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영입 욕심
“오오…….”
“흐, 어때? 자네가 준 돈을 팍팍 썼다고.”
그걸 잘했다고 해야 할지, 좀 아끼는 게 어떠냐고 해야 할지.
<마지막 마법사>의 세트장.
아니. 이걸 세트장이라고 하는 게 맞는 걸까.
‘그냥 진짜… 소설에 나오는 배경을 그대로 가져온 거 같은데?’
사실 <마지막 마법사> 초반부를 쓸 때는 영상화에 대한 생각이 그리 크게 없던 터라.
작중 배경을 묘사할 때 실사화에 대한 고려 없이 막무가내로 썼었다.
그중에는 실제로 만들어 내기 어려운 것들도 꽤 많았는데.
가령, 지금 내 앞에 있는 기다란 첨탑이라거나, 몬스터의 침공을 막기 위해 돌을 깎아 지은 요새라거나 하는 것들.
그런 배경들이 내 눈앞에 소설과 거의 동일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하다못해 미니어처로 만들 줄 알았는데 말이지.’
CG나 1/4 사이즈 등으로 작게 만들거나 하는 방법들도 있었지만.
아예 통째로 세트장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모두 이후에 관광지로 활용할 계획도 있기 때문.
“관광청에서 허가가 나온 게 참 다행이야. 뭐, 이쪽 부근은 원래 아무것도 없는 평야이기는 했지만.”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말하는 피터.
피터가 촬영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촬영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이 짜 놓은 촬영 구도, 이 세트장에서는 소설에 나온 어떤 디테일을 살렸는지 등.
그러면서 작품과 관련된 얘기도 꽤 나눴다.
소설에서는 비춰지지 않았지만, 피터가 영화에서 다루고 싶은 이야기들.
피터가 내 작품의 팬인 건 맞지만, 그래도 영화감독으로서 그가 가진 작품관과 내 작품관에도 차이가 있는 만큼 앞으로의 영화 촬영에 있어 큰 도움이 될 만한 대화였다.
‘확실히 거장은 다르구나.’
검객무쌍이나 연기천재가 되었다도 물론 좋은 작품이었지만.
당시 그 작품들을 찍었던 감독들과 대화를 나눴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기분.
괜히 피터 잭슨이 명감독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터의 얘기를 들으며 나도 새롭게 배우는 게 있을 정도였다.
‘영상 예술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재미가 있는 법이지.’
“반갑습니다, 작가님. 로버트라 불러 주세요.”
“저도 우진이면 됩니다.”
<마지막 마법사>의 출연진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오디션 끝에 뽑힌 주인공 역의 로버트 패틴슨.
사실, 로버트 패틴슨이 주역으로 뽑히고 나서 여러 이야기가 있었다.
먼저 해리 포터의 세드릭 디고리 역으로 이름을 알리고, 트와일라잇의 에드워드 컬렌 역으로 톱스타가 됐던 그였다.
하지만 연기력에서는 항상 의문이 따르기도 했었다.
그 탓에 오디션으로 연기력만 본다고 해 놓고 정작 뽑은 게 로버트 패틴슨이라니.
이미 흥행을 위해 그를 내정해 놓고, 눈 가리고 아웅으로 오디션만 연 게 아니냐는 소리가 많았던 것.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는 로버트의 연기력을 알고 있으니까.’
지금의 그가 곱상한 꽃미남 정도로만 대중들한테 인식되어 있는 건 맞다.
당장 그의 출연작 중 가장 유명한 시리즈인 트와일라잇에서 보여 준 연기력이 발 연기 수준이었으니까.
음… 내가 할 말은 아니려나?
아무튼 간에, 로버트는 몇 년 내로 외모뿐만 아니라 연기력으로 호평을 받을 정도의 명배우가 된다.
몇 년 후에는 굿 타임이라는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남우 주연상 후보로 오를 정도.
테넷과 더 배트맨에서 주연을 맡기도 하면서 꽃미남 배우가 아닌 연기파 배우로 거듭나게 된다.
그런 잠재력은 어디 가지 않는 건지.
트와일라잇 마지막 시리즈를 찍었던 게 고작 재작년인데, 지금의 로버트는 그때와는 연기력의 수준이 차원이 다르더라.
‘전작도 좋았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코스모폴리스.
그곳에 주연으로 출연해 수준급 연기력을 뽐낸 로버트였다.
크로넨버그 감독은 캐나다 출신의 거장급 영화감독인데,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한 독창적인 영화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유명한 감독.
‘크로넨버그 감독도 처음에는 흥행을 위해 로버트를 캐스팅한 거랬지. 그런데 코스모폴리스에서의 연기력을 보고 차기작에서도 같이하기로 결정했고.’
피터의 경우도 비슷했다.
