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두 자릿수
“하하. 한국에서도 내가 유명한가요?”
“그럼요. 스티븐의 사인을 꼭 받아 달라고 난리던데요. 각각 배우와 드라마 감독을 하는 친구들인데, 어렸을 때부터 스티븐의 영화를 보고 자랐대요.”
“오! 그러면 당연히 사인을 보내 줘야겠네요.”
스티븐이 앞장서서 나를 안내했다.
사실 말이 홈 파티지 스티븐의 자택이 웬만한 호텔 저리 가라 하는 크기인 터라.
저택의 정원에서 열리는 홈 파티는 차라리 연회라 부르는 게 더 어울리는 수준이었다.
“시나리오는 받아 봤었죠? 어땠나요?”
“훌륭하던데요? 잭도 오늘 여기 와 있는 거죠?”
“네. 파티장 어딘가에서 우진과 얘기 나누길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 친구도 우진의 스토리텔링 방식을 참 마음에 들어 했었거든요. 아, 저쪽으로 가 보죠.”
잭은 <라스트 게이머>의 각색을 맡아 준 잭 펜이라는 각본가였다.
헐크와 어벤져스, 엑스맨 등의 각본에 참여한 적 있던 유명 각본가.
스필버그 감독과도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 왔기 때문인지, 시나리오도 딱 스필버그 감독의 느낌이 물씬 풍겼었다.
아무튼.
“자네들 여기 있었군. 이쪽이 저번에 얘기했던 <라스트 게이머>의 원작을 쓴 친구야.”
스필버그 감독이 파티장에 자리한 여러 사람을 직접 소개해 줬다.
그와 쉰들러 리스트 이후로 쭉 함께했던 영원한 파트너인 촬영감독 야누스 카민스키부더 시작해서, 음악감독 존 윌리엄스, 편집감독 마이클 칸 등의 일명 스필버그 사단.
그 이외에도 할리우드의 여러 영화감독.
“아, 제프리, 이리로 와 보게. 이 친구가 저번에 얘기했던 그 친구야.”
“와우. MR. 선, 당연히 알고 있죠. <마지막 마법사>의 작가잖아요?”
“반갑습니다.”
‘에이브럼스 감독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J.J. 에이브럼스, 풀 네임은 제프리 제이콥 에이브럼스.
북미 영화계에서 스필버그의 제자 취급을 받는 영화감독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묘하게도 내적 친밀감이 들었는데.
그 이유는 며칠 전 파티를 함께했던 페이팔 마피아들이 에이브럼스 감독에 대해 엄청나게 떠들었었기 때문이었다.
“<라스트 게이머>도 읽어 봤어요. 스티븐이 괜히 택한 게 아니더군요. 무척이나 흥미로웠어요.”
“하하. 저도 스타트렉 다크니스를 최근에 영화관에서 봤었죠. 영상미가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감독님이 스티븐과 함께했던 슈퍼 에이트도 제 최애작 중 하나고요.”
페이팔 마피아들이 그렇게 까 댔던 스타트렉 다크니스의 영화감독이 바로 에이브럼스였다.
그들이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에이브럼스 감독과 이렇게 서로 칭찬을 주고받는 모습이라니.
그래도 뭐, 그때나 지금이나 거짓을 말한 건 아니었다.
페이팔 마피아 친구들한테는 굳이 밝히지 않은 사실이지만, 정말로 나는 에이브럼스 감독의 스타트렉 다크니스를 꽤 재밌게 봤던 것.
원작을 내가 몰라서 그런가.
중간중간 나오는 화려한 영상미도 그렇고, 페이팔 마피아들이 비판했던 스타워즈스러움도 오히려 나는 좋았었다.
엄청난 명작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러닝 타임 내내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쭉 재밌게 봤었다.
물론 나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기에 이런 내 의견을 저번 파티에서 굳이 밝히지 않았다.
아무튼.
“맞아요. 봉 감독은 천재적인 감독이죠. 그런 의미에서 마션을 그에게 맡긴 건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괜히 써밋 엔터가 요즘 할리우드에서 핫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너무 혼자서 호스트를 독점하는 것 같아 스필버그 감독을 떠나보내고 에이브럼스 감독과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사람 알고 보니 한국과도 인연이 꽤 깊었다.
지금 한창 마션을 촬영하고 있는 봉 감독, 그와도 꽤 오랫동안 친분을 나눈 사이였던 것.
괴물을 보고 팬이 되어 먼저 연락해 친분을 다진 사이라는데, 슈퍼 에이트도 괴물에서 꽤 많은 오마쥬를 얻었었다고 한다.
