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신작 집필
“토크쇼는 재밌게 잘 봤습니다.”
“하하. 괜찮았나요? 가서 너무 제 홍보만 하고 온 건 아닌가 싶었는데.”
“전혀 그렇게 안 느껴졌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다행이네요. 아, 이 말을 먼저 해 드렸어야 했는데. 축하드립니다, 감독님.”
축하한다고 한 건 봉 감독의 이번 신작의 흥행 성과.
봉 감독의 신작이 개봉한 지 일주일.
그의 유명세 덕분인지, 아니면 4,000만 달러라는 한국 영화 역사상 최대의 제작비가 투입됐다는 점 때문인지.
벌써부터 손익분기점을 앞두고 있는 봉 감독의 신작이었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일일 84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관객 수가 동원됐을 정도.
“5일 만에 300만, 7일 만에 400만이었죠? 한국 영화 중 가장 빠른 관객 증가 속도라는 기사를 봤어요. 이대로면 천만 영화 가시는 거 아니에요?”
“하하. 그러면 참 좋겠네요. 하지만 천만 영화가 못 되더라도 만족합니다. 이미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으니까요.”
‘봉 감독님 신작이 천만을 찍었었나?’
그 언저리까지는 확실히 갔던 거 같은데.
천만을 넘겼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저도 작가님 소식을 접했습니다. 좋은 일을 많이 하셨더라고요.”
“뭘요. 대중의 사랑으로 큰돈을 번 만큼 베푼 건데요.”
정확히는 이거 안 하면 지랄할 놈들 있어서 미리 준비해 놓은 거지만.
속내를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그 이후로 신변잡기식 대화를 주고받다가, 봉 감독이 본론을 꺼냈다.
“이렇게 전화드린 건 제 작품의 미국 내 배급을 써밋 엔터테인먼트에서 맡아 주실 수 있나 해서요.”
“어? 와인스타인 컴퍼니와 계약해 미국 진출을 준비 중이라는 기사를 접했었는데요. 잘 안 된 건가요?”
“네. 영어권 버전으로 작품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맞지 않아서요.”
그 이후 이어진 봉 감독의 얘기는 이러했다.
외국영화를 미국에서 개봉할 때 엄청난 가위질로 유명해 가위손 하비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인 하비 와인스타인.
그가 영어권 개봉판에서 기존 분량의 20분 정도를 삭제해 달라 요청했다는 것.
당연 봉 감독 측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일 것이다.
그래도 배급사의 요청이니 어떻게 최대한 편집을 해 봤다는데, 나온 결과물이 봉 감독의 마음에 들지 않다 못해 최악이었다는 것.
결국 무삭제판으로 배급해 줄 걸 최종적으로 요청했는데…….
“리미티드 릴리스로 개봉된다고요? 게다가 영화 개봉과 동시에 DVD 판매를 시작하고?”
와인스타인 컴퍼니에서 돌아온 대답이 저랬다는 것.
리미티드 릴리스라 함은 일부 지역에 먼저 제한적으로 상영을 한 후, 흥행 추이를 보며 지역을 늘려 가는 방식을 뜻했다.
보통 인지도가 떨어지고 배급사 규모도 크지 않은 비주류나 소규모 영화의 상영에 쓰이는 방식.
와인스타인 컴퍼니면 꽤 큰 규모의 배급사라 볼 수 있는데, 굳이 이런 방식을 택한다는 건 봉 감독의 신작을 흥행시킬 생각이 별로 없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리미티드 릴리스에도 정도가 있는데, 이번 경우에는 첫 주에 개봉하는 극장 수가 고작 8개밖에 예정되어 있지 않단다.
‘미움을 단단히 샀나 보네.’
게다가 영화 개봉과 동시에 DVD 판매를 병행하겠다니.
아무리 미국에서 DVD 시장이 크다지만, 영화 흥행을 생각하면 절대 좋은 방식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무삭제판 상영을 고수하겠다는 봉 감독이 와인스타인 컴퍼니에게 미움을 산 모양.
그게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개봉 방식이었다.
“그래서 위약금을 내고 와인스타인 컴퍼니와의 계약을 해지하려고 준비 중인데요. 그 이후 써밋 엔터테인먼트에 미국 내 배급을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좋아요. 저희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죠.”
한국에서도 천만 가까이 흥행을 하게 되는 봉 감독의 신작.
게다가 내 기억으로는 미국에서도 매출이 꽤 좋았던 거로 알고 있다.
뭐, 봉 감독이 미국에서도 흥행을 기록하고 있다는 그런 기사를 언젠가 본 적 있는 것 같았다.