그가 내게 따로 말해 주길, 처음에는 로버트의 지원 서류를 받아 보고는 연기를 볼 필요도 없겠다고 생각했었단다.
그에게도 로버트가 트와일라잇에서 보여 준 모습이 깊게 남아 있던 것.
하지만 정작 오디션장에서 보여 준 실력은 같은 사람이 맞나 의심했었을 정도였다고 하니.
“잘 부탁드립니다. 좋은 영화를 만들어 주세요.”
“하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만, 로버트에게는 단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이야기가 사실이었구나.’
언젠가 로버트 패틴슨이 잘 안 씻는 거로 유명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게 사실인 듯, 지금도 머리가 떡져 있는 그였다.
악수를 하면서 향수와 섞인 냄새가 솔솔 올라오는 게 하루 이틀 묵은 기름기는 아닐 터.
‘<마지막 마법사>가 중세 배경이라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마지막 마법사>의 주인공이 그리 깔끔을 떨어야 할 배역은 아닌 터라.
저 모습 그대로 촬영하더라도 딱히 위화감은 없을 것 같긴 했다.
“그런게 그거 아시나요?”
“……?”
“하핫. 어제 아스날이 팰리스를 2-1로 꺾었다는 거?”
“……?”
“램지의 크로스를 지루가 헤딩으로 마무리. 환상적인 결승골이었죠.”
아아.
로버트에게 단점이 하나 있다는 방금의 말은 취소였다.
그러고 보니 로버트 패틴슨이 영국 런던 태생이라던데.
이 사람, 개집 팬이었다.
* * *
“휘유-! 반갑습니다. Mr. 선. <마지막 마법사>는 저도 참 재밌게 읽고 있는 중입니다. 이번에 나온 4부도 최신권까지 구매했어요. 그래서 이 역에 지원했던 거고요.”
다음으로 만난 건 제레미 아이언스.
주인공의 스승으로 등장해 1부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붉은 마탑의 주인, 라셀레스가 그의 배역이었다.
‘…엄청 멋있게 생기셨네.’
환갑이 넘은 거로 알고 있는데.
그야말로 노년 간지가 뭔지 정확히 보여 주는 제레미 아이언스.
붉은 마탑주 역을 위해 여러 분장을 했는데도, 그 멋짐이 분장을 뚫고 나오는 수준이었다.
동시에 든 좋은 예감.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가 그랬고, 해리 포터의 덤블도어가 그랬듯이.
판타지 영화에 등장하는 스승 느낌의 노인 역은 언제나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포지션.
그런데 적어도 멋짐에 있어서는 <마지막 마법사>의 라셀레스가 한 수 위 같았다.
‘꽤 묘한 인연이네.’
로버트 패틴슨과 제레미 아이언스를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나밖에 모르는 미래였지만.
후에 각각 다른 영화에서 배트맨 브루스 웨인과 그 집사인 알프레드 역을 연기하게 되는 배우들이었다.
그런 둘이 <마지막 마법사>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만나게 된 것.
우연에 불과하지만 꽤 신기한 우연이었다.
어쨌거나-
“컷! 다시 한 번 더! 로버트, 거기서는 조금 더 절망적인 표정으로 대사를 쳐 줄 수 있겠나? 아, 제레미는 좋았어요. 이번에도 방금처럼만 부탁해요.”
오후가 되면서 <마지막 마법사>의 촬영이 시작됐다.
장면을 나눠서 찍는 건지, 지금 찍는 건 원래라면 1부 중반부 즈음에 등장하는 신.
주인공이 라셀레스를 만나 그와 사제의 연을 맺는 장면이었다.
<마지막 마법사>의 1부에 있어서 꽤 핵심적인 순간.
그래서인지 피터도 여러 번이나 재촬영을 하고 있었다.
“헤이. 이리로 와서 여기를 좀 봐. 눈가가 떨리는 디테일을 표현하는 건 좋았어. 하지만 여기서…….”
방금 찍은 신을 화면으로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피터와 로버트.
나도 뒤에서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캠핑 트레일러로 향했다.
‘왠지 모르게 스포당하는 기분이니까.’
물론 스토리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세상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촬영 장면들을 여러 번 보고 있자니.
스포일러 아닌 스포일러를 당하는 기분.
그래도 내가 쓴 이야기가 화면을 통해 펼쳐지는 건 지금처럼이 아니라 스크린으로 처음 보고 싶었다.
알고 있는 스토리더라도 거기에 감독의 연출이 더해지고, 사운드가 덮혀지면 전혀 다른 장면이 될 터.
이왕이면 완성본을 직접 보고 싶었다.
“음. 엄청 넓네.”
