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이런 작가는 처음이지?
“작가님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동선 밟아 주시면서 대사 치시면 됩니다. 하하. 뭐, 직접 쓰신 거니 따로 디렉팅 안 드려도 알아서 잘하시겠지만요.”
“…네.”
“주원 씨랑 시연 씨도 잘 부탁드려요. 이번 신 저번에 예능에서 말한 것 때문에 시청자들 기대감 만땅이신 건 아시죠?”
“그럼요. 걱정 마세요.”
나와는 달리 편안한 표정으로 촬영을 준비하는 강주원과 한시연.
이번 신은 나와 저 두 주연배우들이 함께하는 신이었다.
현재 연기 천재가 되었다는 중후반부를 향해 달려가는 상황.
강주원이 맡은 남주인공 역할도 작품 하나를 성공시키고 무명 배우에서 벗어나 슬슬 대세 배우로 자리잡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여주인공인 한시연과 서서히 로맨스를 피워 내고 있었고.
내가 맡은 역할은 그런 강주원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싸가지 없는 톱스타로 나와서 한시연에게 추파를 던지는 역할이었다.
“…….”
후우.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스쳤다.
연기, 연기… 그거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분명 예전에 연기 선생님들이 하셨던 말이 있었는데…….’
10년도 더 된 기억을 애써 떠올려 봤다.
STR엔터에서 배웠던 기억들.
하지만 떠오르는 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한숨 쉬던 연기 선생들의 얼굴뿐이었다.
아냐, 긴장하지 말자.
기껏해야 카메오 신에 불과했다.
일부러 대사도 많이 넣지 않았고.
그냥 편하게 대사를 뱉으면 될 거다.
그리고 또 알아?
과거로 왔다고 뭐 이것저것 강화된 재능이 한둘이 아닌데.
내 연기력도 예전보다 나아졌을지?
저번에 한번 집에서 혼자 대사 쳤을 때는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았지만… 그래도 촬영장에서라면 다를지도 몰랐다.
왜, 몰입감이 확 다르지 않나.
이렇게 제대로 된 세트장에서라면 그동안 숨겨 왔던 내 연기력 재능이 대폭발할지도 모른다.
“자. 다들 준비해 주시고.”
…라고 생각했는데.
저 옆에서 촬영을 준비하고 있는 양진철 PD를 보니까 갑자기 긴장이 확 된다.
순간 기시감이 느껴진 탓이다.
그래 왜, 예전에 나보고 연기 때려치우라면서 화내던 양진철 PD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나만 보면 함박웃음을 짓는 양진철 PD인데… 대체 왜 그때 모습이 겹쳐 보이지?
‘아이 씨. 내가 왜 그랬지?’
왜 예능에 나가서 이딴 시청률 공약을 해 버린 걸까.
그때 MC들의 말발에 넘어갔으면 안 됐는데.
첫 예능이어서 그랬나, 긴장해 버려서인지 나도 모르게 카메오 출연을 공약으로 걸어 버리고 말았었다.
게다가 옆에서 두 주연배우들이 은근슬쩍 부추기기도 했고.
아무튼-
“슛 들어갈게요! 모두 레디 해 주시고, 슛!”
촬영 시작을 알리는 양진철 PD의 사인이 떨어졌다.
그래, 그냥 내가 쓴 대본대로만 하자.
대본대로만.
‘후우.’
속으로 빠르게 심호흡을 끝낸 나는 한시연의 옆으로 걸어가 입을 열었다.
“어. 오.랜.만.이.다? 그.런.데. 너 요.즘. 저.런. 애.들.이.랑. 노.냐?”
* * *
[화제의 드라마, 연기 천재가 되었다! 선우진의 카메오 출연으로 화제!]
[선우진, 자신의 드라마 ‘연기 천재가 되었다’에서 연기력으로 시청자 사로잡아.]
[선우진 작가님! 대체 그 얼굴로 왜 배우 안 하셨어요?]
[연기 천재가 되었다의 신 스틸러! 선우진, 배우로 데뷔하다!]
-ㅋㅋㅋㅋㅋㅋㅋ화제요? 화재 아닌가요?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닠ㅋㅋㅋㅋㅋㅋㅋㅋ기자 놈들 너무한 거 아니냐? 왜 배우 안 했냐닠ㅋㅋㅋㅋ 제대로 멕이네.
└ㅋㅋㅋㅋㅋㅋㅅㅂ ‘연기력으로 시청자 사로잡아’라는 제목이 더 너무함.
└제대로 사로잡긴 했음… 그건 ㅇㅈ. 아까 선우진 나오는 장면에서 진짜 나랑 우리 가족들 다 멍- 하니 TV만 바라봄.
└ㄹㅇ 신 스틸러긴 하더라.
