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동상이몽
“…….”
언젠가 봤던 다큐 프로가 떠오른다.
그 제목이 뭐더라.
심마니의 삶 어쩌고 같은 거였는데.
아무튼 거기서 계속된 산행에도 산삼을 찾지 못하던 심마니 아저씨가 결국 포기하고 산을 내려가려는 찰나, 내려가는 길에 족히 100년은 되어 보이는 초대형 산삼을 발견하고 이렇게 외치더라.
‘시, 심 봤다-!’
그때 100년짜리 산삼의 가치가 몇 억은 된다 해서 참 부러워했었는데.
텐센트가 말하는 ‘작가님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의 금액’은 대체 얼마일까?
하지만 나는 절로 나올 거 같은 웃음을 최대한 참았다.
우진아, 우진아.
슬픈 생각… 슬픈 생각을 떠올리자.
“검객무쌍의 영화화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얘기를 들었다는 듯한 표정.
그래서 큰 고민이 된다는 듯한 표정.
최대한 그런 표정을 따라하며 입 주위를 매만졌다.
“으음. 물론 작가님께서도 힘든 결정이실 줄 압니다. 검객무쌍은 이미 그 가능성을 보여 준 IP. 당연히 작가님의 손으로 제작하고 싶으시겠죠.”
렌샤오의 반응을 보면 그런 내 표정 연기가 통하는 거 같은데.
후우, 드디어 내 거지 같던 연기력이 처음으로 도움되는 상황인가?
꿀꺽-
하지만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을 거 같아 애꿎은 차만 들이켰다.
내 입꼬리야, 가만히 있어.
지금 씰룩이는 거 아니야.
“하지만 저희도 쉬운 생각으로 영화 제작에 참여하려는 건 아닙니다. 우선 저희가 준비한 제작진들을 설명해 드리면…….”
그래도 다행히 내 연기가 제대로 통한 거 같았다.
어떻게든 나를 반드시 설득하고 말겠다는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가는 렌샤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가 뭐라고 하는지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계약을 진행 중인 영화감독이 중국에서 몇 개의 무협 영화를 만들었고, 어떤 상을 탔다는 둥의 얘기를 하고는 있는데.
사실 내가 왕가위 감독 말고 아는 중국 영화감독이 있어야 말이지.
‘왕가위 감독은 힘드려나?’
왕가위 감독은 90년대 아시아 영화의 아이콘이나 마찬가지인 감독.
그가 메가폰을 잡는다면 검객무쌍 영화가 그저 중국 내에서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꽤 먹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따지고 보면 왕가위 감독은 대중적인 감독은 아니지.’
하지만 그런 고민도 잠시.
예전에 내가 중경삼림을 너무 감명 깊게 봤던 탓에 생긴 팬심을 빼고 생각해 보면, 검객무쌍에는 딱히 어울리는 감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흥행을 위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뭐 중국 사람이 아니라 홍콩 사람이기도 했고, 하여튼.
“그리고 무협 영화에 가장 중요한 CG. 저희가 최근 할리우드의 CG 회사를 하나 인수해…….”
날 설득하기 위한 렌샤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었다.
물론 내가 듣고 싶은 내용은 아직 들리지 않고 있었지만.
“…….”
으으, 이걸 그냥 까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아니, 그래서 얼마 주실 거냐고요, 렌샤오 씨.
…라고 속으로 불평을 한 다섯 번은 했을 때쯤.
그런 불평이 겉으로 드러나기라도 한 걸까?
나를 바라보는 렌샤오의 시선이 복잡했다.
그러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눈을 한번 질끈 감고는, 품속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건넨다.
“흠흠! 그러면 작가님. 판권 계약금으로 혹시 이 정도의 금액은 어떠십니까?”
서류를 받아 본 내 시선이 곧바로 향한 것은 아래쪽에 쓰인 판권 계약금.
“……?!”
이번에는 표정 관리가 살짝 힘들 뻔했다.
내 눈이 절로 크게 떠질 만큼의 액수가 적혀 있던 탓이다.
아무튼.
‘흐흐.’
그래, 이거지.
요새 웨스턴 머니 꿀맛에 취할 대로 취하고는 있었지만, 원래 내게 있어서 원조 꿀통은 차이나 머니였다, 이거야.
* * *
“작가님, 들어가십쇼!”
“네. 담에 봬요.”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렌샤오를 뒤로 하고.
나는 자리를 나서며 그간 어떻게든 무표정을 유지하던 입꼬리를 맘껏 씰룩거렸다.
피식-
나도 모르게 계속 웃음이 튀어나온다.
