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수리하는 남자
저번의 만남 이후 광둥성의 당서기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 더 자세히 알아봤는데.
대단한 양반이라는 건 알고 있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대단한 양반이더라.
중국의 성급 행정구는 성, 자치구, 직할시 등을 포함해서 총 34개의 구역으로 이뤄져 있다.
광둥성은 그런 행정구역 중 도시 경쟁력 1, 2위에 달하는 곳.
그런 곳의 왕이나 마찬가지인 게 광둥성의 당서기였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시장이나 경기도지사 정도 되는 위치.
‘물론 단순하게 비교하면 그런 거고, 가진 권력은 몇 배나 대단하겠지.’
아무래도 한국과 중국이라는 국가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잘은 모르지만, 중국은 웬 미친놈 한 명이 참새를 보고 해로운 새라고 하면 참새를 깡그리 죽여 버리는 나라이지 않나.
그게 몇십 년 전의 일이기는 해도 지금 보면 별로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당서기님.”
[하하. 무슨 소리십니까. 저희 사이에 뭐 이런 일 가지고.]
조금 전 광둥성 당서기, 후싱루이와 나눈 통화.
내가 그에게 감사를 표하는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스웜은 중국 내 라이센스를 따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것도 너무나도 간단하게.
‘1시간 정도 걸렸나?’
칼넘강이 중국에서 엄청난 흥행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칼넘강을 집필할 때 중국 독자들에게 큰 위화감이 없도록 중국 문화에 대해서도 꽤 공부했었는데.
그때 알게 된 ‘만만디’라는 게 있다.
천천히라는 뜻의 중국어로 느긋하고 여유 있는 중국인들의 삶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
‘빨리빨리’로 대표되는 한국과 달리 중국의 일 처리는 참으로 느긋하기 그지 없다.
실제로 SW 프로덕션에서도 스웜의 라이센스를 따내기 위해 중국의 여러 관공서와 관련 절차를 진행했었다는데.
중국 공무원들이 이리저리 늑장을 부리는 탓에 승낙도 아니고 거절당하는 데에도 몇 주나 걸렸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도 권력자 앞에서는 정반대다, 이 말이지.’
그런 일이 후싱루이의 한마디에 이리 쉽게 끝나다니.
SW 프로덕션 내부에서도 난리였다.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시선들도 있더라.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라이센스 문제를 이리 빨리 해결했냐고 말이다.
물론 대답해 주지는 않았다.
나만의 비법 ‘느그 당서기 광둥성 살제?’가 효과는 좋아도 어디 가서 자랑할 만한 비법은 아닌 터라.
아무튼.
‘잠깐만… 그러고 보니…….’
“양 PD님, 윤 감독 신작은 어떤 거로 간대요?”
윤 감독이 누구냐면 ‘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라는 희대의 명대사를 남긴 ‘범죄와의 전쟁’의 연출과 극본 모두를 맡았던 감독이다.
지금은 타 제작사와 군도라는 영화를 한창 찍는 중인데.
몇 주 전 SW 프로덕션과 계약을 맺으며 차기작을 함께하기로 한 것.
내가 따로 영입한 건 아니고 최진섭 대표가 영입해 온 사람이었다.
후싱루이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그 영화가 떠올라 양진철 PD에게 물어본 거였다.
‘분명 군도는 흥행이 그저 그랬지.’
대박도 아니고, 그렇다고 쪽박도 아닌 중박 영화.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했던 거로 기억한다.
내가 배우 지망생 시절, 기획사 빨로 대사 다섯 줄짜리 역할을 맡아 군도에 출연할 뻔했었다가 잘렸던 기억이 있어 알고 있다.
이유는 외모가 사극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였는데, 아마 연기력 때문도 있었을 거다.
뭐, 우리 회사 작품도 아니니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아, 윤 감독이요? 으음. 안 그래도 요즘 고민 중이더라고요. 영화를 할지, 드라마를 할지.”
“드라마요?”
“네. 흑금성 사건이라고 북한 스파이 관련 실제 사건을 놓고 시나리오화를 준비 중이었는데… 이번에 스웜 론칭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네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 저희 이번에 론칭한 오리지널 작품들 보면 제작비 지원이 엄청 빵빵하잖아요. 특히 무전기는 드라마인데도 소재도 영화 느낌이고. 그런 걸 보다 보니 자기도 드라마 한번 해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이번에 군도 찍으면서 러닝타임 때문에 장면 쳐 내느라 엄청 골머리 앓기도 했는데, 드라마는 그런 걱정 안 해도 되지 않냐면서요.”
‘확실히 OTT 드라마가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지. 특히 영화로 만들기에는 길고, 기존 드라마들처럼 길게 빼기에는 짧은 스토리의 작품도 OTT에서는 작품화가 쉬우니까. 그런 이유들 때문에 미래에는 영화 감독들이 넷플릭스랑 일을 같이 하기도 했고.’
그렇게 말하며 어딘가에서 서류 두 뭉치를 가져와 보여 주는 양진철 PD.
