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역지사지
‘<마지막 마법사>의 100년 후 시간대… 이걸 상상하는 게 꽤 재밌네.’
아직은 2부가 나온 게 전부지만.
<마지막 마법사>를 어떻게 끝맺을 건지는 대충 윤곽을 세워 놓은 후였다.
하지만 그런 <마지막 마법사>의 막이 끝나고, 그 미래를 상상해 보는 건 또 처음.
그 때문일까.
100년 후 미래를 상상하는 게 퍽 즐거웠다.
‘<마지막 마법사>의 주인공은… 몇십 년 전 세상을 떠난 거로 하자.’
중세 시대를 기반으로 한 만큼, 마법을 익혔다고 수명이 늘어나는 세상은 아니었다.
그 어떤 대단한 영웅이라도 세월을 빗겨 나갈 수 없는 법.
절대적인 무력을 가졌던 <마지막 마법사>의 주인공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주인공이 죽게 되고…….
‘100년은 긴 시간이지. 그만한 시간이 흐른다면…….’
<마지막 마법사>의 주인공이 세웠을 제국.
주인공의 사후, 그 제국의 영광도 스러졌을지도 모른다.
원래 영웅의 죽음 후에는 많은 혼란이 있기 마련이다.
너무나도 뛰어났던 영웅으로 인해 유지되던 평화가 흔들리게 될 테니까.
그런 혼란한 세상 속 루크라는 자신이 만든 게임 캐릭터에 빙의해 버린 현대인.
그 현대인이 겪게 될 이야기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하드코어 게이머였던 주인공이 빙의한 루크는 일반 농노. 가진 건 뭣도 없는 탓에 써먹을 수 있는 건 소설과 게임에 대한 지식뿐.’
그동안 썼던 소설들과는 다르게 초반부터 구르게 되는 주인공이다.
하지만 현대 교육을 받은 주인공만이 떠올릴 수 있는 번뜩이는 재치와 게임과 소설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닥친 고난을 해결하는 루크.
‘<마지막 마법사>의 주인공은… 명예라는 가치를 귀족들에게 주입시켰지. 100년 후의 세상에서는 그걸 아예 신봉하다시피 하는 귀족들도 등장하게 될 거고. 그 점을 루크가 이용하는 거야.’
가진 힘이 적음에도 현대인의 재치와 지식을 통해 닥친 상황을 헤쳐 나가며 점점 성장하는 게 소설의 핵심.
처음부터 강했거나, 강해질 발판들이 충분했던 그간의 소설 주인공과는 달리, 이번 게임 빙의물은 고난 속에서 주인공이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여기서 나라면 어떻게 할까? 아마 중세인들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겠지. 이건 루크도 마찬가지일 거야.’
다른 사람들보다는 훨씬 진보적이었다지만 그래도 중세 시대의 사람이었던 <마지막 마법사>의 주인공과는 달리, 루크는 현대인의 정신을 가진 인물.
그 덕분에 나 스스로도 루크에게 더 몰입하기가 쉬웠다.
쓰는 내가 그런 만큼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터.
아마 <마지막 마법사>보다 더 쉽게 읽히는 글이 될 것 같았다.
‘쉽게 읽힌다고 마냥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글을 읽는 데에서 오는 피로감은 덜하게 만들 수 있겠지.’
물론 모든 부분을 쉽게 읽히게만 쓴 건 아니었다.
뭐든지 강약 조절은 중요한 법.
<마지막 마법사>와 어느 정도 세계관을 공유하는 만큼, <마지막 마법사>에서 느꼈던 격정적인 분위기를 기대하는 독자들도 있을 거다.
피로감 없이 쭉쭉 읽을 수 있는 글이 이어지다가도, 필요한 곳에서는 그런 독자들을 확! 잡아챌 만한 글을 쓰고자 했다.
‘게임과 소설의 지식을 이용해서 몰락귀족의 후예인 척도 하게 되고… 그걸 다들 믿게 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들도 있을 거야.’
처음에는 게임의 메인 에피소드와 최대한 엮이지 않으려 하던 주인공.
하지만 게임 속 지식을 활용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엮이게 되고.
그로 인해서 겪게 되는 새로운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탁, 타다닥-
타자 속도로 어디 가서 밀린 적이 없는데.
그런 내 손가락이 못 따라갈 정도로 이야기들이 샘솟았다.
이번 글은 철저히 주인공 위주로 흘러가는 소설.
주인공의 선택 하나하나에 따라 주위 인물들의 반응도, 그에 따른 스토리도 변화했다.
아무튼.
그렇게 얼마나 썼을까.
“후아.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오랜만에 느껴 보는 경험.
