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신드롬의 시작
흠흠.
언젠가 느꼈던, 그때의 감동이 떠오른다.
물론 나도 처음에는 흔하디흔한 하남자에 불과했다.
레알, 바르샤, 첼시, 리버풀 등.
스쿼드도 잘났고 돈도 빠방하게 지원해 주는 빅 클럽에 들어가 리그 우승, 컵 대회 우승,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라는 트레블을 달성하면 새 게임에서는 다른 빅 클럽으로 넘어가던 하남자.
하지만 그건 FM(Football manager) 플레이 타임이 고작 300시간에 불과했을 때의 일.
플레이 타임이 쌓이고 난 후의 나는 달랐다.
강팀 따위는 고르지 않는 상남자로 성장한 것.
빅 클럽이 아니라 1부 리그 중위권 팀, 그다음에는 하위권 팀, 그다음에는 2부 리그 팀 등.
1,000시간을 넘었을 때는 4부 리그 팀에서부터 시작해 5년 만에 트레블을 달성했던 경험도 있었다.
아무튼.
‘그때의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는 건가?’
물론 FM에서 그랬던 것처럼 4부 리그 팀을 사들인 후 키울 수는 없었다.
그거야 FM에서의 1년이 현실에서는 며칠 되지 않았을 때의 얘기고.
3~4년이라는 시간을 함부로 허비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2부 리그 구단, 아니면 EPL 하위권 팀 정도.’
아마 그 정도가 최선일 거다.
둘 중에서 또 고르자면 2부 리그 구단이 더 땡기기는 한다.
구단 인수 가격도 가격이거니와, 개인적으로도 2부 리그에서부터 승격 후 EPL에서까지 돌풍을 일으키는 그림이 좋아 보였던 것.
탁, 타다닥-
우선 작성해야 할 건 유망주 노트.
사실, 축구에서 유망주라는 게 정말 한 치 앞을 모르는 복권과도 같았다.
유소년 시절 엄청나게 대단한 포스를 보여 주며 최소 메시 소리를 듣던 이들도, 성인 무대에서 별다른 활약 없이 그저 그런 선수가 되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았던 것이다.
아니면 성인 무대 데뷔 후 유망주 시절 포스를 이어 가다가도, 워크 에식이나 멘탈리티 등의 문제로 어린 나이의 성공에 너무 취해 버려 폼이 망가져 버리는 경우도 있었고.
그렇기에 유망주가 복권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당첨 확률이 확실해 보여서 긁어 봐도, 꽝이 떠 버리고는 하니까.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내가 알고 있는 8년 후까지의 미래.
전직 축구 소설 작가답게, 나는 그 8년 사이에 대성하는 축구 선수를 대부분 다 알고 있었다.
‘음바페, 홀란드부터 시작해서 돈나룸마, 페드리 등등 다 싸그리 영입하는 거지.’
뭐 개중에서 이미 유소년 때부터 미친 활약으로 엄청난 몸값을 자랑하는 선수들도 있겠지만, 얼마에 사든 남는 장사가 될 거다.
그리고 사실 저 중 한두 명만 영입할 수 있어도, 그것만으로도 미친 성과일 거다.
아무튼, 축구 구단 인수는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고.
[엘레나 - 작가님, 출판 일정 확인하셨죠? 다음 주부터 두 달간 1권부터 8권까지 연속으로 출판될 예정입니다.]
<마지막 마법사>의 2부 출판 일정이 확정됐다는 연락이 왔다.
총 8권이니, 첫 주에는 1, 2권이 동시 출판되고 그다음부터는 일주일에 한 권씩 출판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꽤 놀라웠던 것이.
[엘레나 - 그리고 판매 부수 4,000만 부 달성하신 거 축하드려요! 물론 조만간 1억 부를 찍게 되실 테니, 이른 축하이긴 하지만요.]
<마지막 마법사>의 총판매량이 그새 엄청나게 늘어 버렸다.
1부가 4,000만 부나 팔린 건 아니었고, 1부의 판매량과 2부의 선주문량이 합쳐져 4,000만 부가 된 것.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놀라운 기록이었다.
1부가 지금까지 팔린 게 어제자 기준으로 2,500만 부 정도였으니.
아직 나오지도 않은 2부를 서점들에서 1,500만 부나 미리 주문했다는 뜻이었다.
‘여기에 수익금을 가상 화폐로 늘리면… 올해 말부터는 돈이 부족할 일이 평생 없겠어.’