“흐흐. 윤 감독이 기회되면 작가님한테 한번 보여 달라고 부탁했었는데, 이게 이렇게 되네요.”
“저한테요?”
“넵. 모르세요? 요새 작가님 미다스의 손으로 유명한 거?”
미다스의 손?
내 투자 수익을 알면 그게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양진철 PD가 말하는 미다스의 손은 돈 얘기를 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작가님이 쓰신 연기천재가 되었다나 중국에서 칼넘강 드라마화한 거야 당연히 다 대박이었고. 이번 스웜에서 반응 좋은 드라마들도 모두 다 작가님이 픽 한 대본이잖아요? 그리고 작가님 미국에 갖고 계신 영화사. 거기도 내는 영화마다 다 대박 난다면서요?”
“어. 그렇긴 하죠.”
“그래서 요즘 영화랑 드라마 업계에서 작가님이 잘되겠다고 고른 건 무조건 대박 난다는 얘기가 엄청 많아요. 글도 잘 쓰시는 만큼 작품 보는 눈도 뛰어나신 거라고.”
뭐… 내가 고르는 건 대부분 미래의 정보에 의지한 거긴 한데.
그래도 작품 보는 눈도 뛰어나다는 말이 틀린 말인 건 아니다.
‘전생형사도 느낌이 좋으니까.’
회귀 전 정보 없이 내가 대본만 보고 골랐던 범죄 수사 작품.
저건 아직 론칭은 안 했고, 60% 정도만 제작이 끝난 상태로 아직도 찍고 있는데.
앞부분을 본 회사 내부에서도 평이 꽤 좋았다.
기존 범죄 수사물과 다른 코드가 신선하면서도 흥미롭다는 평.
올 하반기 스웜 론칭작 중 제일 기대받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원래 내 웹 소설 보는 눈도 엄청 좋기도 했고.’
과거로 오기 이전.
문토피아 무료 베스트를 훑다 보면 그런 글들이 있다.
딱 1화만 봐도 느낌이 오는 글, 잘되겠다 싶은 글.
내가 그렇게 생각한 글은 십중팔구 중박 이상을 쳤다.
그래서 그런 글들이 무료 톱 10까지 올라오기도 전, 10화 남짓일 때부터 동료 작가들한테 이거 재밌다며 한번 봐 보라고 추천해 주기도 했는데.
그런 내 추천작들이 유료화에 가게 되면 항상 성적이 좋은 걸 보고 동료 작가들도 내 글 보는 눈을 인정하더라.
뭐, 어쨌거나.
“으음. 그런데 그 미다스의 손이라는 별명이 유명한가요?”
“하하. 그럼요. 아마 영화나 드라마 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부를걸요? 이쪽에서는 그런 얘기 엄청 빠른 거 아시잖아요. 사실 제 동기 놈들이나 선배 PD분들도 난리에요. 이번에 작품 새로 들어가는데 한번 보여 드리면 안 되냐고. 물론 제 선에서 커트하고 있으니 걱정 마시고요.”
“그래도 저희 SW 프로덕션이랑 계약한 분들이면 언제든지 봐 드릴 테니 보내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양진철 PD가 건넨 서류들을 살폈다.
각각 다른 작품의 시놉시스와 초반부 대본.
하나는 영화였고, 다른 건 드라마였다.
‘영화 시나리오는… 이미 아는 거네.’
아까 양진철 PD가 흑금성 사건 얘기할 때 긴가민가 했었는데.
시놉시스를 보니 확실해졌다.
아직 가제라고는 되어 있기는 해도 제목이 ‘공작’이었으니까.
북한 핵 개발 관련 정보를 캐내기 위해 북 고위층 내부로 잠입한 첩보원을 다룬 영화.
‘흥행은 조금 애매했던 것 같은데.’
관객 수가 500만 정도 됐던 것 같다.
뭐, 그 정도면 꽤 성공한 영화라 볼 수 있겠지만.
제작비를 고려하면 지금 찍고 있는 군도와 비슷한 정도의 흥행일 것 같았다.
손익분기점을 넘기기는 했어도 그 정도가 적은.
‘그래도 제작사 주인이라고, 시놉시스만 봐도 대충 제작비 견적이 짜지네.’
내가 기억하는 주연 배우들 출연료와 시놉시스대로 만들었을 때 제작비를 합치면 한 100억대 중반 정도가 들지 않을까.
거기에 마케팅 비용까지 합치고 이것저것 더하면 200억 원 정도.
관객 수 500만 명이면 딱 손익분기점이 날 정도다.
당장 ‘찍읍시다!’ 하고 말하기에는 애매하다는 것.
‘그래도 각종 영화제에서 감독상이나 작품상은 꽤 받았던 거로 기억하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흥행은 그저 그럴 거 같은데 상은 좀 받을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할 수도 없고.
나는 다음 드라마 시놉시스를 살폈다.
‘…음?’
이건 처음 보는 거다.
내 기억 속에서는 영화나 드라마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작품.
그러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흥행에 실패한 걸까?