숙소와 촬영지가 그리 멀지 않은 한국과는 달리, 할리우드는 지금처럼 주변에 촬영장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촬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영화 계약에도 캠핑 트레일러에 대한 조건이 가끔 명시될 정도로, 할리우드 배우들은 트레일러를 중히 여겼다.
오늘 내가 머물게 될 캠핑 트레일러도 로버트와 제레미에게 제공되는 것과 같은 것이었는데.
한 대에 한화로 몇억 원이나 했다.
그래서인지 넓고 쾌적한 건 물론, 꼭 호텔방 같은 내부였다.
‘그나저나 어제 팰리스가 졌다 이거지.’
침대에 누워 기사를 살폈다.
내가 오클랜드로 비행하는 동안 아스날과의 경기가 있었다.
원정 경기에서 2 대 1 패배.
하지만 패배한 것치고는 팬들의 반응이 꽤 좋았다.
-Fuck. 슈체츠니가 긁히는 날만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겼을 거야.
-운이 없었지. 선방을 11번이나 하다니. 게다가 그냥 선방 수준이 아니었지. 11번 중 최소 2번은 골이 됐어야 했다고.
-그것보다 오늘 경기로 바디가 벌써 7경기 연속 골인가? 이만한 퀄리티의 스트라이커를 푼돈으로 사왔다니!
└위대하신 태양 덕분이지.
└태양을 찬양하라-!
-10경기 6승 2무 2패라니! 우리가 지금 5위라고!
그도 그럴 것이, 크리스탈 팰리스의 현재 성적은 그야말로 최고라 볼 수 있는 정도.
이제 갓 승격한 팀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의 경기력을 보여 주며 시즌의 30%를 치른 지금 5위에 랭크되어 있던 것이다.
위로는 맨시티와 아스날, 첼시, 리버풀이라는 전통의 강호들뿐이었으니.
어제의 패배에도 팬들이 불만을 토해 내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태양? 이건 좀 부끄러운데.’
심지어 나는 요즘 수정궁 팬들한테서 태양이라는 황송한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우선 지금의 크리스탈 팰리스가 보여 주는 약진에는 모두 이번에 내가 영입한 자원들과 비엘사 감독의 공격 축구가 있었다.
돈 많은 구단주가 팀을 인수한 다음, 새 경기장을 건설할 정도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고, 그런 구단주가 독단으로 영입한 감독과 자원들은 리그 베스트급 퍼포먼스를 보여 주고 있는 것.
언제부턴가는 팰리스 팬들 사이에서 내 성인 선(Seon)이 Sun으로 통하게 된 것이었다.
‘올 시즌에는 지금 순위라도 유지해서 유로파라도 가면 다행인 건데.’
비엘사 감독에게 주문한 목표도 6위로 유로파리그에 진출하는 거였다.
시즌 끝에는 어떻게 될는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는 그 목표를 위해 순항 중.
조만간 있을 겨울 이적 시장에서도 돈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었다.
실제로 비엘사 감독의 이적 자금 투입 요청이 있기도 했다.
자기가 눈여겨보고 있는 중앙 미드필더 자원이 있는데, 같은 EPL에 속한 구단의 선수인 만큼 꽤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
‘3,000만 유로 정도면 되려나? 시장 가치는 2,500만 유로 정도던데, 같은 EPL 팀인 걸 고려하면 거기에 500만 유로 정도 더 써야 할 거고.’
사실 3천만 유로가 아니라 그 2배인 6천만 유로여도 기꺼이 지불할 생각이 있었다.
물론 진짜 그렇게 한다면 팰리스의 팬들은 물론, 영입 얘기를 꺼낸 비엘사 감독마저도 내게 미쳤냐고 하겠지만…….
“덕배를 어떻게 눈앞에서 놓치겠어.”
코리안 네임 김덕배.
진짜 이름은 케빈 더 브라위너.
이번 시즌 아자르, 오스카, 윌리안 등의 2선 자원들이 즐비한 첼시에서 출전 기회를 못 얻고 있는 벨기에의 유망주.
이 선수라면 첼시에서 6천만 유로를 불러도 기꺼이 지불해야 했다.
‘만약 같은 EPL 구단에는 안 판다고 하면… 로만한테라도 찾아가야 하나?’
그래도 이웃인데, 어떻게 한번 팔아 주면 안 되냐고 말이다.
뭐, 아무튼.
첼시에서 더 브라위너를 사올 수 있게 되고.
나중에 더 브라위너의 잠재력이 만개한다면.
그때 가서 로만을 만나면 꽤 재밌는 상황이 연출될 거 같았다.
아마 그때는 아무 말 없이 악수만 나눠도 로만 입장에서는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지 않을까.
‘야, 니네 선수 쩔더라.’
아니면 진짜 그렇게 말해 줘도 좋을 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