글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하루가 꼬박 지나 있었다.
‘아니, 오랜만이 아니라 이렇게 24시간 내내 글을 쓰는 건 또 처음인가?’
6시간이나 8시간 정도는 내리 집중해서 글은 쓴 적이 여러 번 있긴 한데.
이렇게 24시간이 통째로 지난 건 처음이었다.
왠지, 온몸이 쑤시다 못해 비명을 지르는 것 같더라.
20살의 팔팔한 신체가 이럴 정도면 내가 무리를 한 게 맞았다.
‘아예 진짜로 이 스토리대로 게임을 만드는 것도 재밌겠어. 소설을 읽는 독자들한테서 꽤 수요가 있지 않을까. 게임이 잘 만들어진다면, 그걸 플레이 한 사람들이 책을 찾기도 할 거고.’
뭐 그렇다고 내가 게임 회사를 차려서 직접 만들고 싶은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내가 게임을 꽤 좋아하는 편이기는 해도, 플레이 하는 게 좋은 거지 만드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언젠가는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 대신, 이번 소설을 출판했을 때 게임 제작 관련 제의가 온다면 수락할 생각이었다.
내 글이 영상화된 걸 봤을 때의 감상이 색달랐던 것처럼.
내 머릿속에서 나온 이야기가 게임이 되고, 그걸 플레이 했을 때의 기분도 꽤 색다르지 않을까.
톡, 토독-
[나 - 엘레나, 신작을 보냈으니 한번 확인해 주세요.]
[엘레나 - 그새 또 신작을 쓰셨다고요?]
[엘레나 - 으음, 작가님의 집필 속도를 고려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겠지만…….]
[엘레나 - 설마 이번에도 완결까지 다 쓰신 건 아니겠죠?]
에이, 엘레나도 참.
나를 무슨 글 쓰는 기계로 생각하는 건가?
[나 - 설마요. 하하.]
[나 - 오늘 쓴 건 5권 분량밖에 안 돼요.]
[나 - 완결은 10권 정도가 될 것 같으니 아직 좀 남았죠.]
나도 사람이다, 사람.
어떻게 그렇게 빨리 글을 쓰겠어.
* * *
며칠이 더 흐르고.
주식 투자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듣는다면 화낼 이유겠지만… 남는 돈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많아도 너무 많아.’
3~4억 달러 정도는 앞으로 있을 영화 제작비로 빼놓을 생각이다.
우선 그 돈으로 영화를 몇 개 만들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이후 영화를 제작할 생각.
그 외의 돈을 영화 제작에 투자하는 건 괜한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 정도 돈을 제외하더라도 십몇억 달러 정도가 남는다.
가만히 놔두기에는 너무나도 큰 금액.
‘우선 드러나지 않은 돈은 최대한 숨기자, 괜한 주목을 사는 건 좋지 않으니까.’
이번 지미 키멜 라이브를 통해 세간에 공개된 내 재산보다 두 배는 많은 돈이 여유 자금으로 있었다.
그걸 버진 아일랜드와 바하마 같은 유명한 조세 회피처들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서 숨길 생각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작가님. 그간 잘 지내셨죠?”
“네. 반가워요, 제이슨.”
이번에도 제이슨의 도움을 받았다.
물론 그전에 비밀 유지 계약서를 작성한 상태로.
처음에는 계약서까지 써야 한다는 것에 살짝 의아해했던 제이슨이었지만, 이후 내가 밝힌 금액에 입이 떡 벌어지듯 놀라는 그였다.
“허어… 막대한 돈을 버셨다는 건 듣긴 했습니다만… 이 정도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모두 작품으로 번 건 아니에요. 몇 번 크게 투자를 했는데 결과가 다행히 좋게 나왔었거든요.”
그 말에 나를 보는 눈빛에 감탄이 섞인 듯한 제이슨.
“…데브브라더스 때도 느꼈었지만, 투자 감각이 보통이 아니시네요. 제가 괜히 전문가라고 작가님 앞에 나서는 게 부끄러울 정도로요.”
“설마요. 저야 자본이 충분했으니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베팅을 할 수 있었던 거고, 그게 운 좋게 성공했던 건데요. 운이 아니라 실력으로 투자를 하는 제이슨과 비교할 수는 없죠.”
“하하. 이쪽 업계에서는 강한 운이야말로 최고의 실력이라 불립니다. 그런 면에서 작가님이야말로 한국 최고의 투자자이신 거죠. 한국에 숨겨진 부자가 많다지만… 작가님만 한 분은 없을 테니까요.”
1년 만에 10억 달러가 넘는 금액을 투자로 불린 거니, 제이슨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사실은 실력도, 운도 아니라 그저 회귀를 통해 번 돈.