명색이 신문 기사인데.
국뽕으로 인한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아예 없는 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터.
이렇게 리미티드 릴리스로 개봉하는 건 몰랐지만, 봉 감독의 신작이 미국에서 어느 정도 흥행하게 되는 건 사실일 거다.
‘리미티드 릴리스로 개봉했어도 그 정도였다는 건… 제대로 준비해서 와이드 릴리스를 하면 더 흥행할 수도 있다는 거겠지.’
게다가 봉 감독의 신작이 흥행했을 때 누릴 수 있는 효과가 또 있었다.
마션의 메가폰을 잡게 될 그인 만큼, 미국 내에서 봉 감독의 인지도를 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
거기에 배급을 통해 얻게 될 수익까지 고려하면.
여러모로 봉 감독과 내가 윈윈할 게 많은 제안이었다.
“그러면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미국 여행 잘하시고요.”
“네. 한국에 돌아가면 한번 봬요.”
봉 감독과의 통화를 끝낸 후, 맥주 한 캔을 들고 거실로 갔다.
‘이미 한번 본 적 있는 경기지만, 명경기인 만큼 다시 볼 가치가 충분하지.’
TV를 켜고 채널을 돌리자 보이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이제 막 선수단을 비춰 주며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위르겐 클롭 감독의 부임 이후 예전의 명성을 되찾다 못해 지난 시즌 리그 2연패에 DFB-포칼까지 우승하며 더블을 달성한 도르트문트.
몇 년간의 암흑기 끝에 올 시즌 제대로 각성해 리그 우승 트로피를 도르트문트에게서 되찾고, 지난 챔스 4강에서 총합 스코어 7 대 0으로 바르셀로나를 꺾은 전통의 강호 바이에른 뮌헨.
두 팀의 대결이었다.
‘슬슬 축구 구단도 인수해야 하는데.’
생각해 보면, 회귀 이후로 쭉 일만 해 온 나다.
남들은 몇 년은 쓸 법한 분량의 글을 1년 만에 쓰고, 영화 제작 사업이라는 처음 도전해 보는 분야에 도전하고 있기도 했고.
회귀한 지 1년 조금 넘었을 뿐인데 한 일도, 벌인 일도 무척이나 많았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취미 생활이 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물론 소설을 쓰는 것도 어느 정도 내 취미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인 만큼 가끔 가다 지칠 때가 있었다.
‘게다가 돈만 잔뜩 벌어 놓고 제대로 쓰지도 못했으니까.’
여태껏 20억 달러를 넘게 벌었는데.
나를 위해 쓴 돈이라고는 그중 10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슈퍼카 몇 대, 한국과 미국에 가끔씩 머물 용도로 산 집 몇 채 정도가 전부.
슬슬 나를 위한 보상을 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꿀꺽-
“크으. 맥주 맛있네.”
아무튼.
구단 인수를 생각하면서 축구 경기를 봐서인가?
이미 과거에 본 적 있는 경기인데도, 새롭게 느껴졌다.
특히 나중에는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지만, 지금은 도르트문트에서 뛰고 있는 레반도프스키.
저 선수가 내 구단의 선수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이 들었다.
‘뭐, 당장에 EPL 빅 4급 구단을 인수하는 게 아닌 이상 아무리 큰돈을 준다 해도 레반이 오려고 하지 않겠지만.’
레반 정도의 선수를 사려면 돈 하나로는 부족했다.
구단의 명성은 물론, 챔피언스리그 출전 여부나 우승 가능성 등이 더욱 중요한 요소.
하지만 그렇다고 빅 4급 구단을 인수하는 건 별로 땡기지 않는다.
원래 뭐든지 밑에서부터 올라가야 재밌는 법.
가뜩이나 10년 내로 성공할 유망주를 대부분 꿰고 있는 나인데.
시작 난이도가 너무 쉬우면 그건 또 그것대로 문제였다.
‘1부 하위권이나 2부 리그에서 시작이 좋긴 하지.’
사실, 축구 구단의 인수는 이미 진행 중에 있었다.
이번에도 제이슨을 거쳐 사람을 구했는데, 그와 함께 스탠다드 차타드에서 근무했던 션이라는 사람이었다.
스탠다드 차타드가 영국계 은행인 만큼 영국 축구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
실제로 스탠다드 차타드가 리버풀 FC와 스폰서 계약을 맺을 때 그걸 주도했던 인물이라고 했다.
아무튼.
인수 대상으로 물망에 오른 구단은 총 두 개.
하나는 크리스탈 팰리스였고.
