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마지막 마법사> 집필
호텔 방으로 돌아와 바로 노트북을 켰다.
불현듯 떠오른 영감.
이걸 쓰지 않고는 오늘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시작은 반더 왕국의 침공… 그로 인해 다시 난세가 시작되는 거지.’
2부에서 주인공이 대륙 전쟁을 종결지으며 시작된 평화.
그건 새롭게 반더 왕국의 왕이 된 빅터 3세로 인해 깨지게 된다.
형제들을 모두 숙청하고 절대왕권을 쥐게 된 빅터 3세.
패기 넘치는 젊은 왕은 다시 난세가 시작되길 원했다.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백만 명을 죽이면 정복자요.
만인을 죽이면 신이라.
신이 되고자 한 젊은 군주는 그렇게 대륙에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탁, 타다닥-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간 엉켜 있던 실타래가 머릿속에서 저절로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빅터 3세가 첫 침공을 시작했을 때.
그때만 해도 난세가 다시 시작될 거라 생각한 이들은 적었다.
하지만 빅터 3세가 일으킨 불씨는 그저 불씨에서 끝나지 않았으니.
대륙의 운명을 뒤흔들 만큼 거대한 화마가 여러 왕국을 덮치기 시작했다.
“급보! 급보요! 빅터 3세가 라이먼 왕국의 수도를 함락시켰답니다!”
“발토르는 어떻게 됐지?”
“그게… 수도 공방전에서 전사하시고… 며칠 전 장례까지 모두 치뤄졌답니다.”
“……?!”
라이먼 왕국의 국왕 발토르.
그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적지 않았다.
떠돌이 용병에서 시작해 용병왕의 자리에 오르고, 결국에는 한 나라를 건국했던 영웅.
그런 영웅을 살해한 정복 군주가 탄생했으니.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빅터 3세가 4부의 메인 빌런인 거지. 하지만 빌런이라고 빌런의 모습만 갖춰서는 안 되고.’
빌런의 매력은 단순히 어둠에서만 오지 않는다.
빅터 3세 또한 그랬다.
단지 추구하는 가치가 다를 뿐.
그 또한 영웅적 면모를 갖춘 한 명의 영웅.
4부의 첫 권에서는 그런 빅터 3세의 모습에 집중했다.
‘좋은 캐릭터가 탄생했어.’
개인적인 감상이기는 하지만.
빅터 3세가 1, 2부에서 메인 악역을 맡았던 이들보다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타다다닥-
하지만 결국 이야기를 이끌어 가야 하는 건 주인공인 법.
다음 권부터는 다시 그의 시점에서 글이 전개됐다.
죽어 버린 친우를 추모하며, 다가올 혼란을 대비하기 위해 다시 불러모은 옛 동료들.
‘독자들이 행방을 궁금해했던 캐릭터들이 있지. 1, 2부에서 등장했다가 3부에서는 사라졌던 캐릭터들. 그들이 여기서 재등장하는 거지.’
그 과정에서 과거에 뿌려 놨던 떡밥들도 풀어내기도 했다.
독자들 사이에서는 그저 맥거핀으로 활용한 게 아니냐 말했던 것들도 있었는데.
그런 복선들이 옛 동료들이 다시 나타나면서 자연스럽게 풀어진 것.
개중에는 정말로 회수할 생각 없이 맥거핀으로 뿌려 놓은 것도 있었지만, 이야기에 푹 빠져들어서 쓰다 보니 어느새 구상하지 않았던 이야기가 절로 나오며 그런 복선들을 풀어내기도 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4부의 길이가 길어지겠어.’
전체적인 뼈대와 주요 장면들은 미리 구상해 놨었지만.
그 사이사이를 채울 에피소드들은 쓰면서 떠올리는 게 내 방식.
그런데 계속해서 재밌을 것 같은 장면들이 떠올랐다.
물론 그러면서도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에도 집중을 놓지 않았는데.
그러다 보니 글을 쓰면서도 나 스스로도 즐거움이 느껴졌다.
내가 쓰는 이야기에 나 자신부터 몰입하게 되는 것.
마치 나도 <마지막 마법사>라는 세계를 살아가는 등장인물이 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결국에 다시 촉발된 대륙 전쟁…….’
원래 그런 운명이었다는 듯이.
모든 상황이 대륙 전쟁의 시작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빅터 3세가 대륙에 떠오르는 새로운 영웅이 되면서.
그와 같은 명성을 원하는 젊은 군주들이 병사들을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옛 시대의 영웅들이 희생당하기도 했다.
평화를 노래하던 숲속 현자는 죽어 길거리에 효수되었으며.
한때 짧게나마 주인공의 스승이었던 붉은 마탑의 주인은 또 다른 제자에게 배신당해 죽고 말았다.
3부에서 황금빛으로 물들었던 평야에는 어느새 참혹한 핏빛만이 가득했으니.
하지만 그 와중에도 희망의 빛은 꺼지지 않는 법.
“왕이시여! 제발, 이 대륙을 구원해 주소서!”
