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황금알을 낳는 거위
“다음 주가 기대되네요. 초대장을 보낼 테니 꼭 오시죠.”
“하하. 그러죠.”
“그러면 다음에 또 뵙죠.”
선우진이 사라지자 로만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의 시선이 선우진의 뒷모습을 좇았다.
‘당돌하군.’
젊음의 패기라는 걸까?
아니면 그저 근거 없는 자신감인 걸까.
다음 주에 있을 첼시와 크리스탈 팰리스의 경기.
아무리 크리스탈 팰리스의 홈에서 열리는 경기라지만, 마치 승리를 자신이라도 하는 것처럼 자신을 초대하다니.
“당돌하네요.”
그를 수행하고 있던 비서 또한 비슷한 생각이었던 듯했다.
“자네가 보기에도 그랬나?”
“예. 게다가 4,000만 유로라는 이적료를 보고 ‘고작’이라니. 더 브라위너의 잠재력을 그렇게 고평가하는 걸까요?”
“글쎄. 지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한 말일 수도 있고.”
선수 한 명에 몇천만 유로가 넘는 돈을 쓰는 경우가 흔한 세계라지만.
그래도 여전히 4,000만 유로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당장 올 여름 이적 시장에서 역대 이적료 레코드를 경신한 베일의 가격이 8,600만 파운드.
더 브라위너의 이적료에 2.5배를 곱하면 베일을 살 수 있었던 거다.
하나 그런데도.
‘제가 케빈을 고작 4,000만 유로에 산 덕분에 이득을 봤다고요? 뭐, 시즌이 끝날 때 되면 알겠죠. 이번 거래에서 진짜 호구가 누구였는지.’
마치 미래라도 보고 온 것처럼 그런 말을 뱉는 모습이라니.
피식-
미래를 보고 왔다라.
웃긴 생각이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딨겠나.
“뭐, 젊을 때는 원래 저렇게 혈기 넘치는 게 정상 아니겠나. 언론에서 하도 띄워 주니 어깨가 올라간 것도 있을 거고.”
비난할 거리는 아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도 아니었고.
한때의 로만 또한 그런 혈기 넘치는 젊은이였으니.
게다가 소설이라는 제 분야에서는 물론 손대는 사업마다 족족 성공시키는 선우진 아닌가.
한창 세상이 자기 위주로 돌아간다 착각할 시기였다.
자신은 그저, 그런 시기를 이미 겪은 어른으로서 저 높아진 콧대를 낮춰 주면 될 뿐.
“자네가 보기에는 팰리스와의 승산이 어떨 거 같나?”
“팰리스가 요즘 성공 가도를 달리고는 있다지만… 글쎄요. 무난하게 저희 팀이 이기지 않겠습니까? 지난 전반기 경기에서 2-1로 이기기도 했고요.”
원정 경기라는 변수.
FA컵과 챔피언스리그 일정 등이 겹쳐 저하된 선수단의 체력.
부상으로 몇이 빠진 스쿼드.
몇 가지 변수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글쎄.
‘정말로 선우진이 말한 것처럼 더 브라위너가 4,000만 유로 이상의 퀄리티를 갖춘 선수라면 모를까.’
그런 게 아니라면.
첼시가 크리스탈 팰리스에게 질 거라는 생각이 추호도 들지 않는 로만이었다.
* * *
으음.
그러니까… 이제야 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째서 그렇게나 많은 슈퍼 리치가 스포츠 구단을 사들이고, 거기에 엄청난 돈을 투자하는지.
‘이게 막상 앞에서 도발 당하니까… 못 참겠단 말이지.’
마케팅을 위해? 아니면 긍정적 이미지를 만드려고?
모두 아니다.
조금 더 원초적인, 본능에 가까운 무언가 때문인 거다.
바로 경쟁 심리.
남자란 게 무슨 성별인가.
바로 승부욕의 화신이다.
공중 화장실에서 아닌 척 옆 사람 걸 확인하고.
친구들과의 여친 동반 자리에서 내 여친이 제일 예쁠 때 자신도 모르게 미소을 짓고.
인터넷에서 연봉과 학벌로 싸우는 사람들이 대부분 남자인 이유.
그게 다 모두 경쟁 심리 때문이다.
‘언제나 자기가 더 낫다는 걸 확인받고 싶어 하지.’
다른 건 참아도 게임 지는 건 못 참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로만 같은 슈퍼 리치들에게 있어 축구란… 일종의 놀이터인 거다.
보통은 무과금 게임에서 서로의 실력을 겨루지만.
조금 돈 많은 린저씨들은 얼마나 과금을 했냐로 서로의 실력을 겨루고.