다른 하나는 리즈 유나이티드였다.
‘인수가와 현재 상황만 놓고 보면 크리스탈 팰리스를 사는 게 맞는데.’
리즈 유나이티드 현 구단주의 매각 희망 금액은 약 3,000만 파운드(약 500억 원) 정도.
크리스탈 팰리스는 그 3배인 1억 파운드(약 1,500억 원) 정도였다.
7,000만 파운드라는 금액의 차이가 있지만, 영국의 2부 리그인 챔피언십에서 뛰고 있는 리즈 유나이티드와는 달리 크리스탈 팰리스는 이번 시즌 승격에 성공했다.
다음 시즌부터는 1부 리그에서 시작하게 되는 것.
2부와 1부의 차이면 7,000만 파운드의 값어치를 하고도 남았다.
게다가 크리스탈 팰리스는 연고지가 런던인 구단.
인프라 덕에 선수들과 그 가족들의 선호도가 다른 도시에 비해 런던이 압도적으로 높은 만큼, 사실 뭐로 보나 크리스탈 팰리스를 인수하는 게 맞았다.
‘딱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리즈는 감성값이 남다르다는 건데…….’
리즈 시절이라는 유행어가 있을 정도로, 한때는 유럽을 호령했던 클럽이었던 리즈 유나이티드.
거기에 몇 년 후 있을 비엘사 감독의 매력적인 공격 축구로 생긴 내 팬심이 더해져서인가.
이성적으로는 크팰을 택하는 게 맞지만, 자꾸 리즈가 끌린다.
삑, 삐익, 삐이익-!
그렇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결국 뮌헨의 승리로 끝나고 나서.
‘일단 책을 쓰자.’
나는 오랜만에 노트북을 폈다.
영화용 시나리오를 위해 급하게 썼던 SF 소설을 빼면, 새로운 소설을 쓰는 것도 꽤 오랜만의 일.
그래서인지 쓰고 싶은 내용이 마구 떠올랐다.
‘신작은 게임 빙의물 느낌으로 가 보자. 10년차 게이머가 자신이 플레이 하던 게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임 빙의물은 몇 년 후 웹 소설 시장에서 꽤 유행하는 장르.
하지만 온전히 한국이 원류인 소설은 아니다.
게임 속으로 들어가는 건 게이머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 봤을 법한 상상.
그래서인지 지금 시기의 서양 판타지에도 이미 존재하는 장르였다.
심지어 꽤 수요도 있었다.
탁, 타다닥-
‘배경은 <마지막 마법사>의 세계관으로 해도 재밌겠는데……?’
처음에는 아예 다른 소설을 쓰려고 시작했지만.
어쩌다 보니 꼭 <마지막 마법사>의 100년 후 세계관을 차용해 글을 쓰고 있게 됐다.
그렇다고 <마지막 마법사>의 3부를 쓰는 건 아니고.
주인공은 물론 글의 주제 등도 천지차이인 다른 소설이었다.
그저 세계관을 조금 차용했을 뿐.
‘억지로 이야기를 비틀기보다는… 그냥 스토리가 떠오르는 대로 써 보자.’
머릿속에서 저절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연결되고 있다.
그걸 굳이 막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글을 쓰면서 느낀 건데.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집필 방식은 지금처럼 그냥 떠오르는 스토리를 자유롭게 풀어 나가는 거였다.
대신, 그 탓에 초반부를 조금 수정해야 했다.
주인공이 그냥 게임에 빠지는 게 아니라, 몇 년 전 엄청나게 유행한 적이 있는 판타지 소설을 게임화한 작품에 빠지는 거로.
‘<마지막 마법사>의 독자들도 좋아할 법한 에피소드를 살짝씩 넣는 것도 좋겠어…….’
만약 <마지막 마법사>를 몇 번이나 읽었던 독자라면 알아볼 수 있을 법한 흔적들.
이야기의 흐름에 영향이 가지 않는 선에서 그런 걸 글 곳곳에 숨겨 두었다.
독자들은 때때로 이런 자그마한 흔적들을 찾는 거에서 재미를 느끼기도 하는 법이니까.
‘주인공은 게임 속에 떨어졌지만 아무런 특전도 얻지 못한 거지… 대신 소설과 게임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게 전부인 거고. 그걸 활용해서…….’
탁, 타다닥.
키보드를 누르는 손가락이 빨라졌다.
게임 빙의물은 원래부터 내가 꽤 좋아하던 장르.
물론 완전히 웹 소설식의 게임 빙의물과 같지는 않지만, 머릿속에서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절로 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