 먼저 챙기고… 캬, 진짜 제대로 된 놈이다, 선우진.
-ㄹㅇ 같은 남자인데 반할 듯.
-형… 날 가져…….
└정보) 형 아님.
└ㅇㅈ.
-ㅋㅋㅋㅋㄹㅇ 캡틴 코리아네, 캬.
-위엣 놈 때문에 자료 찾아옴. 링크: https://www…….
└와, 현역 가려고 재수술한 거?
덕분에 인터넷에서 내 호감도는 최상의 최상을 달리는 중.
게다가 내가 고등학교 시절 교통사고를 당해 무릎 쪽 수술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어떻게 와전된 건지 그 수술을 통해 공익으로 빠질 수 있던 걸, 재수술과 재활을 통해 현역으로 자원 입대한 청년 선우진으로 포장이 되어 버렸다.
그거 아닌데… 여튼.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