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운이 좋군
처음 선우진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누구나가 같은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저 배우는 누구지?
모두가 당연하게 선우진을 배우일 거라 생각했다.
드라마 대본 리딩 현장.
그곳에 나타난 웬 미친 비주얼 한 명.
배우라 생각하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다.
“안녕하세요.”
심지어 목소리까지 좋다.
꼭 고막 가까이에 대고 직접 울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걸 들은 모두가 이번에도 같은 생각을 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조만간 엄청 뜨겠구나.
그렇기에.
“아! 작가님! 오셨군요.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선우진을 반기는 양진철 PD의 인사가 나왔을 때.
모두가 순간 얼타는 얼굴을 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작가님? 작가, 작가라고?
방금 내가 잘못 들었나?
“아. PD님 옆에 앉으면 되는 거죠?”
“예. 맞습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양진철 PD에게 작가님이라 불린 남자는 이곳이 제 자리가 맞다는 듯, 자연스레 양진철 PD의 옆자리로 향했다.
다른 배우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PD와 작가를 위해 준비된 두 자리.
그중 한 자리에 말이다.
분명 양진철 PD는 PD가 맞으니, 그렇다면 저 남자도 작가가 맞다는 소리다.
진짜로? 저 얼굴로?
배우가 아니라고?
아니, 그것보다 그 19살 천재 작가가 저 사람이라고?
“…미친.”
누군가가 그런 말을 뱉은 것도 충분히 용납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 말처럼 진짜 미친 상황이었으니까.
개중 누군가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봐요, 신님. 밸런스 패치는 원래 신경 안 쓰시는 건 알았는데,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아무튼.
꾸벅-
“안녕하세요.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연기 천재가 되었다를 쓴 선우입니다. 본명은 선우진이니 편하신 대로 불러 주세요.”
선우진의 인사에 그제야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짝짝짝짝-
잠깐 동안 환영의 뜻을 담은 박수가 오갔다.
“글쓴 지 이제 세 달 반 된 초보 작가입니다. 그래도 소설은 두 질 완결 냈는데 드라마는 처음이다 보니 아직 익숙하지 않고요. 하하. 앞으로 많은 도움 부탁드리겠습니다.”
“와아… 진, 진짜 작가님이세요?”
“넵.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강주원 배우님. 팬입니다. 그간 나오신 작품들 다 재밌게 봤어요.”
“허업. 예… 저도 작가님 글 정말 재밌게 잘 봤습니다. 아니, 그런데 이게… 하아.”
길게 날숨을 내쉬며 양진철 PD 쪽을 힐긋 바라보는 강주원이었다.
그 묘한 표정에 양진철 PD가 피식 웃었다.
강주원이 표정으로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왜 메이크업 받고 오라고 더 강력하게 말해 주시지 않으셨어요…….
양진철 PD가 자기는 잘못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시연이 말을 보탰다.
“오빠, 큰일 났네.”
“…어?”
“오늘 메이킹 필름 풀리면 캡쳐본 좀 돌아다니지 않을까? 강주원 굴욕 짤. 뭐 그런 제목으로.”
“으으. 진짜 그 정도야?”
“응. 진짜 그 정도야.”
“흠흠. 이게 다 나이 때문이야. 나도 작가님처럼 젊었을 때는…….”
“에이, 내가 그때 오빠 얼굴을 아는데 거짓말은. 오빠는 카메라 마사지 받고 더 잘생겨진 케이스지.”
꼭 강주원을 놀리듯 말하는 한시연이었다.
물론, 놀리는 게 맞았다.
“아, 작가님.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작가님 엄청 잘생겼다고 칭찬하는 거니까. 제가 배우 일 하면서 잘생긴 사람들 수도 없이 만나 봤는데, 작가님이 그중에서도 탑이에요.”
“하하. 감사합니다.”
“빈말 아니고 진짜로 하는 말이에요. 아니다. 작가님 정도 되면 잘생겼다는 말 빈말 아닌 건 잘 알죠? 저도 저 예쁜 건 잘 알거든요.”
“예, 뭐… 하하.”
그러던 그때였다.
“자, 이제 작가님도 오셨으니까 슬슬 카메라 돌리겠습니다.”
“어어? 잠시만요, PD님. 아직 30분 남았잖아요. 잠깐, 잠깐만. 금방 갔다올게요. 야, 시연아. 너 맨날 같이 다니는 메이크업 해 주시는 분 오늘도 오셨지?”
“예? 아까 분명 이런 자연스러운 모습이 담겨야 제대로 된 메이킹 필름이라고 하셨…….”
“에이, 그건 그때고요. 진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꼭 만담 같은 대화에 다들 피식거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제 쌩얼에 자신 있어 하던 강주원의 뒤바뀐 태도가 누구 때문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강주원이 부랴부랴 한시연의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함께 떠나고.
“자, 주원 씨는 떠났지만 카메라는 지금부터 돌아갑니다. 다들 준비해 주세요.”
주연 배우가 없는 상태에서 메이킹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한시연이 양진철 PD에게 물었다.
“PD님? 설마… 저희 메이킹 찍는 거 혹시 작가님 때문에 하는 거예요?”
“예? 흠흠. 설마요. 저희 드라마를 사랑해 주실 시청자분들께 더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함이죠.”
“네. 그니까요. 다양한 볼거리. 여기 있네. 내가 시청자여도 작가님 얼굴은 봐도 봐도 안 질리겠다. 게다가 작가님 얼굴은 드라마에 나오는 것도 아니니, 메이킹 필름에서밖에 볼 수 없는 거고.”