‘그건 아닌 거 같은데……?’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시놉시스가 꽤 흥미롭다.
이런 내용이면 최소 이슈는 됐을 거다.
그랬다면 내가 보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작품이 있었다 정도는 알았을 텐데.
나는 종이를 넘겨 초반부 대본을 살폈다.
사락-
‘와아. 이게 실화라고?’
나르코스 세인츠라는 가제가 붙은 드라마.
시놉시스에 실화 기반 이야기라고 덧붙여져 있었다.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얘기를 다룬 나르코스를 엄청 재밌게 봤었는데.
한국인 중에서도 이렇게 마약 밀매 조직의 보스였던 사람이 있는 줄은 몰랐다.
거기에 마약 보스뿐만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성도 뚜렷한 것이, 읽으면 읽을수록 흥미가 더해졌다.
사락-
“…아.”
꽤 흥미로운 부분에서 대본이 끊겼다.
다음 내용이 막 궁금해지려고 하는데, 거기까지가 대본의 전부였던 것.
“어떠세요?”
“양 PD님도 보셨었죠? 양 PD님 의견은 어떠셨어요?”
“흐흐. 저는 둘 다 좋던데요? 둘 중 어떤 걸 택하더라도 둘 다 괜찮을 거 같더라고요. 그래도 굳이 하나를 고르자면… 저는 영화 쪽이요. 드라마는 너무 자극적인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런가.
내 생각은 양 PD의 의견과 반대였다.
공작보다는 나르코스 세인츠가 훨씬 더 재밌었다는 게 내 생각.
물론 양 PD의 말대로 자극적인 소재인 것도 맞다.
애초에 자극적이지 않은 마약 이야기가 가능하겠냐만은.
그래도 그 외에도 폭력과 섹스, 사이비 종교 같은 게 대거 등장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내게는 오히려 그런 자극적인 소재를 전혀 자극적이지 않게 그려 낸 느낌.
‘내가 미래에서 와서 이렇게 느끼는 거일 수도.’
겨우 10년 남짓의 시간이지만.
그 시간 동안 OTT의 등장으로 드라마나 영화나 많은 격변을 겪어서인가.
내가 가진 감성하고 이 시대 사람들의 감성하고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했다.
왜, 지금 세트장을 제작 중인 옥토퍼스 게임도 너무 충격적인 내용이 많은 게 아니냐는 의견을 낸 직원들이 많더라.
사실 그런 옥토퍼스 게임에 비하면 나르코스 세인츠는 훨씬 양호한 편.
뭐, 아무튼.
내 촉은 공작이 아닌 나르코스 세인츠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놉시스를 기반으로 나름 제작비 견적을 내 봤을 때, 나르코스 세인츠 쪽이 공작보다 몇 배는 돈이 더 들 것 같지만.
화제성에서 그 몇 배 이상을 확실히 뽑아 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다만, 걸리는 점이 있다면 이만한 이야기가 왜 내가 있던 미래까지 안 나왔었냐 이건데…….
‘내 눈이 틀린 건가?’
스스로 글 보는 눈이 꽤 좋다고 자신하기는 해도.
무조건 100% 맞을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백발백중이었던 건 내가 미래를 알기 때문도 당연 있었으니까.
하지만 고민도 잠시.
결정을 내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공작과는 달리 나르코스 세인츠는 초반부 대본을 읽으며 내가 내용이 더 없어서 아쉬움을 느낀 작품.
성공을 확신할 수 없더라도 나르코스 세인츠를 더 보고 싶었다.
실패해도 내 돈 나가지 남의 돈 나가나?
“저는 이쪽이요. 나르코스 세인츠, 이게 훨씬 더 좋네요.”
“윽. 이렇게 제 촉이 별로였다니.”
“네?”
“작가님이 고르신 거면 그게 무조건 더 잘될 거 아닙니까, 흐흐.”
“무조건이란 게 어디 있나요.”
“어디 있긴, 여깄죠. 아무튼 윤 감독에게 작가님 의견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윤 감독님이 제 말대로 이 작품을 선택하면 알려 주세요. 대본 더 써지면 그때 다시 한번 봐 보게요.”
“옙. 알겠습니다.”
“그런데 수리남이 어디죠?”
“아아, 저도 이번에 찾아봤는데 남미에 있는 나라랍니다. 브라질 위쪽에 있는데, 남미에서 가장 작은 나라라네요. 흐흐, 그러면서 저희 한국보다는 더 크고요.”
세계사 시간에 들어 본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수리남이라고 하니, 꼭 수리하는 남자 같은 느낌이었다.
이 얘기를 양 PD한테 해 볼까 하다가 참았다.
왠지, 이 말 듣고 양 PD가 웃어도, 안 웃어도 이상할 거 같았거든.
안 웃으면 갑분싸고, 웃으면 양 PD의 개그 코드와 내가 딱 맞는다는 거니까.
나와는 달리 양 PD는 이제 아재라 불러도 괜찮을 나이.
내가 생각한 저 드립은 절대로 아재 개그가 아닐 거다.
…흠흠,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