-와; 그런데 진짜 제대로 된 배우는 연기로 모든 걸 설명한다고… 선우진이 그런 배우 아니냐? 1분짜리 카메오 신 하나로 자기가 왜 배우 안 했는지를 모든 시청자한테 설명해 줌 ㅇㅇ
└너… 너는 진짜…….
└야 이 나쁜 놈앜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근데 PD가 작가랑 원수졌냐? 좀 여러 번 촬영이라도 해서 괜찮은 거로 내보내지.
└그… 저게 제일 잘 찍힌 거라고는 생각 안 해 보셨나요?
└나 엑스트라로 연기 천재가 되었다 출연했었다. 선우진이 카메오 촬영한대서 내 신 끝났는데도 남아서 구경했었음. 촬영 쭉 지켜봤는데… 저게 제일 괜찮은 거임;
└앜ㅋㅋㅋㅋㅋㅋㅋㅋ 촬영장 분위기 어땠음?
└처음에는 다들 ㄹㅇ로 당황함. 한시연도 대사 실수 거의 없는 배우인데, 처음에 선우진 로봇 연기 보고 당황했는지 대사 못 치더라 ㅋㅋ 그러다가 자기가 대사 까먹어서 NG 났다며 죄송하다고 사과하는데, 옆에서 선우진 얼굴 ㄹㅇ 시뻘개짐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개웃기네.
└나 ㄹㅇ 장난치는 건 줄 알았음. 근데 저게 진심 파워더라…….
└재촬영은 잘함?ㅋㅋㅋㅋㅋ 좀 갑분싸였을 것 같은데.
└노노, 그건 아님ㅋㅋㅋ 첨에는 다들 얼탔는데 재촬영 시작하고 나서는 다들 웃고 즐김. 그래도 프로 의식(?)이 있는 건지 선우진 겁나 부끄러워하면서도 재촬영 열심히 하더라.
└ㅋㅋㅋㅋ촬영장 분위기 좋나 보네. 하긴, 메이킹 영상 나오는 걸 보면 서로 엄청 친해 보이더라.
└그것도 있고… 사실 선 작가가 이제 갓 성인이 된 20살이잖아. 그런데 평상시에 엄청 어른스럽고 드라마 쓴 작가다 보니 다들 살짝씩 어려워하는 게 있었거든? 게다가 돈도 겁나 많이 벌잖아. 근데 저거 찍을 때 보니까 뭐라고 해야 하지… 빙구미? 그런 게 느껴져서 그제야 그 나이 대, 스무살 같더라. 나 말고 다른 배우들이나 스태프들도 선 작가 보면서 ㅈㄴ 귀여워함ㅋㅋㅋ
연기 천재가 되었다의 11화가 방영된 당일.
인터넷이 내 카메오 신으로 시끄럽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후우.
쥐구멍이 어디 없나.
아니면 동굴이라도.
그런 데에 들어가 한 3달은 잠수 탔다가 돌아오고 싶었다.
그러면 이 사태(?)도 잠잠해져 있겠지?
“아하하. 아, 개웃겨. 야, 선우진! 내 대학 동기들 단톡에도 네 영상 올라왔다. 이거 봤냐면서.”
저기서 누나라는 이름의 못난이가 뭐라 말하지만 사뿐히 무시하도록 하자.
나는 부끄럽지 않다. 부끄럽지 않아.
스스로를 그렇게 세뇌하며 스마트폰을 열었다.
[강주원 - 작가님, 대박! 저희 소속사 사장님이 작가님 나온 신 보고 꼭 영입하고 싶다던데요?ㅎㅎ 칸에 갈 배우를 찾았다면서.]
[한시연 - 헐, 대박! 우리 회사에서도 똑같은 소리했는데! 작가님, 저희 회사가 더 좋아요~ 이리로 오세요~]
…죽일까요, 마스터?
응. 참지 마.
“…….”
톡, 토도독.
[나 – 배우님들, 다다음 화 대본에 변경 사항이 있어서 알려 드립니다. 예전에 화제된 사탕 키스 아시죠? 제가 거기서 영감을 받아서 마늘 키스란 걸 준비했습니다 ^^ 사탕 대신 마늘로 대체하는 거예요.]
단톡에 그렇게 답장을 보내고 폰을 껐다.
물론 진짜 대본을 수정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다… 진짜로 수정해 버릴까?
카메오 신 촬영 날 있었던 회식만 생각하면 정말로 수정해 버리고 싶었다.
‘특히 강주원 배우… 후우.’
한시연은 그래도 괜찮았는데, 강주원은 회식 때 계속 내 로봇 연기 톤을 따라하면서 얼마나 나를 놀려 먹던지.
꼭 우리 누나 남자 버전을 보는 것 같았다.
진짜 나보다 어렸으면 그 자리에서 꿀밤 먹였다.
그래도 뭐… 나름 괜찮은 경험이기는 했다.
아까 전 기사 댓글에서 본 엑스트라분의 말처럼 카메오 신을 찍고 난 이후 나를 대하는 배우들이나 스태프의 태도가 조금 바뀌기도 한 것이다.