진짜 돈 많은 슈퍼 리치들은 수백억 원대 선수들을 가지고 서로의 실력을 겨루는 것.
뭐, 아무튼.
말은 많았지만 대충 그런 거다.
‘로만몬의 도발하기!’
‘효과는 굉장했다!’
‘선우는 적의 도발에 제대로 넘어가 버렸다!’
물론 단순히 열 좀 받았다고 무작정 로만을 경기장에 초대한 건 아니었다.
우선 <웬 이글스 데어>에 써먹을 만한 장면이라 생각해서도 있었고.
그럭저럭 승산도 있다고 봤다.
일단 램파드를 포함한 미들진 몇이 부상으로 아웃되어 있는 첼시였고.
바로 사흘 뒤, 챔피언스리그 16강을 치뤄야 하는 상황이었다.
1차전에서 1 대 1의 무승부를 거뒀던 만큼, 이번 경기에서는 무조건 승리해야 했으니.
당연히 주전 멤버를 풀가동할 것.
심지어 우리 크팰과의 경기 다다음 날에는, 맨시티와의 FA컵 경기도 예정되어 있기까지 했다.
분명 우리 팀과 뛸 때 베스트 11을 가동하기에는 무리가 꽤 따를 거다.
아마 주전과 준주전 멤버를 적절히 섞어서 낼 터.
그 정도의 전력이라면 지금의 크리스탈 팰리스로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게다가 팀에 새로운 창의성을 불어넣을 수 있는 더 브라위너의 합류.
로만은 분명 다음 주 경기에서 4,000만 달러가 고작이라는 내 말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음? 앞이 혼잡합니다, 보스.”
“그러게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
산책을 나온 김에 켄싱턴을 벗어나 조금 더 멀리까지 가고 있었는데.
앞에서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조금 더 가까이 가 보니 보이는 건 동양인들로 이루어진 촬영 팀.
순간 최 PD의 촬영 팀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어라?’
곧바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들 몇 명.
내가 그들을 알아봤듯, 그들 또한 나를 알아봤다.
“어어?!”
“저, 저기! 선우진 작가 아니야?”
멀리 타지에서 들리는 한국어.
분명 몇 시간 전까지 촬영 팀들과는 한국어로 대화를 잘만 했건만.
괜스레 반가움이 느껴졌다.
더욱 가까이 가자 카메라가 나를 향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들. 처음 뵙겠습니다.”
다가가 머리를 숙이며 공손히 인사했다.
다들 한가락 하는 원로급 배우분들.
저분들의 짐꾼 역할을 해 주시는 배우분도 내 나이보다 2배는 많을 정도였다.
“촬영 중이셨구나. 저도 이 프로 잘 보고 있습니다.”
“어… 어어. 허허. 나도 선우진 작가 작품 잘 봤어요. 소설은… 눈이 침침해서 못 봤기는 한데, 연기천재는 참 재밌게 봤습니다.”
“하하. 아무래도 제 글에는 죽고 죽이는 내용이 많으니까요.”
‘이분들을 여기서 다 만나네.’
어떻게 보면 스웜과 SW 프로덕션의 경쟁사인 CM E&M의 간판 예능 프로.
그 촬영 팀을 런던에서 마주치게 될 줄이야.
분명 내가 아는 기억 속에 영국 편은 없었던 거로 아는데.
이것도 내가 일으킨 일종의 나비효과이려나?
그나저나-
“연출을 맡고 있는 나원석입니다. 반갑습니다, 선우진 작가님.”
나 PD하고도 인사를 나눴다.
기쁜 티가 잔뜩 나는 목소리.
촬영 중에 나를 마주쳤으니, 하나 제대로 건졌다는 느낌인 걸지도.
“네. 반갑습니다.”
“하하. 사실 기섭이한테 런던에 촬영 온다는 얘기는 들었었는데… 설마 마주치는 거 아닌가 했는데 이렇게 뵙게 되네요.”
‘최 PD님이 KBC 출신이셨지.’
나 PD보다는 나이가 조금 더 어리니, 아마 최 PD가 후배였을 터.
“하하. 그런데, 혹시 지금 작가님 찍고 있는 거 실제로 써도 되겠습니까? 물론 출연료도 지급드릴 거고요.”
“나 PD, 선 작가 몸값 알지? 우리보다 많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럼, 그럼. 어디 선 작가가 보통 사람인가? 전 세계에 대한민국을 널리 알리고 있는 사람 아니야? 신경 제대로 써 줘야지.”
은근슬쩍 출연 의사를 물어오는 나 PD.
