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누가 쪽팔림은 한순간이랬나
“흐아!”
“미쳤어! 미친 슈팅이었다고-!”
어시스트를 기록한 마샬부터 시작해 마레즈, 바디 등.
크리스탈 팰리스의 동료들이 다가와 더 브라위너를 감쌌다.
“…….”
그런 더 브라위너의 모습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무리뉴 감독.
첼시 벤치의 반응 또한 그리 좋지 못했다.
상대 팀 벤치 앞에서의 셀레브레이션이라니.
그것도 몇 주 전 팀을 떠난 더 브라위너가 무리뉴 감독을 바라보며 부르짖는 포효.
“저거 뭐 하는 거야!”
“이 새끼들이 미쳤나……!”
“헤이! 케빈! 이건 좀 아니지!”
그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만!”
순간, 야구에서나 볼 법한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할 뻔도 했지만.
무리뉴 감독이 빠르게 벤치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했다.
기습적으로 먹힌 선제골.
상황이 흘러가는 것을 보아하니, 전술의 몇 가지를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어쩌면 선수 몇을 교체해야 할 수도 있을 터.
괜히 싸움에 휘말리게 해 선수들을 벌써부터 흥분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봐. 방금 셀레브레이션은 부적절했어. 자네도 알지?”
그리고 결국 더 브라위너는 자신의 감정을 토해 내는 대가로 치즈 한 장을 받게 되었으니.
이 정도면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삐이익-!
더 브라위너에게 경고 한 장을 선언하는 주심의 휘슬 소리가 길게 울렸다.
Wooooaaaaahhh-!
하지만 경기장의 분위기는 고작해야 치즈 한 장 따위에 개의치 않았다.
전반 4분 만에 터진 크리스탈 팰리스의 선제골.
그것도 상대 팀인 첼시를 떠나 이제 막 구단에 합류한 더 브라위너의 중거리 골이었고.
이 새로운 이적생은 제 옛 감독과 동료들의 앞에서 포효하는 것으로 홈 팬들의 마음을 흡족케 했으니.
“케빈-! 케빈-! 케빈-!”
“오오오오오-! 케빈 더 브라위너-!”
급조된 응원가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비엘사 감독이 언젠가의 대화를 떠올렸다.
‘40M 유로요? 첼시 놈들이 미쳤답니까? 23세의 중앙 미드필더를 가지고 그만한 돈을 달라고 한다고요? 뭔 그런 도둑놈들이…….’
‘비싸게 느껴지시나요?’
‘당연한 소리를! 구단주님이 아무리 돈이 많으시다지만, 40M 유로입니다. 40M 유로! 거기에 10M 유로를 더하면 메수트 외질을 살 수 있어요!’
‘그래요? 그럼 저희가 한참이나 남는 장사겠군요.’
‘예?’
‘외질보다 3살이나 어리면서, 주급은 반값에, 외질보다 뛰어난 선수를 더 싼 가격에 영입할 수 있는 거니까요.’
‘……?’
‘좋네요. 바로 영입을 추진하도록 하죠. 40M이 아니라 80M을 줘도 더 브라위너를 데려오지 못하는 순간이 오기 전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레알 마드리드라는 최고의 클럽에서 활약했던 외질보다 더 브라위너가 더 뛰어나다 단언하던 선우진의 모습.
다시 생각해 봐도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한 건가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에는 선우진이 헛바람이 잔뜩 든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을 정도.
일을 시작한 지 오래 되지 않은 스카우터들이 겪고는 하는 일인데.
처음 두세 번 자신의 안목이 맞아 들어갔다고, 앞으로도 쭉 그럴 거라 생각하고 무리한 주장을 할 때가 있는 것이다.
물론 구단주인 선우진을 스카우터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선우진이 계속된 이적 성공 때문에 괜한 착각을 하기 시작한 게 아닌가 걱정된 것이었다.
더 브라위너야 비엘사 자신도 영입을 원했을 만큼 어느 정도 검증된 재능이기는 했다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메수트 외질이라는 이미 제 재능을 세계 무대에서 증명한 바 있는 월드 클래스급 선수와 비교하자면, 의문이 따르는 게 사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누구의 말이 맞았던가.
“오오오오오-! 케빈 더 브라위너-!”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응원가의 주인공.
케빈 더 브라위너.
지금껏 수많은 선수를 보아 온 비엘사 감독에게도 놀람을 안겨 줬을 정도로, 빛나는 재능의 소유자.
외질보다 뛰어난 것인지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빛이 외질의 것에 밀리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미치겠군.’
올해로 59세, 내년이 되면 동양의 기준으로는 환갑이 되는 노령의 비엘사 감독.
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처음 지휘봉을 잡았던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미 한참 전에 격하게 뛰는 일을 그만 뒀던 심장이 옛 기억을 되찾은 느낌.
