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시사회에 초대받다
[우선 전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페이퍼 컴퍼니를 거쳐 1차로 세탁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
[하지만 그렇게만 해서는 금융기관들의 추적이 쉬울 겁니다. 그래서…….]
제이슨과의 대화가 끝나고 다음 날.
대체 언제 출발한 건지 지금 있는 곳이 홍콩이라 밝힌 제이슨과의 통화.
그걸 정리해 보자면 이랬다.
투자 자금은 해외 투자 법인에서 시작해서 전 세계로, 그다음에는 스위스 은행을 거쳤다가 다시 또 수십 개의 회사로 나뉘어 흩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최종 목적지가 될 홍콩은 물론 뉴욕과 런던, 한국, 싱가포르 등의 금융 중심지와 파나마와 바하마를 비롯한 조세 피난처들까지 넘나드는 과정을 몇 번이나 거칠 예정이라는데.
그렇게 되면 그 어떤 대단한 금융기관도 돈의 원래 주인이 나라는 걸 알아낼 수 없을 거라 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나는 거기에 한 가지의 과정을 더 추가했는데.
[으음. 비트코인이 그 요즘 핫한 가상 화폐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맞아요.”
바로 킹갓엠페러 황트코인.
작년 마운트콕스 해킹 사건으로 크게 한번 주춤했던 비트코인은, 최근 들어 다시 그때의 충격을 서서히 회복해 나가고 있었으니.
10억 달러의 자금 정도는 아주 가볍게 소화할 수 있었다.
10년 후라면은 몰라도 아직은 디지털 자산 거래 추적에 대한 법도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
장담하는데 돈세탁하는 것에는 비트코인이 최고였다.
아무튼.
[예. 그러면 진행 상황은 실시간으로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수고해 주세요.”
제이슨과의 통화가 끝나고.
‘왠지 거물이 된 기분이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돈세탁이라니.
꼭 이야기 속 흑막이 된 것 같지 않나.
물론 원래도 내가 어느 정도 출판업계나 할리우드 등에서 거물이었던 건 맞긴 하지만…….
그래도 돈세탁이라는 단어가 주는 비밀스러운 무언가가 있었다.
아무튼.
탁, 타다닥-
통화 이후 바로 노트북을 폈다.
오랜만에 집필에 집중하려는 것.
요즘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글을 쓸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입대 전 끝내야 하는 과제는 사업뿐만이 아니었다.
‘<찬탈자>를 마무리 짓고 들어가야지.’
시리즈를 전부 완결 짓지는 못할 거다.
쓰다 보니 이야기가 점점 늘어나 최소 3부작짜리 장편소설이 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10권 내외로 끝이 날 1부는 입대 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터.
‘입대 전 1부를 끝내고… 바로 실사화에 들어가야 해. 티모시를 주인공으로 낙점한 이상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지금 모습을 찍어야 하니까.’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티모시였다.
지금은 아직 앳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만, 시간이 더 흐르면 소년보다는 남성에 가까워질 터.
내 전역 후까지 미룰 수가 없었다.
* * *
2월이 되면서 <찬탈자>의 1, 2권이 출판됐다.
[<마지막 마법사>의 새로운 이야기!]
[빅터 3세, 그가 정복 군주가 될 수 있었던, 돼야만 했던 뒷 이야기.]
[<마지막 마법사>의 팬이라면 무조건 봐야 하는 소설.]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 이후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인 <마지막 마법사>.
심지어 판매량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어, 그 두 소설의 아성을 넘을 기세를 보여 주고 있었으니.
그런 소설의 외전격 이야기가 등장했으니 많은 관심이 집중된 것도 당연했다.
윅슨 출판사에서도 이번 신작의 판매량이 심상찮을 것을 짐작했기에, 엄청난 홍보비를 투자한 것은 덤이었다.
물론 선우진이라는 작가는 이제 별도의 홍보가 없어도 방송이나 언론들에서 알아서 관련 방송과 기사를 쓰는 단계이기도 했다.
소설과 관련된 얘기를 주로 다루는 미국의 한 TV쇼.
다른 자극적인 프로들과 비교해 시청률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소설 매니아들을 위주로 꾸준한 고정층을 자랑하는 프로였다.
그 프로의 메인 MC를 맡은 조나단이 촬영 시작과 함께 <찬탈자>의 얘기로 포문을 열었다.
“케빈, 어제 시내 서점 가 봤어요?”