* * *
캘리포니아, 윅슨 출판사.
“윌, 아까 전 캐나다 쪽 유통사에서 전화가 왔어. 주문량을 수정하고 싶다던데.”
“그래? 물론 더 늘리는 쪽이겠지?”
“내가 일이 너무 바빠서 거기까지는 확인하지 못 해 확실하지는 않지만, 뉘앙스만 보면 그런 거 같아. 한번 전화해 봐.”
<마지막 마법사>의 출판 준비를 앞두고.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직원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2부의 선주문량만 벌써 1,500만 부.
심지어 그것도 실시간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난리야. 영어권이랑 다른 나라에서는 다음 주 출판인데 왜 자신들은 한 주나 더 기다려야 하냐고.”
“젠장. 번역가 놈들이 쌍으로 펑크를 낸 걸 우리 보고 어떡하라고.”
“그러니까 미칠 노릇이지. 으으, 이렇게 일이 많을 줄 알았으면 이직하는 게 아니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면, 과거로 돌아갔다면 스카우트 제의를 받지 않았을 거다?”
“으, 그냥 하는 말인 거 알잖아. 이 정도 연봉을 주는데 어떻게 안 받겠어. 그냥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니까 불평 좀 한 거야.”
나름 출판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들로서도 꽤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아직 나오지도 않은 2부를 가지고 이렇게 온갖 곳에서 난리를 치는 건 참으로 이례적인 일.
<마지막 마법사>의 1부가 그만큼 독자들을 사로잡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1권과 마지막 권의 판매량이 거의 동일하다고 했지. 이렇게 난리인 것도 이해가 불가능한 건 아니야.’
소설의 판매량이라 함은 1권의 판매량이 마지막 권보다 훨씬 더 높기 마련이다.
대부분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있으면 궁금증에 1권 정도는 쉽게 구매하지만, 취향에 맞지 않으면 다음 권 구매까지 이어 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마법사>는 특이하게도 1권을 구매한 독자들의 충성도가 얼마나 높은 것인지, 1권과 마지막 권의 판매량이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 마법사>가 보통의 영미권 소설과는 달리 엄청난 장편소설인 걸 감안하면,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몰입력 있는 스토리와 전체적인 이야기 흐름에서 매 순간 다음 내용을 궁금하게 만드는 선우진의 글 쓰기 방식이 마지막까지 읽지 않고 못 배기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게 바로 무려 1,500만 부나 되는 선주문량의 이유였다.
그런 특이점을 파악한 전 세계의 서점들에서 2부의 판매량도 엄청날 것이라 예상한 것.
일단 들여만 놓으면 모두 팔 수 있을 테니, 다른 서점들이 다 팔아 버리기 전에 너도나도 앞장선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모두 함께 하는 바람에 1,500만 부나 선주문량이 밀려든 것이었다.
실제로 1부가 완결됐을 때도 출판사에 걸려 온 전화가 한두 통이 아니었다.
잔뜩 다음 내용을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1부를 완결 내 버리는 바람에 2부를 찾는 독자들의 원성이 보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번 달에는 그래서 2부가 대체 언제 나오냐는 전화에 응대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다 갔었으니까.’
그때는 정말이지 전화 지옥이었다.
자세한 일정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조만간 나올 예정이니 조금만 기달려 달라는 말을 하루에 수백 번은 해야 했다.
똑같은 말을 수백 명의 사람에게 해야 하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그때에 비하면 한창 출판을 준비하는 지금은 더욱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한차례 고생을 하고 나면 떨어질 인센티브가 기대되기도 했고.
‘놀라운 소설이기는 해. 인쇄 오류를 찾기 위해 읽어 봤다가, 나도 모르게 밤을 꼬박 새 버렸으니까.’
심지어 그렇게 홀린 듯 2부를 읽었던 그는 <마지막 마법사> 1부를 읽지도 않았던 이였다.
그냥 연봉을 몇십 퍼센트나 높여 준대서 윅슨 출판사로 이직했고, <마지막 마법사> 관련 업무를 맡은 거였는데.
오류를 찾기 위해 2부를 읽기 시작했다가 그대로 완결 권까지 쭉 읽어 버린 것.
1부를 보지 않았음에도 몰입하게 만드는 미친 흡입력이었다.
물론 지금은 <마지막 마법사>의 1부 전권을 3부나 구매한 상태인 그였다.
하나는 소장용, 하나는 읽기용, 하나는 포교용으로.
* * *
일주일 후.