비엘사 감독의 얼굴이 젊은 날의 그때처럼 흥분된 기색을 띠었다.
그가 오래전부터 꿈꿔 왔던 것이 하나 있었다.
언젠가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은 현실의 벽에 막혀 포기해 버리고 만 꿈.
바로 그가 추구하는 축구가 단 10분이라도 필드 위에서 지속되는 것.
비엘사 감독이 지닌 전술적 역량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걸 구현시킬 능력이 있던 선수가 몇 되지 않던 탓에, 진작에 포기했던 꿈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수십 년 경력의 스카우터보다 선수 보는 눈이 좋은 구단주가 있는.
이곳 팰리스에서라면.
‘…젊은 놈이 노인네 심장에 무리를 주는군.’
비엘사 감독이 제 안경을 매만지며 저 멀리 관중석을 바라봤다.
사춘기 소년이 첫사랑을 마주한 것처럼 쿵쾅거리는 심장.
그는 언젠가 포기했던 꿈을 크리스탈 팰리스에서라면 실현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기 시작했다.
* * *
“워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감탄.
그 정도로 엄청난 더 브라위너의 중거리 골이었다.
“하하! 제대로 찍었죠?”
“물론이죠.”
내가 있는 VIP 관중석에는 <웬 이글스 데어> 촬영을 위한 카메라가 몇 대 붙어 있었는데.
그걸 총괄하는 촬영 감독님과의 대화였다.
물론 방금 내가 말한 제대로 찍었냐는 건 더 브라위너의 환상적인 중거리 골 장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거야 경기장 카메라가 알아서 여러 각도에서 잘 찍었을 거고, 우리야 그걸 자료 화면으로 받아 쓰면 되는 일.
“…후.”
지금 내 옆에서 짧게 숨을 뱉어 내는 로만.
선제골이 터졌을 때 그가 보여 준 모습을 제대로 찍었냐는 의미였다.
나도 모르게 함성을 지르고, 곧바로 옆을 살폈었는데.
똥이라도 먹은 것처럼 제대로 썩은 얼굴을 하고 있던 로만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꽤 볼만했지.’
골이 터지기 전의 모습은 어땠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경기가 시작한지 3-4분 남짓이 지난 터라 아직은 제대로 경기에 집중하지 못 하고 있다가.
갑작스레 터진 환상적인 중거리 골에 화들짝 놀랐겠지.
차이점이 있다면 그게 더 브라위너의 발끝에서 쏘아진 거라는 것에 나는 환호성을 질렀고, 로만은 무어라 러시아 말을 뱉었다는 거였고.
‘Блять!’
‘블럇-’이라는 발음의 러시아어.
러시아어에는 문외한인 나였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한국어로 치자면 씨발일 거고, 영어로 치자면 FUCK이었겠지.
그 장면을 확실히 찍었다고 하니, 벌써부터 <웬 이글스 데어>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경기가 있기 전 한차례 인터뷰 비슷한 질답을 진행했는데.
‘Mr. 아브라모비치요? 예, 이웃이죠. 제가 영국에 머물 때 살 용도로 구매한 집이 있는데 근처에 Mr.아브라모비치도 살더라고요.’
‘산책을 하다 우연히 마주쳤었죠. 그때 하는 말이 40m 유로나 주고 더 브라위너를 사 간 거에 고맙다고 그러던데.’
‘뭔 개소린가 했죠.’
‘제 팀에 보물이 있는 것도 모르고 그걸 넘겨 놓고는, 고맙다고 하다니. 하하.’
이 인터뷰가 나오고, 오늘의 첼시전이 이어져 나오게 되겠지.
그리고 거기서 아까 로만의 모습이 뒤를 이은다면, 꽤나 재밌는 연출이 되지 않으려나.
여하튼.
“하하! 다행히 선제골은 저희가 가져갔네요.”
“…90분은 긴 시간입니다. 그중 5분이 흘렀을 뿐이고요.”
“당연한 말씀을. 아, 그런데 방금 골 장면은 어떠셨나요? 40M 유로 중 1M 유로 정도의 값어치는 한 중거리 골이 아닌가 싶은데.”
이렇게 말해 주니까 로만이 아주 좋아 죽더라.
* * *
삐이이익-!
전반전 종료를 알리는 휘슬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언제부터인가 로만의 반응이 꽤 잠잠해졌는데.
그도 카메라에 자신이 찍히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이미 앞서 뱉어 놓은 말이 있으니, 이제 와서 카메라를 물리라고 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테고.
최대한 아까와 같은 모습을 보여 주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 탓에 팰리스가 첼시 골문을 위협하는 장면이 있을 때마다 옆에서 움찔움찔하는 것만 보게 됐다.
여하튼.
[크리스탈 팰리스 FC 2 : 1 첼시 FC]
전반전 스코어는 2 대 1로 팰리스가 한 점 앞선 상황.