세상에 신이란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꽤 공평한 존재일 것임이 틀림없다.
조금 전 FM을 할 때만 해도 세상이 나를 억까하는 것 같았는데.
몇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 정반대의 상황이 된 것 같았다.
‘그냥 밥이나 오랜만에 얻어먹으러 나왔는데.’
돌아갈 때는 엄청난 액수의 판권 계약금과 최상급 대우의 로열티 계약을 얻게 되었다.
정말 이게 웬 떡이냐 싶은 심정.
게다가 계약이 끝나고 그 이후 또 칼넘강의 유통 계약에 대해서도 넌지시 떠보던데.
그때도 언급하던 계약금의 액수가 정말 상당하더라.
이미 완결이 난 지 꽤 된 칼넘강이 이토록 효자 노릇을 하다니.
회귀 후 두 번째로 쓰는 소설의 장르를 무협으로 선택했던 내 자신이 참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래도 전 세계적으로 따지면 판타지가 최고이기는 했지만.
‘하도 출판사에서 2부가 잘 뽑혔대서 흥행을 기대하기는 했는데… 그 기대를 한참이나 뛰어넘어 버렸단 말이지.’
<마지막 마법사>는 조만간 전체 시리즈 판매량 1억 부를 달성할 것 같았다.
언젠가는 달성하리라 생각은 했지만, 그보다는 한참이나 이른 시점.
내가 조만간 1억 부 클럽에 들어갈 거라는 게 감회가 남다르면서도 신기했다.
‘조만간 미국에 다시 가야 하려나.’
그런 흥행 덕분인지, 윅슨 출판사를 통해 엄청난 인터뷰 제안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미국의 메이저 신문사들부터 해서 소설 관련 잡지들까지.
하루에만 수십 개의 인터뷰 제안이 들어온단다.
뭐 그런 거야 중요한 곳 몇 개만 골라 온라인으로 문답을 주고받아도 됐다.
진짜 중요한 건 인터뷰가 아니라 토크쇼 출연 제안.
저번 한국에서의 예능 출연 이후, 예능은 이제 좀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미국의 유명 토크쇼는 얘기가 좀 달랐다.
세계적인 파급력이 엄청난 덕에 그런 곳에 출연을 한번 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얼굴 한번 비추고 짖궃은 질문 몇 번 답해 주는 것만으로 수백억 원 가까이를 벌게 되는 거다.
‘가서 소설 홍보도 하고… 조만간 제작에 들어갈 영화 홍보도 좀 하고.’
게다가 마션을 제대로 성공시키려면 내가 발로 뛰는 것도 마다하지 말아야 했다.
아무튼.
워너 브라더스 놈들의 코를 한 대 때려 줄 때가 머지않은 것 같았다.
아니, 지금 상황만 보면 코 한 대 때리는 게 아니라 묵직한 리버 블로우가 될 것 같기도?
* * *
선우진이 떠나고 난 뒤.
그제야 긴장을 푼 듯한 얼굴의 렌샤오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매만졌다.
협상이 끝나면 전화를 달라는 쑨퀀의 연락이 와 있었다.
띠-
국제전화임을 알리는 통화 연결음이 제대로 울리기도 전에.
[음! 어떻게 됐나?]
어느새 전화를 받은 쑨퀀이 그렇게 물었다.
렌샤오가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의자에 몸을 깊게 뉘이며 답했다.
“후. 잘 마무리됐네. 다행히 작가님께서 우리 제안을 받아들이셨어.”
[오오! 축하하네.]
“여전히 조금 무리한 부탁을 드린 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그래도 작가님께서 우리를 믿어 주신 거니, 최대한 보답해 드려야지.”
[그럼,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그로서는 혹시나 싶은 마음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술술 풀리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선우진과의 판권 계약이었다.
텐센트 내부에서는 선우진이 자신의 영화 제작사를 차리려는 거니 검객무쌍의 판권을 내주지 않을 거라는 의견이 정론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검객무쌍을 직접 유통하고 있는 텐센트 문학의 CEO인 쑨콴은 혹 작가님께 무례한 제안일 수 있으니 아예 프로젝트를 엎는 게 어떠겠냐는 말까지 했을 정도다.
“그리고 나만 축하할 일은 아닐세. 영화화 계약 얘기가 끝나고 검객무쌍의 유통 관련해서도 지나가듯 말을 꺼내 봤는데… 반응이 꽤 긍정적이셨어.”
[허어! 그거 정말인가? 그것참 잘됐군! 잘됐어!]
