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격전
“허…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촬영을 마다할 이유는 없겠죠.”
“다행이네요. 꽤 괜찮은 장면이 나올 것 같아서 못 써먹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하하.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MR. 선처럼 작가는 아닙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패배를 딛고 일어서는 성장 스토리를 다큐에 담는 건 너무 뻔한 것 같아서요.”
삐빅-
로만어 해석기 발동.
‘쫄기는 무슨. 우리가 질 일은 없을 텐데?’
곧바로 응수해 줬다.
“괜찮습니다. 제가 담으려는 내용은 그저 그런 성장 스토리가 아닌, 처음부터 자이언트 킬링에 성공하는 업셋 스토리라서요.”
피식-
이것 봐라?
순간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것 같았다.
“하하하-!”
로만의 입에서 튀어 나온 웃음소리.
슬쩍 시선을 돌려 날 바라보는 로만과 눈을 마주쳤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MR. 선은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뭐, 그럴 만하니까요. 아시다시피 제가 실패해 본 역사가 적어서.”
“하하. 그래요, 그래. 뭔지 압니다. 저 또한 이미 한번 걸었던 길이니까요.”
“이미?”
“예. 제가 젊었을 때도 그랬거든요. 세상 모든 게 다 제 마음대로 되는 것 같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고. 하하, 어린 날의 치기였죠.”
어쭈.
이것 봐라.
어린 날의 치기?
지금 나보고 어리다고 돌려 까는 거 맞지?
그런데 그것도 그렇고, 어디다 비비는 거야.
검은 돈이랑 정경 유착으로 돈 번 놈이랑 나랑 같냐?
“글쎄요. 제가 이룬 건 그래도 남의 힘으로 이룬 거는 아니라서요. 제가 정치 쪽이랑은 거리가 좀 멀어서.”
‘푸틴 뒤꽁무니 따라다니면서 이것저것 주워 먹던 누구랑은 달라요.’
그런 의미를 담아 말한 거기는 한데.
눈치를 보아하니, 대충 다 알아들은 것 같았다.
아까 말한 것처럼 자기가 무슨 앞선 길을 걸었던 선배라도 되는 것처럼, 씨익거리고 있던 입꼬리가 지금은 파들거리고 있었으니.
“하, 하하.”
그러고는 이내, 또다시 터져 나온 웃음소리.
이번에는 처음과 조금 달랐다.
아까는 정말 가소롭게 느끼는 것 같았다면, 이번에는 뭐라고 해야 하나.
숨길 수 없는 부들거림이 보였다.
로만의 말이 이어졌다.
“…세상 만사 혼자 힘으로 되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MR. 선께서도 사업을 여러 해 진행하시다 보면 알게 되실 겁니다.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도,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일들도 참으로 많다는걸요.”
그러면서 또 조언 아닌 조언을 해 주는데.
이 아재, 호탕한 척하기는.
귀 시뻘개진 거 다 보이는구만.
* * *
와아아아아-!
경기장이 무너질 듯 쏟아지는 함성.
이런 걸 들어 본 게 얼마 만이던가.
리그 경기에 선발로 나와, 입장과 동시에 고막을 뒤흔드는 홈팬들의 함성을 느끼는 게.
두둥- 둥- 둥-
울려 퍼지는 응원단의 북 소리가 새삼 더 브라위너를 자극했다.
수용 인원 25,000명의 셀허스트 파크의 관중석에는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첼시의 스탬포드 브리지와 비교하자면 절반 조금 넘는 정도겠지만.
더 브라위너는 오히려 이곳의 관중이 첼시에서보다 몇 배는 더 꽉 차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후우-”
그는 가볍게 숨을 돌리며, 관중석 한쪽을 살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었다.
축구장 한 곳을 비추는 카메라가 그가 원하는 곳을 정확히 비추고 있었으니.
“Yeeahhhh-!”
“태양이시여-!”
그 순간, 우레와 같이 터져 나오는 환호.
더 브라위너가 이곳 팰리스로 이적한 후 알게 된 게 하나 있다면.
그건 영국 전역에서 찌라시 취급받는 타블로이드지를 부르는 명칭이, 이곳 팰리스에서만큼은 다른 의미로 쓰인다는 점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처음 크리스탈 팰리스한테서 이적 제의를 받고, 결국 그걸 수락하기까지 고작 몇 주.
그 짧은 시간만으로 더 브라위너 자신을 매료시킨 사내다.
이미 벌써 반 시즌을 넘게 같이해 온 서포터즈들을 어떠하겠는가.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
더 브라위너가 그런 생각을 하며 화면을 바라봤다.
