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써밋 엔터 방문
뚝-
“후우…….”
통화가 끝나자마자 긴장 가득한 한숨을 내뱉는 제이슨.
“엄청나군.”
30억 달러.
금융권에서 보낸 세월이 적지 않은 제이슨에게도 감히 입에 올리기 힘든 액수였다.
웬만한 규모의 기업이더라도 부채 규모가 30억 달러를 넘지는 않을 텐데.
‘다른 사람이라면 그게 뭔 미친 짓이냐며 말렸을 텐데…….’
선우진에게는 그런 조언을 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간 그를 옆에서 봐 온 결과.
투자에 있어서는 그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난 선우진이었으니.
‘그때 봤던 그저 돈 많아 보이는 작가가 이리될 줄은…….’
치익-
제이슨이 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언젠가의 기억을 떠올렸다.
선우진과의 첫 만남.
렌샤오라는 텐센트의 거물을 통해 소개받았던 때.
그때는 그저 렌샤오와의 연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만났던 것에 불과했다.
고작 20살의 소설가를 한 명 만나, 그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렌샤오의 호감을 살 수 있다니.
한국 속담에서는 이런 걸 누워서 떡 먹기라고 했던가.
그런 생각으로 만남을 가졌었다.
심지어 당시 웬 모바일 게임 따위에 400만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소리를 듣고 무슨 생각이 들었던가.
‘작가라서 특이한 거에 꽂힌 건가… 였지.’
내심 비웃는 마음도 작게나마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예상과는 달리 반년 만에 400%라는 수익률을 거둔 투자였었으니.
적어도 투자 감각에 있어서는 자신보다 몇 배나 더 나은 게 분명했다.
물론, 그게 전부 운이라 치부했던 때도 있었다.
그렇기에 제이슨이 그에게 예전에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이쪽 업계에서는 강한 운이야말로 최고의 실력이다.
그러니 그런 면에서 선우진이야말로 한국 최고의 투자자일 거라고.
당연하게도 진심으로 했던 말은 아니었다.
1년 남짓한 시간 만에 10억 달러를 투자로 벌어들였다는 선우진이 놀라워서 진심 반 인사치레 반을 섞어 했던 말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반년이 지난 지금.
‘그때 했던 말이 진짜일지도.’
제이슨은 자신이 했던 농담 섞인 말이 진실에 가까운 말이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투자자가 자신을 증명하는 방법은 하나였다.
어느 정도의 수익을 내느냐.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느냐.
그런 의미에서 선우진이야말로 그가 지금껏 봐 온 이들 중 최고의 투자자가 맞았다.
당시 투자했던 대형 기술주로만 선우진이 벌어들였던 금액이 반년 만에 무려 4억 달러 이상이었으니.
만약 언론에 공개된다면 한국의 모든 언론이 깜짝 놀랄 만한 액수.
이제 운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성공이었다.
투자시장에 초심자의 행운이란 말도 있듯이.
한 번의 투자로 수익을 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 번을 넘어서 여러 번이 되었을 때, 그 모든 투자에서 성공하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이번에는 30억 달러. 이번 투자에서도 성공한다면…….’
그가 우스갯소리로 했던 한국 최고의 투자자를 넘어 선우진이 한국 최고의 부자가 되는 것도 꿈이 아닐 터.
그리고 정말 그런 순간이 온다면…….
워렌 버핏과 조지 소로스 등.
제이슨이 한때 되길 원했던, 하지만 결국은 되지 못한 현대 금융사의 신화적 존재들.
한국에서 그런 이가 탄생하는 걸 직접 보게 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 * *
“헤이, 저기에 또 달라붙었어.”
“파파라치 같습니다.”
이번에 미국에 오고 느끼게 된 건데.
예전과는 달리 기자들이나 파파라치들이 내게 꽤 많이 붙어 다니더라.
덕분에 요즘 경호 팀들의 할 일이 꽤 늘어났다.
‘왜 그런 기사가 뜬 거야.’
[선우진, 데이지 콜린스와 열애 중? 뉴질랜드 해변 데이트 포착!]
[선우진의 첫 열애설 주인공은? 할리우드의 20대 여배우!]
뉴질랜드를 떠나 미국에 도착하고 보게 된 기사들.
내가 데이지 콜린스라는 <마지막 마법사>에 출연하는 여배우와 연애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몰랐는데 뉴질랜드 촬영장에도 파파라치들이 붙어 있었던 것.