27분에 아자르가 팰리스의 측면을 제대로 휘저으며 올린 크로스를 에투가 집어넣으며 동점골을 먹혔지만.
8분 후인 35분경 벌어진 세트피스 상황에서, 더 브라위너의 발끝을 떠난 패스에 바디의 감각적인 헤딩으로 첼시의 골망을 뒤흔들며 다시 역전에 성공한 전반전이었다.
“…하프 타임이 끝나면 다시 뵙도록 하죠.”
덕분에 어딘가로 떠나는 로만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고.
촬영을 맡은 감독님이 그런 로만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으며, 내게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잘 찍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뜻.
‘어디로 가는 거려나.’
카메라나 내 앞에서는 제대로 화를 토해 낼 수는 없으니.
화장실이라도 가서 벽을 치기라도 하려는 거려나?
듣기로는 러시아 남자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화가 많은 사람 중 하나라는데.
로만 또한 러시아 남자였으니, 어쩌면 꽤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뭐, 이것도 아니면 원정 팀 라커 룸을 찾아가는 거일 수도 있고.
‘라커 룸을 찾는 구단주라.’
에이, 설마.
내가 생각한 거지만 너무 나갔다 싶었다.
라커 룸은 어디까지나 감독의 영역.
아무리 구단의 소유주라고는 해도 그런 곳을, 그것도 경기 도중에 침범하는 건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다.
내가 아까 그런 것처럼 시합 전이라거나, 다 끝나고 난 후라면 몰라도 말이다.
그런데.
이거 아무래도 내가 로만 아브라모비치라는 사내를 너무 내 기준에서만 생각했나 보다.
“후.”
뭔 짓은 하고 온 건지 꽤나 홀가분한 얼굴로 돌아온 로만.
그가 다시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후반전이 시작됐는데.
‘……?’
하프 타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전반전과 사뭇 다른 첼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Super, Super Frank. Super, Super Frank. Super, Super Frank. Super Frankie Lampard!”
저 멀리 원정석에서 첼시 팬들이 목 놓아 부르는 응원곡의 주인공.
[프랭크 램파드 - IN]
부상으로 다음 주에나 복귀가 가능하다고 알려진 램파드가 그 자리에 투입된 것.
첼시의 변화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안드레 쉬를레 - OUT]
[윌리안 - IN]
선제골 당시, 안일한 압박으로 더 브라위너에게 거리를 허용했던 쉬를레가 교체됐고.
그 자리를 반대쪽의 아자르와 함께 양 날개에서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윌리안이 대신했다.
분명 며칠 전 챔피언스리그 16강전에서 90분 풀타임을 소화한 탓에, 오늘 휴식을 취해야 했었을 텐데.
그런 윌리안을 투입시킨 것.
즉, 지금의 첼시는 완전한 베스트 11은 아닐지라도 그 언저리쯤은 된다는 거였다.
“아까 말했듯이 90분은 긴 시간이죠. 한 점의 점수쯤이야 역전시키기에는 넘치는 시간이기도 하고요.”
그때, 옆에서 들려온 로만의 말.
교체 투입된 램파드와 윌리안 때문인가.
꽤나 자신감 넘치는 어투의 로만이었다.
왠지 모르게 로만의 말을 듣자 아까 내가 했던 너무 갔다 싶었던 추측이, 알고 보니 진실에 가까웠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로만이 라커 룸을 자주 찾아 감독 및 선수들과 소통한다는 전 첼시 선수의 인터뷰를 본 것 같기도 한데.
뭐, 그러면 내 추측이 사실이라 치면.
‘열받아서 라커 룸을 찾아가 한바탕 하고 왔다 이거지?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꼭 승리를 따내라고 압박도 넣고 말이야.’
흠.
그런데 이걸 어쩌나.
원래 그렇게 오바 떨고도 지면 더 쪽팔린 법인데.
‘우리 구단 언론 담당자가 누구였지.’
경기가 끝나면 - 물론 우리의 승리로 끝난다면 - 언론 담당자에게 바로 팰리스와 긴밀한 관계의 기자들에게 소스 몇 개 제공하라고 해야겠다.
로만이 하프타임 동안 첼시의 라커 룸을 찾아 무조건 승리할 것을 주문했다고.
그렇게 되면 분명 그게 사실이냐고 무리뉴 감독이나 첼시 선수들에게 묻는 기자들이 있을 거다.
물론 확인된 정보는 당연 아니고 내 추측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뭐, 틀린 사실이면 알아서 정정하겠지.
내 추측이 맞는 거면 최 PD가 노난 거일 테고.
하프타임 동안 라커 룸을 찾아 불같이 화내는 구단주. 그런데 그렇게 했음에도 결국에는 패배.
분명 <웬 이글스 데어>의 화제성을 꽤나 올려 줄 일이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