그리고 아닌 척 그런 나 PD를 도와주는 원로 배우분들.
뭐, 출연이야 나쁠 건 없었다.
사실 CM E&M이 말이 경쟁사지.
막상 스웜과 SW 프로덕션과 견주기에는 체급 차이가 좀 컸다.
‘CM에서 밥값 제대로 하고 있는 건 몇 명 정도뿐이니까.’
예능 프로에서는 나 PD.
드라마 쪽에서는 응답하라 시리즈의 이명안 사단.
TVM에서 시청률이 나오는 건 저들이 전부였다.
반면, 스웜의 오리지널 드라마들은 지상파 3사의 드라마를 전부 합쳐도 화제성 면에서 1위를 쭉 달리고 있었으니.
내가 알고 있던 CM E&M의 체급이라면 몰라도, 지금 수준으로는 경쟁할 거리도 되지 못했다.
게다가 그 차이는 앞으로 더욱 커질 거다.
원래라면 슬슬 여러 드라마를 계속 성공시키며, 지상파를 뛰어넘는 드라마를 만드는 케이블 채널로 자리잡게 될 TVM이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자리는 이미 스웜과 SW 프로덕션이 전부 차지한 터라.
지금의 갭은 커지면 커졌지, 줄지는 않을 거였다.
여하튼.
“예. 편하게 쓰셔도 됩니다. 다만 저도 다큐 촬영이 있어서 길게는 힘들 것 같습니다.”
“아, 그럼요, 그럼요. 제가 작가님 가지고 분량 길게 찍었다가는 기섭이가 저 죽이려고 할 겁니다. 하하. KBC 시절 꽤 친했던 후배거든요. 이제 회사가 다르다고 막 나가더라고요.”
“하하. 최 PD님이요?”
“네. 그러면서 회사 자랑을 어찌나 하던지. 저보고 OTT만의 제작 환경이 그렇게 좋다고 그러더라고요.”
작게 속삭이듯 그런 말을 건네는 나 PD.
지금 나 PD가 한 말에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처럼 들리면 내 착각일까?
꼭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우리집 목장에 들어오고 싶다는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언젠가 그런 인터뷰를 본 적이 있었다.
‘스웜이 구축한 OTT 시장은 참으로 놀랍다. 그런 제작 환경이 바로 한국의 제작사들이 나아가야 할 미래.’
대충 그런 내용으로 나 PD가 한 인터뷰였다.
실제로 여러 스타 예능 PD 중 웹 예능에 가장 먼저 뛰어는 게 나 PD였다.
아마 그런 생각은 지금 시기부터 가지고 있었을 터.
거기에 스웜이라는 성공적인 OTT 플랫폼이 등장했으니, TV 채널이 가지는 가치가 점점 더 줄어들 거라는 걸 나 PD도 쉽게 예측할 수 있을 거다.
으음, 분명 나 PD와 CM의 계약 기간이 2015년까지였던가?
예전에 이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때까지 2년 넘게 언제 기다리지, 이런 생각이 들었었는데.
지금 보니 한창 내가 부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시기였다.
기다림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는 않으리라.
‘이명안 사단 전체가 다 나 PD하고 연이 깊다 했지.’
그들을 먼저 영입하고 거기에 나 PD가 따라서 올지.
아니면 순서가 반대로 될지.
그건 최 대표한테 맡기면 알아서 잘하겠지.
‘내가 군대 가 있는 동안… 나 PD와 이명안 사단까지 전부 영입하게 된다면…….’
그러면 국내 시장은 사실상 전부 클리어다.
TVM의 몇밖에 없는 스웜 대항마가 바로 저들이니까.
그렇게 되면, 한국 미디어 산업을 지배하는 건 원래의 CM 제국이 아니라 SW 제국이 될 거다.
양질의 작품들이 SW 프로덕션을 거쳐 제작되고, TV 방영과 함께 스웜을 통해 유통되고,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것.
그리 먼 미래는 아닐 것 같았다.
“작가님, 이쪽 보고 본인 소개 좀 부탁드려요.”
“아, 네.”
아무튼.
“안녕하세요. 스웜의 오너인 선우진입니다. TVM 작품들이 여럿 스웜에서 유통되고 있는 만큼, TVM 시청자님들의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헉.”
순간 당황한 표정의 나 PD.
나는 씨익 웃어 주는 거로 반응을 대신했다.
출연료를 준다고는 했지만 사실 돈이 그리 부족하지는 않은 터라.
많이 준다고 해 봐야 내 기준으로는 벼룩의 간을 빼먹는 수준일 텐데.
이 기회에 스웜 홍보나 해야겠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다고.
이걸 편집하지는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