언젠가 주인공과 전투를 함께했던 늙은 병사.
그의 절규 어린 외침이 주인공에게 닿았을 때.
그 순간이 바로 4부의 본 내용이 제대로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타다다닥-
원래는 다음 날 해가 뜨기 전에는 잠에 들 생각이었는데.
떠오르는 이야기를 모두 썼는데도, 그다음 이야기가 저절로 머릿속에서 풀려 버리고 있었으니.
결국 잠을 포기하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밖에 없었다.
피곤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스스로도 만족스러운 장면을 써내었을 때 오는 통쾌함이 피로를 진작에 쫓아내 버렸다.
탁-!
그렇게 얼마나 집중해서 글을 쓰고 있었을까.
“후우우.”
엔터 키를 치는 걸 마지막으로 글 쓰는 걸 멈추고 지금까지 얼마만큼을 썼는지를 확인했다.
‘…허. 엘레나가 또 엄청 놀라겠는데.’
무려 4권에 달하는 분량.
그만한 분량을 화장실 몇 번 간 걸 제외하면 앉은 채로 쭉 써 버린 거였다.
* * *
사실 마음 같아서는 매일 글만 쓰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지.’
빠질 수 없는 몇몇 일정이 있었다.
우선 저택을 계약한 만큼, 짐도 호텔에서 저택으로 옮겨야 했다.
“오.”
“아시는 분인가요, 보스?”
“아뇨. 그건 아니에요.”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아는 거지.’
그 과정에서 로만과 잠깐 마주치기도 했는데.
당연하게도 나만 그를 알아봤다.
아무튼.
이사 외에도 크리스탈 팰리스의 프리 시즌 경기를 몇 번 보러 갔는데.
[프리 시즌, 심상치 않은 경기력을 보여 주는 크리스탈 팰리스. 파죽의 5연승?]
[비엘사의 전술? 혹은 이적 자원들의 활약? 이번 시즌, 수정궁의 기세의 이유는?]
[지난 3경기 모두 3득점 이상! 3-1, 4-3, 3-0! 화끈한 공격 축구로 팬들의 마음을 제대로 사는 데에 성공한 마르셀로 비엘사 감독!]
[비엘사 감독, “구단주가 영입한 자원들이 지난 3경기에서 넣은 골이 총 7골이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 구단주가 선수 보는 눈은 나보다 좋은 것 같다.”라고 밝혀 화제!]
-우리 구단주님을 로만 같은 병신과 비교했던 새끼가 대체 누구지? 하하.
└와; 웃긴 놈이네
└……?
└쟤 ID를 눌러서 지난 작성 코멘트들 봐 봐. ‘로만이 셰브첸코를 영입하며 첼시를 망쳐 놓던 게 떠오르네. 구단주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영입은 전문가들에게 맡기면 안 되는 거야?’라고 적혀 있는데?
└LOL. 이렇게 쉽게 바뀌는 태도라… 전형적인 축구 팬이로군.
└동의.
-바디와 마레즈는 비엘사 감독의 반대에도 구단주가 영입시킨 자원이랬지? Bugger! 다 이유가 있었군!
-특히 놀라운 건 버질 반 다이크야. 그가 벌써부터 수비진을 총지휘하는 거 다 봤지? 괜히 비싼 돈을 주고 네덜란드에서 데려온 게 아니라고!
└1 대 1 능력도 미친 수준이더만. 특히 지난 2경기에서는 그가 관여한 모든 장면에서 실점이 나오지 않았어.
-마샬 이 친구도 물건 같던데? 어쩌면 제2의 앙리가 될지도?
└앙리는 좀 선을 많이 넘는 것 같은데, mate?
└글쎄. 안토니가 지난 경기에서 보여 주던 드리블링을 생각하면 앙리는 아닐 지라도 그에 준하는 선수가 될 수 있을 거 같다고 봐.
‘응… 그건 아니야. 마샬이 좋은 선수이기는 해도 앙리는 무슨.’
웃기다고 해야 할까, 너무 희망적이라고 해야 할까.
조금 웃긴 댓글이 마지막에 있었지만, 어쨌든.
다행히 팬들의 반응이 꽤 호의적으로 돌아선 것 같았다.
모두 프리시즌 경기에서 크리스탈 팰리스의 성적이 무척이나 좋았던 덕분.
물론 많은 득점을 하는 만큼, 실점도 많이 하고는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공격 축구가 팬들 마음을 사는 데에는 최고지.’
1 대 0 승리와 4 대 3 승리 모두 1점차 승리지만.
화끈한 득점 장면들이 나오는 4 대 3 승리가 인기 면에서는 더 나은 법이었다.
어쨌거나-
“예, 여보세요.”
[영국은 어떠세요, 작가님?]
양진철 PD에게서 걸려 온 전화.
“음. 꽤 좋은 것 같아요. 일단 글이 잘 써지더라고요.”
[하하. 그건 제가 최근 들었던 것 중 가장 좋은 소식이네요. <마지막 마법사>를 쓰고 계신 건가요?]