“서점이요? 아! <찬탈자> 얘기를 하려는 거죠? 당연히 가 봤죠. 비록 줄이 너무 길어서 저녁 식사를 위해 포기했지만요.”
“후후. 저는 인터넷으로 예약 주문을 미리 넣어 놨던 덕분에 어제 받아 봤죠. 물론 바로 다 읽느라 밤을 새워 버렸고요.”
“와우, 감상은요?”
“뭐… 아직 2권까지 읽은 게 전부지만… 감히 말한다면 이번 시리즈는 선우의 두 번째 히트작이 될 게 확실해요. 그냥 <마지막 마법사>의 외전으로 끝날 글이 아니라 느꼈거든요.”
TV 프로뿐만이 아니었다.
라디오 프로그램들은 물론 소설과 관련된 각종 팟캐스트들까지.
출판과 관련된 얘기를 하는 매체들 모두가 <찬탈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지막 마법사>가 처음 흥행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때만 해도 출판업계에서는 일종의 경쟁 관계가 존재했다.
<마지막 마법사>가 잘 팔리는 것만큼, 자신들의 소설이 덜 팔릴 거라 생각한 출판사들이 대부분이었던 것.
그런 만큼 경쟁 출판사들은 자신과 관계가 있는 홍보 프로그램들에게 <마지막 마법사>와 관련된 얘기를 하지 않을 것을 주문했었다.
하지만 <마지막 마법사>의 대히트 이후 상황은 바뀌고 말았으니.
업계의 대표 작품이 엄청난 흥행을 하게 되면, 다른 소설들의 매출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오르게 된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었다.
‘If you can't beat them, join them(이길 수 없다면, 합류하라).’
몇 년 전, 한때 원더보이로 불렸던 리버풀 유스 출신의 마이클 오언이 라이벌 관계인 맨유로 이적해 EPL 우승을 달성한 후 했던 말.
그 속담처럼 영미권 출판사들도 선우진을 이기지 못한다면, 차라리 그의 작품으로 인해 생기는 판타지 소설 붐에 합류하기로 노선을 바꾼 것이다.
“서점들에 연락해서 우리 작품을 최대한 <찬탈자>와 비슷한 곳에 놓아 달라고 해.”
“이번에 방영하는 프로에서 판타지 장르 베스트셀러에 대해 다룰 예정인데, 거기 우리 신작을 추가시켜 달라 하자고.”
“흐음. 우리 저번 신작이 <찬탈자>와 비슷한 점이 꽤 있지 않아? 두 작품을 엮어서 비교하는 기사를 내보는 건 어때?”
* * *
[이번에 출판한 소설 읽어 봤어. <찬탈자>라… 저번에 얘기했을 때는 빅터 3세의 과거 이야기만 짧게 다루고 끝낸다더니. 생각보다 본격적인 글이었잖아?]
“쓰다 보니 그렇게 됐어. 너도 알다시피 이야기란 게 창작자의 마음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잖아?”
중국에서의 일정을 끝내고, 한국에 들어와 쉬고 있었는데.
피터의 전화가 왔다.
“아무튼. 그래서 감상은?”
[후우. 아직 2권까지 읽은 게 전부지만… 읽다 보니 짜증이 나더군.]
“……?”
[자네가 쓰는 글은 하나같이 다 내가 직접 찍고 싶단 말이지. 하지만 글 쓰는 속도가 이렇게 빨라서야 그중의 반은 포기해야 할 거 아닌가? <찬탈자> 같은 경우도 내가 메가폰을 잡지 못할 거고.]
“뭐, 네가 <마지막 마법사>의 1부 촬영을 1년 안에 끝마친다면 네게 맡길 수도 있어.”
[으으. 끔찍한 소리 하지 말게. 그리고 설령 그렇게 끝내더라도 바로 2부 촬영에 들어가야지. <찬탈자>도 좋기는 하지만 난 그래도 <마지막 마법사>가 최고라고.]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찬탈자>를 직접 찍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건지.
통화 내내 1권의 어떤 장면에서는 이런 촬영 기법을 쓰고, 이 부분에서는 주인공의 갈등을 소설보다 더욱 강조하고 싶으며, 소설에서는 없었지만 이런 장면을 추가하면 어떻겠냐는 등의 얘기를 떠드는 피터였다.
그러면서 자신을 대신할 영화감독까지 추천해 줬는데.
“기예르모? 내가 아는 그 기예르모 감독 말하는 거야?”