‘봉 감독이 세계적인 감독이기는 하구나.’
원래도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이럴 때마다 새삼 놀라웠다.
에이브럼스 감독은 요즘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나가는 감독 중 한 명인데, 그런 그도 봉 감독의 팬이라고 자처할 정도였으니.
괜히 나중에 패러사이트로 대박을 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유명한 사람들이 참 많네.’
괜히 스필버그 감독의 파티가 아니라고 해야 하나.
아까 전 인사를 나눈 스필버그 사단과 에이브럼스 감독은 물론.
할리우드에서 가장 뛰어난 각본가로 꼽히는 아론 소킨, 트랜스포머의 마이클 베이 감독 등.
여기를 봐도 유명인, 저기를 봐도 유명인이었다.
그리고 그중 반가운 얼굴이 한 명 있었는데.
“우진! 여깄었군. 왔으면 바로 나를 찾았어야지.”
원래도 반가운 얼굴이었겠지만.
모르는 사람들 가득한 파티에서 보게 되니 오늘따라 더욱 반가운 피터.
내 옆에 있던 에이브럼스 감독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인 건지 서로 인사를 나눈다.
뭐, 생각해 보면 피터도 스필버그 감독과 공동 감독으로 영화를 찍었던 적도 있던 만큼 스필버그 감독의 제자 소리를 듣는 에이브럼스와 인연이 없을 리가 없었다.
“JJ, 미안한데 이 친구 좀 내가 데려가도 되지?”
피터의 물음에 에이브럼스 감독이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를 비켜 줬다.
“뭐야? 무슨 일인데?”
“아까 파티를 돌아다니다 엄청난 네 팬을 찾았어. 나를 붙잡고 하루 종일 <마지막 마법사> 얘기만 떠들어 대더군.”
그렇게 말하며 나를 데리고 어딘가로 안내하는 피터였다.
우선은 잠자코 그를 따랐다.
피터가 나를 그냥 팬이랑 인사시켜 주고 싶어서 데려가려는 건 아닐 테고.
아니나 다를까.
가는 길에 샴페인 한 잔을 들어 올린 피터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기억하지? 워너 놈들한테 한 방 제대로 먹여 주기로 한 거. 이번이 그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그렇게 피터가 안내한 건 웬 중년 남성의 앞.
내가 알고 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름 배우 지망생이었다고.
할리우드 유명 인사들의 얼굴 정도는 꽤 알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오, 오오! 여기서 뵙게 될 줄이야!”
내 팬이라는 피터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나를 격하게 반기는 상대.
피터가 중간에서 그를 소개해 줬다.
“토마스 툴. 레전더리 픽처스의 CEO지.”
레전더리 픽처스?
분명 영화 제작사일 텐데.
어디서 들어 본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기억이 날락말락했다.
그러던 그때, 저번에 얼핏 봤던 보고서 속 내용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
내가 입대하기 전 미국 진출을 마무리 짓기 위해.
최근 스웜과 관련한 판권 계약을 여러 제작사와 논의 중인데.
내가 특별히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몇몇 작품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
알아 보니 아직 넷플릭스와는 계약이 되지 않은 상태라 꼭 독점 계약을 따오라고 강조했었다.
아무튼.
그런 인셉션의 제작사 이름이 분명 레전더리 픽처스였다.
“참고로 몇 주 전 워너 브라더스와의 독점 배급 계약이 만료됐지. 그리고 지금은 새로운 배급사 파트너를 찾는 중이었고.”
‘배급 계약이 이제 막 끝났다고?’
피터의 이어진 말에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마지막 마법사>의 팬이란 게 사실이라면.
조금 치사하지만 그 점을 이용해서라도 써밋 엔터와 배급 계약을 체결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인셉션의 제작사.
그건 바꿔 말하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적을 두고 있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즉, 아마 지금쯤 한창 촬영 중일 그의 차기작 또한 레전더리 픽처스가 제작하고 있다는 것.
그 작품의 배급을 써밋 엔터가 담당할 수 있다니.
‘이러다 NASA에 초대받는 거 아닌가 몰라.’
문득, 그 영화의 명대사가 생각났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바로 인터스텔라였다.
* * *
[선우진, 나이를 초월한 피터 잭슨과의 우정? 피터 잭슨 감독, “우진은 내 가장 좋은 친구 중 한 명. 나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라고 밝혀.]
[스티븐 스필버그가 말하는 선우진. “라스트 게이머는 훌륭한 작품.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에게 보여 줄 순간이 기대된다.”]
그냥 홈 파티에 초대받아서 간 것뿐인데.
아무래도 주최자가 주최자인지라 파티에서의 모습이 꽤 화제가 됐다.