그걸 가지고 이렇게 눈앞에서 나를 금칠해 주는 말을 들으니, 꽤 부끄러웠다.
아무튼.
제이슨을 통해 조세 회피처들에 여러 개의 투자 법인을 설립해 여유 자금의 대부분을 분산했다.
그러고는 페이퍼컴퍼니에 넣은 자금들을 애플과 아마존, 페이스북 등의 대형 기술주에만 투자해 달라 했는데.
“음. 주제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전부 기술주에만 투자하는 건 꽤 위험한 선택입니다. 채권이나 부동산 등, 여러 분야에 돈을 분산시키는 건 어떠실까요?”
제이슨에게서 이런 물음이 돌아왔다.
‘틀린 말은 아니지, 보통의 경우라면.’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건 금융시장의 오랜 격언이라지만.
그 바구니가 계란을 2배로 늘려 주는 마법 바구니라는 걸 보고 왔다면 얘기가 달랐다.
“조언은 감사하지만, 한동안 기술주가 뜰 것 같아서요. 그리고 채권이나 부동산 쪽은 제가 문외한이라서요. 원래 투자는 자기가 잘 아는 분야에 해야 한다고 그러잖아요?”
“음. 알겠습니다. 제가 주제넘었던 것 같군요.”
“아닙니다. 아, 테슬라도 잊지 말고 넣어 주세요. 비중은… 몇 년 내로 투자 자금을 빼는 것까지 고려했을 때 용이하도록 제이슨이 알아서 판단해 주시고요.”
그리고 사실, 이맘때에 뭘 투자해야 하는지 제대로 모르기 때문도 있었다.
과거로 오기 전, 이 시기의 나는 한창 배우의 꿈을 놓지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할 때라.
투자시장에서 뭐가 뜨는지, 부동산은 어떻게 되는지 같은 건 잘 몰랐다.
아는 거라고는 MAGA나 FAANG과 같은 거대 IT 기업들이 2010년대 후반까지 쭉쭉 성장만을 반복한다는 것.
그중 넷플릭스야 조만간 내 경쟁 회사가 될 테니 투자를 한다는 건 웃긴 얘기여서 뺐고.
다른 IT 기업들에 돈을 묵혀 놓으려는 거였다.
‘그리고 16년도쯤에는 다시 코인 시장에 뛰어들어야 하니까.’
게다가 내게 필요한 건 1~2년 후 코인에 재투자하기 전까지, 내 자금을 아무런 탈도 없으면서 어느 정도 늘려 주기까지 할 수 있는 곳이다.
더욱이 언젠가 코인 재투자를 위해 자금을 빼야 할 때도 생각해야 하니.
10억 달러가 넘는 금액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는 대형 기술주들만큼 적합한 투자 대상도 또 없었다.
‘이러고도 몇 억 달러가 넘게 남네.’
숨기려면 편법을 넘어 불법의 영역까지 도달해야만 하는 자금이 몇억 달러나 더 있었다.
물론 이것까지 투자로 굴릴 생각은 없었다.
예전 생각했던 것처럼 축구 구단을 인수해 선수들을 사들이거나, 그밖의 내 취미 생활을 위한 돈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글도 쓰다가.
괜히 투자한 기술주들 차트를 살피며 ‘오늘은 얼마를 벌었지?’ 같은 쓸데없는 짓도 좀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데미언 샤젤 - 위플래쉬가 완성되서 연락을 드렸어요! 조금 전 최종 편집을 끝냈는데, 한번 보실래요?]
영화 제작이 끝났다는 샤젤 감독의 연락이 왔다.
아니, 촬영에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나 - 벌써 작품이 완성됐다고요? 몇 주 전에 촬영에 들어간 거 아니었나요?]
[데미언 샤젤 - 네! 음… 정확히 8주 걸렸네요. 사실 10주 정도를 생각했는데 제작비가 넉넉해서 사람을 많이 쓸 수 있다 보니 2주나 단축이 되더라고요.]
8주?
영화란 게 그렇게 빨리 완성되는 거였나?
[데미언 샤젤 - 참고로 촬영은 총 19일이 걸렸고요.]
게다가 촬영이 19일 만에 끝났다고?
아니,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이게 가능한 건가……?
[데미언 샤젤 - 후, 작가님한테는 못 미치겠지만 저도 작업 속도가 빠른 편이라서요.]
‘…이게 이런 기분이었구나.’
그간 내가 ‘00권까지 다 썼어요! 한번 읽어 보세요!’ 하고 담당자들에게 원고를 보냈을 때.
그때의 담당자들 기분이 어땠을지 실감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