렌샤오의 전언에 뛸 듯이 기뻐하는 쑨퀀.
그런 기색이 통화 너머로까지 느껴진다는 것에 렌샤오가 피식거렸다.
‘쑨퀀의 걱정이 엄청 많았었지.’
생각해 보면 꽤 웃긴 일이었다.
텐센트만 한 회사가 작가 한 명의 눈치를 봐?
하지만 중국에서의 선우 작가의 위치를 고려해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선우 작가를 텐센트문학으로 영입하고 채 1년도 되지 않은 상황.
하지만 그 짧은 기간 사이에 텐센트문학은 벌써 업계 2위로 발돋움했다.
그 모든 건 선우 작가의 <마지막 마법사> 덕분이다.
출간과 동시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기존의 업계 2위 플랫폼을 바로 밀어내 버린 것.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그런 텐센트문학의 약진에도 여전히 샨다문학을 따라잡을 수 있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도 선우 작가 때문이었다.
<마지막 마법사>도 <마지막 마법사>지만, 아직은 샨다문학에서 유통되고 있는 검객무쌍의 매출이 도무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중국 웹 소설 시장의 크기는 현재 50억 위안(약 8천억 원)가량.
거기에 장르 문학의 종이책 시장을 합하면 그 몇 배나 되는 크기에 달한다.
그런데 그런 커다란 시장이 고작 작가 한 명의 작품이 어디에 속해 있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금 의문점이 있기도 하네.”
[의문점? 무슨 의문점을 말하는 건가?]
“흐음. 자네도 알다시피 워너 브라더스면 텐센트와는 비교할 수 없는 회사이지 않나.”
[그건 그렇지.]
최근 할리우드에는 선우 작가가 <마지막 마법사>를 영화화하고 싶다는 워너 브라더스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워너 브라더스는 수억 달러짜리 블록버스터를 매해 뽑아내는 메이저 제작사.
그리고 모회사의 자본금이 상당하지만 이제 막 영화 제작에 진출하려는 신생이나 다름없는 텐센트.
텐센트의 주력 분야로 비교하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영화 제작에 있어서는 텐센트와 워너 브라더스의 차이는 감히 비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그런 워너 브라더스의 제안은 거절해 놓고, 텐센트의 영화화 제안은 받아들인 것이다.
렌샤오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다행인 일이기는 해도, 선우진의 선택에 의문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작가님은 워너는 거절하셔 놓고, 우리의 제안은 받아들이신 거지? 심지어 자체적으로 영화 스튜디오를 차리실 생각까지 가지고 계신 거 같은데.”
렌샤오가 그런 의문을 입밖으로 꺼내자.
[…흐흐. 이 사람 하고는.]
통화 너머로 쑨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아직도 그걸 모르겠냐고 묻는 듯한 말투.
[자네, 진정으로 몰라서 묻는 건가?]
“……?”
[허어, 이거 참. 잘 들어 보게나. 작가님이 본인이 차리실 제작사를 놔두고 검객무쌍을 우리에게 맡기는 이유가 뭐겠나? 바로 작가님께서 우리에게 라오펑요우를 넘어 슝띠의 은(恩)을 베푸신 게지! 작가님께 감사하라고.]
슝띠(兄弟, 형제)라 함은 꽌시의 최종적인 단계.
도원결의를 통해 의형제 관계를 맺은 유관장 삼형제처럼, 친구를 넘어 서로를 가족과도 같이 여기는 단계를 일컬었다.
서로에게 무엇을 내주더라도 아까워하지 않을 사이.
그러니까 지금 쑨퀀의 말은 마치 가족에게 제 콩팥 한쪽을 나눠 주듯, 선우진이 렌샤오를 포함한 자신들에게 그 정도의 은혜를 베풀었다는 뜻이었다.
쑨퀀의 말에 그제야 이해하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렌샤오.
“허어……! 듣고 보니 자네 말이 맞군!”
[물론 작가님께서 그러셨다고 나나 자네가 작가님과 진정으로 슝띠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안 될세. 이건 일방적으로 작가님께서 베푸신 거니까 말이야.]
“무슨 당연한 소리를. 내가 그리 염치없는 인간으로 보이는가?”
[하하. 혹시나 해서 한 말일세. 아무튼, 우리가 앞으로 무얼 해야 하는 건지 알겠지?]
“으음, 그럼!”
‘실로 각골난망인 이 은혜를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지.’
진짜로 선우진이 그런 생각으로 영화화 판권 계약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렌샤오와 쑨퀀은 선우진이 그런 의도였으리라는 데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같은 밥을 먹으며 같은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이 서로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