“네. 4부를 집필 중인데… 벌써 거의 다 썼어요. 이야기가 가끔 안 풀릴 때면 그냥 집에서 나와 런던 거리를 산책하는데, 그게 꽤 도움이 되더라고요.”
원래 과거로 오기 전에도 글이 막힐 때면 산책을 하곤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내 얼굴이 많이 알려진 탓에, 어디를 함부로 걸어 다니고 그러지를 못했었는데.
외국에 오게 되니, 다시 산책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한 것.
[와… 출간 일정이 잡히면 저한테도 꼭 좀 알려 주세요. 그때까지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요.]
“이번에도 초판본 사인해서 보내 드릴 게요. 아, 스웜 론칭 준비는 어때요? 그거 때문에 전화하신 거죠?”
[당연히 완벽하게 끝마쳤죠. 홍보 팀에서 요새 열일하고 있습니다. 광고도 엄청 때리고 있고요.]
드디어 스웜의 정식 출범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에 따른 대대적인 홍보도 몇 주 전부터 한창이었는데.
[OTT 플랫폼이란? OTT 시장을 선도하겠다 밝힌 선우진!]
[단돈 5,000원에 수백 개 작품을 모두 볼 수 있는 플랫폼 등장?]
[선우진의 도전! 코리안 넷플릭스를 만들겠다? 스웜 론칭 임박!]
[스웜이 보여 주는 구독 경제란? 새로운 비즈니스 트렌드!]
-겨우 오천 원에 예전 영화나 드라마를 맘껏 볼 수 있는 건 엄청 좋네. 게다가 한 달 무료라며?
-오, 개꿀. 예전에 보다가 안 본 드라마들 많은데 ㅋㅋㅋㅋ 이거로 한 달 동안 다 보면 되겠다.
-뭐야 인기작들은 없을 줄 알았는데, 웬만한 작품들은 다 있네? 이거 어케 했누?
-판권 사 오는 데에만 수백억 썼을 듯 ㄷㄷㄷ
다만, 아직 대중들이 주목하는 건 스웜을 통해 기존 VOD 편당 결제를 통해 봐야 했던 작품들을 볼 수 있다는 점.
스웜의 오리지널 콘텐츠에 대한 관심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주남과 프런트, 무전기 등 자체 제작 콘텐츠들에 대한 홍보도 여러 번 진행했지만.
아직은 그냥 신작 드라마들이 함께 나오는 거구나 정도에 그치는 것이다.
‘뭐… 조만간 바뀌게 될 반응이겠지만.’
자신감은 충분했다.
우주남부터 시작해서 프런트, 무전기 등.
이미 사전 제작이 조만간 모두 완료되는 드라마들이 준비 중인 상황.
저 작품들이 함께라면 연기천재가 되었다가 일으켰던 열풍 이상의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내부 반응도 꽤 좋았고.’
우주남은 몰라도 프런트와 무전기 같은 경우는 원래라면 몇 년 후에 나오는 드라마들.
그래서 지금 시기 대중들의 취향과는 조금 멀 수도 있겠다는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직원들을 중심으로 내부 시사회를 열었었는데.
두 작품 모두 내부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게다가 국내 회사인 SW 프로덕션뿐만 아니라, 써밋 엔터테인먼트에서도 희망자를 대상으로 내부 시사회를 개최했었는데, 거기서도 두 작품 모두 호평을 받았었다.
해외에서의 흥행 가능성이 확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스웜 론칭이 일주일 뒤니까… 사흘 후에는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
돌아가서 스웜의 홍보를 위해서 관련 인터뷰도 하고.
4부의 마무리는 한국에서 지을 생각이었다.
* * *
[크리스탈 팰리스의 구단주, <마지막 마법사>를 쓴 선우?]
[베일에 가려져 있던 동양 자본의 정체. 크리스탈 팰리스를 인수한 한국의 소설가.]
[소설가가 축구 구단을? 이번 이적 시장 크리스탈 팰리스의 행보를 살펴 보다!]
-WHAT???
-<마지막 마법사>? 친구 놈이 읽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는데, 해리포터 같은 건가?
└Nope. 굳이 비교하자면 반지의 제왕 쪽이 가깝지. 해리포터보다는 더 성인을 위한 글이야.
-수정궁을 사들인 놈이 소설가였다고?
└소설가가 뭐 어때서. 석유 팔이도 구단을 사는 시대에 말이야.
-소설가건, 뭔 글을 썼건 상관없어. 그래서 쟤 만수르보다 돈 많아?
└만수르만큼은 당연 아니지. 그래도 많기는 엄청 많을걸? 구글링 해 보니 가지고 있는 출판사 1분기 매출이 수억 파운드라던데?
└와우! 그러면 됐어. 우리도 이제 드디어 슈가 대디 구단주를 갖게 됐군!
-중요한 건 저 글 잘 쓰는 구단주가 선수도 잘 영입한다는 거지! 내일 개막전을 잘 지켜보라고. 이번 프리시즌 경기를 보면서 나는 확신했으니까. 우리는 올 시즌 PL에 돌풍을 일으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