기분 좋은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선우진과 그에 대비되는 똥 씹은 표정의 로만.
뭔 일인지는 몰라도 더 브라위너의 입장에서는 기분 좋은 출발이었다.
비록 로만이 아닌 무리뉴가 원인일지라도, 이제 더 이상 더 브라위너에게 있어 ‘첼시’라는 단어는 그리 기분 좋은 단어가 아니었으니.
“후우-”
다시 한번 숨을 길게 내뱉은 더 브라위너가 제 몸을 점검했다.
손끝에서 발끝까지.
아까 전 몸을 풀 때도 느꼈지만, 오늘의 컨디션은 최상.
오늘따라 유독 강하게 뛰는 심장의 펌핑 상태가 정신을 새롭게 일깨웠다.
벌써부터 몸의 근육을 자극하는 것 같은 기분.
물론, 긴장으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반대였지.
삐이익-!
심판의 휘슬 소리가 허공을 수놓았고.
그에 맞춰 홈팬들의 함성 소리가 뒤따랐다.
바디의 선축으로 출발한 공이 마레즈를 거쳐 더 브라위너에게 도착했다.
툭-
더 브라위너가 빠르게 전방을 살폈다.
그에게 공이 도달하기 전부터 뛰기 시작한 제이미 바디.
좋은 움직임이다.
그의 라인 브레이킹 능력은 앞서 있었던 여러 번의 훈련 세션에서 익히 체험한 바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바디의 근처를 노련하게 틀어쥐고 있는 존 테리.
그의 지시를 받아 마샬을 붙들고 있는 케이힐이 보였다.
정말로 완벽한 패스를 주지 않는 이상, 존 테리를 피해 공을 바디에게 도달시키기는 힘드리라.
비록 운동 능력에서는 확연한 차이가 나는 둘이었지만, 존 테리는 단순히 느린 속도로 폄하될 만한 수비수가 아니었다.
툭-
더 브라위너의 선택은 결국 측면의 마레즈에게 다시 공을 내주는 것.
저 멀리 아쉬워하는 바디의 얼굴이 보였지만 괜찮았다.
더 브라위너는 첼시를 잘 알고 있었다.
부정하고는 싶지만, 저들은 좋은 팀이다.
넘치는 잠재력의 그를 굳이 기용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좋은 팀.
자칫 빈틈처럼 보이는 순간도 빈틈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컸다.
미련이 생겨도 깔끔하게 접는 게 좋았다.
90분은 긴 시간이었다.
* * *
전반 3분.
[공중으로 뜬 볼을 반 다이크가 가볍게 처리합니다.]
[반 다이크에서 딘 막시에게로. 현재 서로 슈팅을 한 번씩 기록하고 있는 양 팀.]
딘 막시는 기존 크리스탈 팰리스에서 뛰어왔던 왼쪽 풀백이었다.
챔피언쉽에서는 그럭저럭 쓸 만한 자원이었지만, EPL에서는 그렇지 못한.
그렇기에 시즌 종료 이후 자유계약으로 방출이 예정되어 있기도 했다.
딘 막시 또한 스스로도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챔피언십에서 뛰던 시절에는 오버래핑도 종종 하던 그였지만, 이제는 그 또한 자신이 오버래핑 하는 것보다 측면의 동료에게 공을 내주는 게 훨씬 매섭다는 걸 알고 있었다.
툭!
그렇게 이어진 패스.
딘 막시의 기대를 잘 알고 있다는 듯, 공을 받은 마레즈가 곧바로 전진했다.
[마레즈, 후방까지 내려와 공을 받아 전진합니다. 바로 압박에 들어가는 에투.]
[그 뒤를 아자르가 따라붙습니다. 무리뉴 감독의 특징이죠. 수적 우위와 철저한 압박 수비.]
한때 세계 최고를 노렸던 스트라이커 에투는 전성기에서 내려온 지 오래였다.
서른 셋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은 운동 능력.
그를 흑표범으로 불리게 했던 폭발적인 가속 능력 또한 이미 사라진 상태.
심지어 그는 전문적인 수비수 또한 아니었으니.
[가볍게 에투를 제치는 마레즈-! 양발 드리블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선수죠!]
뛰어난 테크닉은 물론, 준수한 속력을 지닌 마레즈가 그를 제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이어진 장면.
[에투에 이어, 아자르까지! 와우-! 환상적인 드리블! 역시 리야드 마레즈입니다!]
양발 드리블을 활용해 아자르까지 제쳐 내는 모습은, 관중들은 물론 해설진들까지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으니.