[네가 아는 기예르모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판의 미로를 찍은 감독을 말하는 거라면 맞아. 원래 호빗 시리즈를 그 친구가 하기로 했던 거 알지? 제작사가 괜히 그 친구를 택했던 게 아니야. 호러 영화 말고 판타지 찍는 데에도 꽤 재주가 있는 친구거든.]
기예르모 델 토로.
판의 미로는 물론 헬보이와 퍼시픽 림 등으로 유명한 영화 감독이었다.
[그 친구가 나하고도 조금 아는 사이인데, 내가 <마지막 마법사>를 맡게 됐다는 걸 알고 저번에 불평한 적이 있었거든. 호빗에 이어서 이것도 채 가냐면서 말이야. 뭐, 호빗은 내가 채 간 게 아니라 제작사 재정 문제가 얽히면서 그렇게 된 거지만.]
‘기예르모라…….’
작년 하반기 개봉해서 4억 달러의 수입을 거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퍼시픽 림.
제작비에만 2억 달러, 마케팅 비용에도 상당한 금액이 들어간 터라 손익분기점을 간신히 넘겼다고 들었다.
그의 전작인 헬보이 시리즈는 마케팅 비용 포함하면 손익분기점을 못 넘겼다고 했고.
하지만 흥행 성적이 그리 좋지 않다고 그를 낮춰 볼 수는 없는 게, 흥행은 실패한 적은 있어도 졸작은 만든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게 기예르모 델 토로였다.
그런 만큼 그의 작품이라면 일단 관람하고 보는 팬층도 상당했고.
‘음… 꽤 괜찮을 거 같은데?’
게다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괴생물을 활용한 시각적 연출과 괴물 디자인 등이 할리우드에서 제일 탁월하다는 평을 듣는 감독.
호빗 시리즈에 나오는 오크나 와르그 등의 디자인에도 그가 관여했을 정도였다.
<찬탈자>에는 빅터 3세가 왕좌를 얻기 이전, 차디찬 북방에서 온갖 몬스터들과 혈투를 벌이는 장면들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독특한 영상 감각으로 정평이 나 있는 그라면 <찬탈자>를 제대로 연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트렌트하고도 한번 얘기를 나눠 봐야겠어.’
좋은 작품 만큼이나 귀한 게 좋은 영화감독이었다.
더욱이 <찬탈자>는 영화로도 최소 3편 이상이 나올 거였으니.
영화감독을 선정하는 데에 있어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강주원 - 이따 보자, 우진아.]
[한시연 - 작가님~ 시사회에서 봬요!]
[양진철 PD - 전 이미 도착해 있습니다. ㅎㅎ;;]
어느새 다가온 마션의 시사회 날.
국내에서는 SW 프로덕션을 통해 배급 및 유통이 되는 만큼, 이제 범SW 기획사 소속이 된 연기천재 팀도 여럿 모이게 생겼다.
[봉 감독의 신작, ‘마션’ 개봉 코앞으로 다가와!]
[마션의 첫 공개 시사회. 선우진도 참석 예정!]
[두 천재가 만나 제작한 작품. 할리우드에서도 한류 바람 불게 되나?]
사실 첫 시사회는 이미 한번 미국 LA에서 있었지만, 그건 일정이 맞지 않아 참석하지 않았다.
이번에 열리는 건 첫 국내 시사회.
제작사의 오너인 나와 연출을 맡은 봉 감독 둘 모두 한국인이었기에, 국내에서 엄청난 기대를 얻고 있는 마션이었다.
원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던데.
‘그런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실망은커녕 기대 이상을 충족시켜 줄 영화였으니까 말이다.
촬영이 모두 마무리되고, 후 편집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봉 감독에게서 편집 도중의 영상을 받아 본 적이 있었다.
내가 보았던 리들리 스콧 감독의 마션과는 확연히 다른 작품.
같은 소설을 가지고 영화화한 것임에도, 이렇게 두 영화가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게 꽤 신기했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런 두 영화의 우열을 가리자면…….
‘일단 내 취향은 봉 감독님.’
내가 예전에 봤던 마션보다 지금의 마션이 더 나았다.
그렇다고 누가 봐도 지금 게 더 낫다 이 정도는 아니고, 개인적 취향이 더 봉 감독 쪽에 가깝다는 소리였다.
누군가는 두 영화를 봤을 때 리들리 스콧 감독의 버전이 더 낫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럴 수 있는 사람이야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