[전설이 시작된다, <마지막 마법사> 2부 출간!]
<마지막 마법사>의 1부는 지금까지 2,500만 부를 판 소설.
전체 판매량으로 보면 꽤 대단한 기록이기는 해도, 권당 판매로 보면 그렇지 않았다.
1부 전권이 10권이 넘는 걸 생각하면 권당 200만 부 남짓 팔렸다는 뜻.
최근 몇 년간 출판업계에서 가장 성공한 소설인 ‘50가지 그림자’의 첫 권이 출간 3달 만에 전 세계에서 3천만 부나 팔렸던 걸 생각해 보면, 권당 200만 부라는 건 꽤 초라해 보이기도 하는 판매량이었다.
중세시대에 기반한 배경과 판타지가 결합한 소설인 탓에 아직까지 <마지막 마법사>는 메인스트림에서 소비되는 소설이 아니라 마니아들만 찾는 소설이었던 것.
실제로 피터 잭슨의 인터뷰에 따라 <마지막 마법사>를 찾았던 이들도 이런 판타지 작품을 좋아하는 마니아가 대부분이었다.
반지의 제왕의 영화감독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그런 감독의 차기작까지 찾아볼 정도로 열성적인 이들.
하지만 2부가 나오고 나서부터는 이야기가 달랐다.
[지난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
[시리즈 전체 합계 4,000만 부를 판 소설! <마지막 마법사>!]
[요즘 출판업계의 핫뉴스는? 미국의 서점들, <마지막 마법사>의 물량 확보를 위해 애쓰고 있어.]
1부의 판매를 통해 몇억 달러나 되는 엄청난 수익을 거둬들인 윅슨 출판사.
그 수익금에서 수천만 달러의 홍보비를 따로 책정해 <마지막 마법사> 2부의 대대적인 홍보에 들어간 것.
인터넷 기사들부터 시작해, 메이저 신문사를 통한 전면 광고, 가장 큰 주가를 달리고 있는 SNS인 페이스북을 통한 광고 등.
온갖 곳에서 <마지막 마법사>의 홍보를 때리기 시작한 것이다.
해리포터나 트와일라잇 정도를 제외하고는 기존 판타지 소설을 읽어 본 적이 없는 소비자들이 <마지막 마법사>를 접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그 효과는 수천만 달러의 몇 배나 되는 값어치를 보여 주고 있었다.
“어? 이 광고 며칠 전에도 봤는데 여기서 또 보네.”
“뭐? 아아, 마지막 마법사?”
“아는 소설이야?”
“응. 며칠 전에 책 읽다가 밤새서 강의 지각했다고 했잖아. 그때 읽은 게 바로 이 책이야.”
“왓? 그게 거짓말이 아니었다고? 네가 책을 읽느라 잠을 못 잤다 해서 당연히 거짓말이라 생각했는데.”
“날 뭐로 보는 거야. 뭐 해리포터 이후 처음으로 읽은 소설이기는 하지. 사실 나도 최근에 여기저기서 하도 광고를 보게 되니까 ‘그래, 얼마나 재밌는지 내가 한번 본다’라는 생각으로 읽은 건데…….”
원래라면 서점을 찾지 않았을 이들.
혹은 찾더라도 굳이 판타지 장르의 책을 구매하지 않았을 이들.
그런 이들이 조금씩 <마지막 마법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
그리고 지금까지 선우진의 작품들을 읽었던 여느 독자들이 그랬듯.
“아니! 이걸 여기서 끊는다고?”
“아! 3권까지만 사 올걸. 2권에서 이렇게 끝내는 건 너무하잖아!”
“4천만 부를 팔았다지만 처음 들어 본 책이라 진짜인가 싶었는데… 겁나 재밌네?”
“오오오! 아마존에서도 팔잖아? E-book을 읽는 건 또 처음인데.”
첫 권을 읽기 시작한 이들 대부분이 마법에라도 걸린 듯 다음 권을 찾아 나서고 있었다.
그렇게.
“아니, 싯팔! 슈팅을 30개나 때렸는데, 0골이 말이 되는 거야?! 게임 엔진이 뭐 이따위야! 확, 회사를 사들여?”
과거 빛났던 트레블 달성 감독 시절을 떠올리며, FM 2013을 열심히 플레이 중인 선우진이 미처 신경을 못 쓰는 사이.
그전까지의 단순한 흥행을 넘어, 신드롬.
<마지막 마법사>의 신드롬이 시작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