분명 촬영장 주변에서 스태프와 배우들을 제외하고 사람들이 없었던 것 같은데.
요즘 카메라들이 얼마나 좋던지, 저 멀리서도 가까이서 찍은 것처럼 사진이 나오더라.
뭐, 찍힌 사진은 별거 아니었다.
나랑 데이지 콜린스가 해변에 누워서 대화를 나누던 모습.
실제로는 단둘이서 그랬던 건 아니고 로버트와 함께였는데, 로버트가 잠시 어디 간 사이 절묘하게 사진을 찍었더라.
데이지 콜린스가 요즘 할리우드에서 뜨는 핫한 여배우 중 한 명이라던데, 그 화제성을 이용해 사진을 팔아먹으려고 했던 모양.
-……?
-선우진 뭐 하냐?
-금발에 4살 이상 연상? 거기에 가슴까지 크다고?
-ㅅㅂ 선우진 근본 어디갔누.
-뉴질랜드 따스한 휴양지에서… 가슴 큰 금발녀와 데이트?
-선우진 군대 언제 감? ㅡㅡ
-ㄹㅇ 국방부 뭐 하냐 안 잡아가고.
그 탓에 한국에서도 내 열애설이 화제가 되고 있었다.
할리우드발 기사들이 그대로 수출된 것.
SW 프로덕션을 통해서 아니라는 해명 기사를 내기는 했는데, 여느 열애설의 해명이 그렇듯 아직 믿지는 않더라.
‘하루 얘기해 본 게 전부인데…….’
그것도 내가 아니라 로버트와 데이지 콜린스가 묘한 분위기를 띠고 있던 상황이다.
그래 놓고 기사는 나로 났으니.
0연애 1열애설을 달성한 것.
왠지 모르게 손해 본 거 같은 기분이었다.
어쨌거나.
“오랜만입니다, 보스.”
“그간 잘 지냈죠?”
다시 찾은 써밋 엔터.
트렌트에게서 그동안의 일을 보고받았다.
“좋네요. 12월에 맞춰서 개봉하는 거죠?”
“네. 아무래도 라라랜드의 분위기와 가장 잘 어울리는 때는 연말이니까요.”
우선 음향 작업과 CG 추가 등 모든 후 작업까지 끝나 완성본이 나온 라라랜드.
완성본을 살펴봤는데 내 기억보다 좋은 영화가 나왔다.
회귀하고 난 이후 느낀 점 중 하나가 웬만한 건 돈을 더 쓰면 쓸수록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
라라랜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샤젤 감독은 굳이 그만한 제작비가 필요 없다고 했지만, 억지로라도 더 돈을 쓰게 하니 더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온 것.
남은 건 홍보와 상영관을 섭외하는 것뿐이었다.
‘라라랜드가 12월에 개봉해서 1월, 2월까지는 영화관을 장악하고. 그다음에는 마션이 나오는 거지.’
봉 감독의 마션 또한 현재 촬영이 한창이었는데, 후반부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몇 주 내로 촬영은 끝이 날 거고, 후 작업은 한두 달 내로 완성될 거라는 보고를 받았다.
개봉 일자 또한 내년 3월이나 4월 중으로 예상되고 있었고.
라라랜드와 마션 모두 개봉 시기와는 상관없이 엄청난 흥행을 거둘 만한 작품.
두 작품이 차례대로 개봉하게 되면 올해 연말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써밋 엔터의 영화가 시장을 휩쓸게 되는 거였다.
‘문제는 그다음인데…….’
원래 내가 지금 시기에 할리우드를 찾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써밋 엔터가 마션 이후 제작할 작품 중 이렇다 할 흥행작이 없다는 것.
그래서 내가 나서서 미래에 흥행할 대박작들에 컨택하려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네.’
내가 나서기도 전에 트렌트가 알아서 할 일을 다 해 놨더라.
특히 블룸하우스 프로덕션과 배급 계약을 맺은 건 앞으로 써밋 엔터의 수익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파라노말 액티비티와 더 퍼지로 잘 알려진 제작사인 블룸하우스 프로덕션.
저예산 영화로 내는 대부분의 영화마다 몇 배 이상의 수익을 내는 회사였다.
거기에다가…….
‘이 두 작품의 판권을 따올 줄이야.’
두 작품 모두 판권 계약 경쟁자가 여럿 있어서 적지 않은 돈을 썼다고 말하며 트렌트가 자책하고 있기는 했는데.
내 기준에서는 그야말로 헐값이나 다름없는 판권 금액이었다.