특히 당황한 건 제쳐진 아자르였다.
한 수 아래로 여겨지는 팀, 크리스탈 팰리스.
요즘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걸 경기 준비 시간에 듣기는 했지만, 오로지 그뿐이었다.
팰리스를 조심해야 한다 떠들던 코치의 말 따위가 귀에 들어왔을 리가.
EPL에 온 이후로 제 재능이 세계 레벨에서도 통한다는 걸 확인한 아자르는 팰리스의 그저 그런 선수들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심지어 첼시 내에서는 기회도 받지 못했던 더 브라위너를 40M을 주고 사가는 팀이었으니.
해 봐야 피지컬을 앞세워 잉글랜드 특유의 킥 앤 러쉬를 꽤 잘 활용하는 팀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오히려 테크니컬 한 선수들만 가득한 팀이 아닌가.
“빌어먹을!”
자존심이 구겨진 얼굴로 아자르가 마레즈를 뒤쫓았다.
속도는 그가 살짝 더 위.
하지만 따라잡기 바로 전, 마레즈가 중앙으로 공을 보냈다.
촤아아악-
중앙에서 원 터치로 반대쪽으로 이어지는 공.
더 브라위너의 패스였다.
압박을 시도하던 하미레스가 급하게 몸을 돌렸다.
타악!
[안토니 마샬-! 공을 길게 치고 그대로 달려갑니다! 빠릅니다, 빨라요!]
[뒤쫓는 하미레스. 그리고 마샬의 한쪽 경로를 틀어막는 이바노비치!]
[마샬이 좌측면에서 중앙으로 강하게 꺾습니다!]
그리고 전반 4분.
“안토니-!”
더 브라위너가 알게 된 지 고작 한 달 지난 프랑스 출신 동료의 이름을 불렀다.
팰리스에 온 이후 매번 느끼게 되는 거지만.
첼시가 좋은 팀이듯, 크리스탈 팰리스 또한 좋은 팀이었다.
열정 넘치는 서포터들, 재능 넘치는 선수단 그리고 그런 선수단의 능력을 마음껏 살릴 수 있는 전술적 능력을 갖춘 감독, 거기에 그 어떤 팀에도 밀리지 않는 지원을 해 주는 구단주까지.
하지만 역시 가장 놀라운 건 바로 선수들이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놈들만 모아 온 건지.
촤아아악-
“케빈!”
더 브라위너가 원한 바로 그 위치에.
이바노비치의 압박을 드리블로 가볍게 풀어내며 공을 보내는 마샬이었다.
타앗-!
그를 붙드는 쉬를레.
더 브라위너가 빠르게 움직임을 가져가며 쉬를레를 떨쳐 냈다.
마샬이 보낸 패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하나 하고 반걸음 앞.
‘……!’
그리고 그 순간.
더 브라위너는 첼시의 골키퍼, 체흐의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려 있는 걸 감지했다.
찰나라도 불러도 좋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생긴 틈.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재능의 영역이었다.
몇몇 이들에게는 노력과 상관없이 결코 다다르지 못할 영역.
오로지 선택받은 몇 명만이 볼 수 있는 그런 길이었다.
그리고 참으로 다행히도, 더 브라위너는 그런 몇 명 중 하나였다.
뻐어어엉-!
측면에서 중앙으로 넘어온 공이 더 브라위너의 발과 맞닿았다.
생각보다 이른 시점에.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왔다.
Woooaaaahhhh-!
슈팅이 쏘아지기도 전부터 아수라장이 된 셀허스트 파크.
경기장 내 모두의 시선이 공을 좇았다.
심지어, 체흐마저도.
[Goooooooooaaaaaal! 케빈 더 브라위너의 기습적인 슈팅! 강하게 때린 오른발 슈팅이 그대로 골망을 뒤흔듭니다! 친정 팀을 상대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는 더 브라위너!]
[첼시의 키퍼 페트르 체흐가 낭패라는 얼굴로 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역동작에 걸려 버렸죠. 미처 손을 뻗기도 전에 골대 안에 꽂힌 슈팅입니다! 저런 건 못 막죠!]
“이예에에에-!”
“케빈! 케빈! 케빈!”
“우와아아!”
쏟아지는 관중들의 함성.
그걸 뒤로 한 채, 더 브라위너가 향한 곳이 있었다.
붉어진 그의 얼굴이 그가 잔뜩 흥분해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돌처럼 굳은 얼굴로 필드를 바라보고 있는 첼시의 벤치.
“컴 오온-!”
무언가를 토해 내듯, 더 브라위너가 내뱉은 외침이 무리뉴 감독의 고막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