원래 촬영 끝나고 회식 자리를 가졌을 때에도, 양진철 PD나 강주원, 한시연 등의 주연배우를 제외하고는 내게 말을 거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었는데.
저 날의 회식에서는 다들 편하게 나를 찾아와서 말을 건네더라.
댓글에 적힌 거처럼 그 전까지는 다들 나를 꽤 어려워했던 게 있었나 보다.
나도 내 나름대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진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뭐, 이해는 한다.
원래 아무리 ‘편하게 해, 편하게 해’ 해도 불편해지는 게 사람 마음이니까.
‘그리고 뭐… 작품에 도움이 되기도 했고.’
11화의 시청률은 29%.
10년 전도 아니고 요즘 시대에서 25%면 볼 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다 연기 천재가 되었다를 보고 있다는 소리인데, 거기서 4%나 상승해 30%라는 고지를 겨우 1% 앞두고 있는 것이다.
아마 내가 카메오로 작품에 직접 출연한다는 게 화제가 된 덕도 좀 있지 않나 싶었다.
그리고 또 하나.
-(속보) 선우진 재촬영 여러 번 한 거 하나도 빠짐없이 메이킹 필름에 실린다고 함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흑역사 박제 제대로 하겠네.
└메이킹 필름 매출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흑역사도 숨기지 않는 선우진! 이 시대의 참 배우!
└예…? 배우요……?
댓글 반응이 보여 주는 것처럼 메이킹 필름도 원래보다 더 팔리게 될 것 같았다.
후우…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는 이제부터 당당하게 나가기로 결심했다.
내가 배우를 할 것도 아니고.
작가가 글만 잘 쓰면 그만이지.
그런 의미에서…….
‘글이나 써야지.’
나는 한글 창을 켰다.
* * *
몇 주가 더 흘렀다.
내 첫 드라마인 연기 천재가 되었다도 이제 완결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내일과 모레 방영으로 끝이 나는 상황.
[양진철 PD – 작가님, 시청률 35% 달성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드립니다. ^^]
연기 천재가 되었다는 35%라는 시청률을 달성하면서 역대급 드라마 반열에 들어서고 있었다.
덕분에 양진철 PD를 포함한 출연 배우들의 주가도 고공 행진 중이었다.
주연 배우들이야 당연 스타 배우가 되었고, 양진철 PD도 이제 스타 PD 소리를 듣고 있었다.
특히 메이킹 필름에서 간간이 나오는 양진철 PD와 나의 케미가 시청자들의 호감을 샀다고 한다.
나를 보는 눈빛이 무슨 교주님 보는 신도 눈빛이라나 뭐라나.
[데브브라더스! 달려라, 쿠키 출시!]
그사이 저번에 투자했던 데브브라더스의 [달려라, 쿠키]가 출시됐다.
일주일 정도 전의 일이었는데, 처음에는 미진한 실적을 보이던 게 최근 들어 다운로드 수가 급상승하고 있다고 한다.
뭐, 이미 [달려라, 쿠키]가 성공하게 될 건 알고 있었기에, 별 감흥은 없었지만.
그래도 [달려라, 쿠키]의 상승세가 나타나면서 날 보는 제이슨의 눈빛이 조금 달라진 게 재밌었다.
아무튼.
그사이에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던 건 <마지막 마법사>였다.
몇 주 전에도 이미 선주문량으로 600만 부를 넘겼던 게 더욱 판매량이 상승하면서 대기록을 달성하게 된 것.
[선우 작가의 <마지막 마법사>, 미국 판매량 1,000만 부 달성!]
미국에서만 1,000만 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일찍부터 판매되고 있던 한국과 중국은 물론 프랑스, 스페인, 일본 등 새롭게 진출한 해외시장에서의 판매량이 합쳐지면서…….
[한국에서 책을 가장 많이 판 작가는? 바로 선우진! <마지막 마법사> 총 판매량 2,000만 부 달성!]
단일 작품으로 2,000만 부라는 신화를 써 내린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작가님! 축하드려요. 이제 명실상부 세계적인 작가가 되셨네요.”
그리고 저번에 200만 부를 말했을 때에는 덤덤했던 엘레나도 2,000만 부라는 숫자에는 놀랐는지, 축하하는 전화를 했다. 그렇게 축하 연락이 왔을 때.
나도 엘레나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네. 감사합니다. 아, <마지막 마법사>의 2부는 총 8권이에요. 1부보다 호흡을 짧게 가져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러시군요. 초반 내용이 써지면 제게도 보여 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메일로 방금 전에 보내 드렸어요.”
“아, 1권 분량을 다 쓰신 건가요? 바로 확인해 볼게요.”
“…아뇨?”
“……?”
“2부를 다 쓴 건데요?”
아… 엘레나는 내 집필 속도를 모르던가?
어서 와.
이런 작가는 처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