“어쩌다 이 두 소설의 판권을 사 올 생각을 하셨어요?”
“하하. 보스가 소설가이신데, 저희 회사에서도 소설 원작 영화를 여러 개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흥행 소설들을 쭉 읽어 보고 영화화하기 좋은 것들로만 골랐죠.”
“모두 트렌트가 고른 건가요?”
“예.”
트렌트가 영화화 판권을 사 온 두 작품.
바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와 ‘그것’이었다.
“와우. 50가지 그림자… 를 재밌게 읽으신 건가요?”
“으음. 아뇨? 작가님의 <마지막 마법사> 이전, 몇 년 동안 출판업계에서 가장 성공한 소설이라 해서 읽어 본 건데… 대체 왜 저게 그렇게나 많이 팔린 건지 처음에는 잘 모르겠더군요.”
“그런데 판권을 사 오신 건가요?”
“네. 처음에는 몰랐는데 몇 번 다시 읽어 보니 감이 오더라고요. 왜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되겠다. 사실 작품성과 흥행은 항상 정비례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트렌트의 말이 맞았다.
50가지 그림자는 예고편이 꽤 적나라했던 덕에, 나도 영화관에 가서 직접 본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이후 느낀 감상은, 예고편이 사실상 영화 전체 내용의 90%나 다름없었다는 것.
그 정도로 재미가 없던 영화였다.
영화를 보면서 돈이 아깝다는 생각만 계속 들었을 정도.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흥행 수익이 5억 달러가 넘었다고 해서 놀랐던 기억이 났다.
‘저게 제작비 대비 10배 가까운 수익을 올리지 않나?’
청소년 관람 불가인 R등급의 영화가 낸 수익이라고는 볼 수 없는 수치.
뭐, 그만큼 작품의 흥행에 있어서 마케팅이나 어그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시리즈로 된 소설.
영화 또한 시리즈로 나오게 되는데, 모든 작품이 제작비 대비 엄청난 흥행을 거두게 된다.
작품마다 최소 몇 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벌어들이게 되니까…….
즉, 트렌트가 사 온 판권은 적어도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
내가 괜히 트렌트가 지불한 몇천만 달러에 달하는 판권 금액을 보고 헐값이라 한 게 아니었다.
‘거기에 <그것>까지 계약해 온 거니까…….’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그것>은 역대 공포 영화 최고의 흥행작이 되는 작품.
그게 어느 정도나 되는 건지는 기억에 없기는 하지만…….
“아, 역대 공포 영화 중 제일 많은 돈을 번 게 어떤 작품이죠?”
“공포 영화요? 그러면 당연히 식스센스죠. 제 기억으로는 제작비 4,000만 달러를 투입해 월드 박스 오피스가 6억 5천만 달러를 넘겼었을 겁니다. 으음… 아, 정확히는 6억 7천만 달러네요.”
최소 6억 7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다는 소리.
“그래요? <그것>도 그만한 금액을 벌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하하.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론 쉬운 목표는 아니지만요.”
게다가 <그것> 또한 시리즈로 나오게 되는 영화.
모르면 몰라도, 후속편에서도 최소 몇 억 달러는 벌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합이 20억 달러짜리 판권 계약인 건가? 확실히 유능한 사람들을 주위에 두니 편하긴 하네.’
지금까지는 회귀자로서의 치트키로만 성공을 거뒀다면, 이제는 내가 굳이 관여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떠오르는 흥행작들이 있으면 앞으로도 계속 트렌트에게 추천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굳이 관여하지 않아도 써밋 엔터만큼은 안심하고 입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트렌트, 고생했어요. 앞으로도 써밋 엔터를 잘 맡아 주세요.”
“오! 물론이죠, 보스. 저만 믿으십쇼.”
내 말에 반색하는 트렌트.
방금의 말로 로버트 프리드만의 추천으로 대표직을 맡긴 것뿐이었던 그를 지금처럼 임시로 대표직을 맡기는 게 아니라, 써밋 엔터의 정식 CEO로 확정하겠다 말한 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일단 써밋 엔터는 안심이고.’
다음 주에는 샌프란시스코를 갈 생각이었다.
우선 그곳에 있는 윅슨 출판사를 들리고…….
‘그다음은 돈 쓸 차례지.’
LA에 할리우드가 있다면, 샌프란시스코에는 실리콘밸리가 있었으니.
이번에 받게 될 30억 달러의 대출에서 최소 10억 달러 이상은 그곳에서 쓸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