일종의 자선 행사도 겸했던 만큼 언론인들도 파티장에 있었던 것.
[선우진, 스필버그 감독의 자선 행사에서 1,000만 달러짜리 수표 쾌척.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시절 미국 참전용사들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런 참전용사들의 희생에 감사와 경의를 표하는 의미.”]
그리고 자선 행사에 참여한 만큼 나도 어느 정도 기부금을 내놔야 했는데.
난 거기서 천만 달러짜리 수표를 꺼내 들면서 이번 자선 행사 최대의 기부왕이 되었다.
아이고… 아까운 내 돈.
어떻게 번 피 같은 돈인데… 는 아니고.
사실 기부금의 대부분이 소득공제가 되는 터라 그렇게 아깝지는 않았다.
더욱이 미국은 세계에서 기부 문화가 가장 잘 발달한 국가.
부자들에게 있어 기부는 권장되다 못해 안 하면 욕 먹는 수준이었다.
내 사업 대부분이 미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만큼, 나도 이렇게 솔선수범해서 기부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했다.
‘천만 달러로 이런 이미지를 살 수 있으면 이득이지.’
게다가 내가 수표를 기부하며 남긴 말이 국내 언론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꽤 화제가 되고 있었다.
-저 친구 대단한 친구네.
-쓴다는 소설이 <마지막 마법사>라고? 당장 읽어 보러 간다.
-요즘 아메리카에는 군인들의 희생에 감사해하지 않는 몰상식한 어린놈들도 많던데… 타국의 젊은이가 저러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감동이네.
-아무리 세제 혜택이 있어도 1,000만 달러를 기부하는 건 쉬운 선택이 아니지! 게다가 모국도 아닌 남의 나라의 군인들을 위해 기부하는 건 말이야!
-내 할아버지도 한국전쟁 때 참전하셨었는데, 어제 저녁에 뉴스를 보고 엄청 뿌듯해하셨어. 본인께서 한국에 갔었을 때는 높은 건물 하나 없고, 제대로 된 도로도 없던 나라였었다는데, 그런 국가가 지금처럼 발전해서 저렇게 존경을 표해 주는 게 놀랍다고 하시더라.
-<마지막 마법사>는 좋은 소설이야. 단순히 흥미 본위의 소설 같아도, 자세히 읽어 보면 결국 전쟁의 참혹함과 그걸 딛고 일어난 평화의 소중함을 역설하는 글이라고.
-코리아는 대부분의 남자가 군대에 가지 않나? 저 소설가도 그럼 군대를 갔다 온 거야?
-아직 안 간 거로 알고 있어. 한국 남자들은 보통 20살에서 22살 사이에 입대를 하는데, 저 친구는 이제 막 20살이 됐거든.
-와우… 그러면 20살이 천만 달러를 기부할 정도로 성공한 거라고?
군인과 애국심이라는 키워드가 미국인들을 제대로 자극했던 것.
어느 정도 의도한 행동이기는 했다.
내 소설도 그렇고, 써밋 엔터나 스웜의 사업 자체가 대중들을 상대로 돈을 버는 일.
대중이 나에 대해 긍정적 인식을 갖게 하는 게 중요했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마음에 없는 말을 한 건 또 아니었지만, 여하튼.
[써밋 엔터! 레전더리 픽처스와 독점 배급 계약 체결!]
[인수 1년 만에 단숨에 가장 큰 미니 메이저 영화사가 된 써밋 엔터. 모두 선우진 효과인가?!]
[블룸하우스 프로덕션에 이어 레전더리 픽처스까지. 배급 규모를 키워 나가고 있는 써밋 엔터.]
홈 파티가 있고 나서 몇 주 후.
레전더리 픽처스와도 배급 계약을 맺는 것에 성공했다.
제작까지 겸하는 만큼의 수익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제작비를 투자하는 게 아니니 당연한 노릇.
그래도 배급사가 가져가는 비율인 10%만 쳐도 인터스텔라와 덩케르크에서 최소 1억 달러다.
거기에 레전더리 픽처스의 기존 작품들을 스웜에 들여올 수 있게 됐으니.
여러모로 남는 장사였다.
우우웅- 우우웅-
그리고 이곳 시간으로 오전 8시.
한국 시간으로는 자정이 되자 엄청나게 울려 대기 시작한 핸드폰.
모두 신년 축하 톡들이었다.
아직 미국은 12월 31일이기는 해도 2014년이 밝았던 것.
그리고 그 말인즉슨…….
‘D-99.’
입대까지 카운트다운 99일.
두 자릿수라니.
우울해지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