“흠흠.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노코멘트라고 말은 하지만 그게 진짜 노코멘트가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았다.
왜 드라마에서는 잘 안 만드는 메이킹 필름을 제작한다고 하나 궁금했는데.
그래서였구나.
양진철 PD의 메이킹 필름 제작 의도를 모두가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걸 들은 누군가가 옆 사람과 조용히 말했다.
“우리 드라마… 엄청 뜨겠는데?”
“어?”
“시청률은 나와 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화제성은 엄청날 것 같지 않아? 안 그래도 천재 작가라고 유명해진 사람인데, 알고 보니 저런 얼굴이다? 너라면 그 사람이 쓴 드라마가 안 궁금하하겠어?”
“…그건 그렇네. 포털 연예란 도배되겠다. 괜히 국장님이 푸시해 주시던 게 아니구나.”
“와, 근데 진짜 부럽다. 너도 기사 봤지? 저번 달 수익이 10억 가까이 된다던데… 세상 진짜 혼자 사네.”
“10억이랑 저 얼굴. 뭐가 더 부럽냐?”
“난 얼굴. 지금 얼굴 말고 저 얼굴로 연예인하면 돈은 cf로도 다 땡기겠다.”
“월 수입이 10억인데?”
“그래도 잘생긴 게 최고지. 왜, 너는 10억 고르게?”
“아니. 나도 저 얼굴.”
* * *
비슷한 시각.
STR엔터.
“어, 여보세요.”
-선배! 특급 정보야.
“특급 정보? 뭔데?”
태 이사가 궁금증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그가 통화하고 있는 건 투자 대행사에서 일하고 있는 그의 대학 후배였다.
텐센트가 한국 엔터 산업에 관심이 있다는 소식을 누구보다 빨리 알려 줬을 뿐만 아니라, STR엔터에 대한 세부 정보를 적당히 조작해서 텐센트에게 넘긴 아주 고마운 후배.
조만간 텐센트의 투자 담당자가 방한할 예정인 지금 상황에서, 그런 그가 특급 정보라고 자신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으니.
여간 중요한 정보가 아닐 듯싶었던 것이다.
-선배, 그 요새 한국에서 난리인 작가 알아요? 작가 선우!
“선우?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한데…….”
-아, 왜. 그 19살인데 소설 써서 몇십 억 벌었다고 뉴스에서 엄청 때려 댔잖아. 이번에 드라마도 들어가고.
“아아. 그 작가. 알지, 알지. 걔가 왜?”
태 이사가 언젠가 봤던 뉴스 기사를 떠올렸다.
아직 미성년인 나이로 십억 단위를 벌어들인다는 소설 작가.
평소 그런 장르 소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저딴 거로 돈을 저렇게나 번다고?’ 하면서 신기해했던 기억이 났다.
어쨌든.
그 작가 얘기를 왜 특급 정보랍시고 꺼내는 것인가.
-이번에 한국 들어가는 렌샤오 이사 있잖아. 그 이사가 그 작가 엄청난 팬이래.
“팬?”
-어. 그냥 팬도 아니고 엄청난 광팬이라던데? 거기 비서한테 돈 찔러 주고 들은 건데, 이번 한국행에서 그 작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엄청 들떠 있다더라.
“뭐? 참나. 중국 놈들은 이해할 수가 없네. 텐센트 이사씩이나 돼 갖고 뭐 그런 소설을 좋아해?”
-아이. 지금 그게 중요해?
“인마, 그냥 해 본 말이지. 아무튼 그 19살 놈하고 렌샤오가 만날 예정이라 이거지?”
그래도 태 이사의 이사직은 허투루 딴 게 아니었다.
후배의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한 그였다.
‘어디 보자. 렌샤오가 그놈의 팬이고, 둘이 한국에서 조만간 만난다?’
물론 아무리 팬이라고 해도 몇백 억 단위가 오고 갈 투자를 소설 작가가 좌지우지할 수 있겠냐만은, 그래도 말 한두 마디 정도는 보탤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가령, 선우 작가의 입에서 ‘아, 저는 요새 이 걸 그룹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같은 말이 나온다면?
그리고 그 걸 그룹이 바로 STR엔터의 걸 그룹이라면?
안 그래도 한국 연예계와 STR엔터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을 찾은 렌샤오가 그런 소리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할까?
씨익-
태 이사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거기서 게임 셋인 거다.
아마 원래 계획했던 투자 금액에서 몇십 억 정도는 충분히 뛰게 할 수 있겠지.
“오케이. 알았어. 다른 정보 또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어? 어어. 아, 선배 이 정도면 특급 정보 맞지? 제대로 챙겨 줘야 한다?
“걱정 마. 내가 언제 그냥 떼어먹는 거 봤냐? 알아서 보낼 테니 이만 끊는다.”
‘남은 건 선우라는 작가를 어떻게 설득하냐 이건데…….’
후배와의 통화를 끝낸 태 이사가 생각에 잠겼다.
돈으로 설득하는 건 별로 좋지 못했다.
뉴스 기사의 내용을 미뤄 생각해 보면 돈이 부족할 형편은 절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 설득해야 하려나.
19살의 성공한 소설 작가가 가장 좋아할 만한 것은?
‘여자지.’
태 이사가 19살의 자신이라면 가장 좋아했을 것을 떠올렸다.
아마 선우라는 작가도 마찬가지일 거다.
보통 그런 장르 소설을 쓰는 작가라 함은… 여자와의 연이 별로 없기 마련이니까.
‘기사에서 분명 드라마에도 들어간다고 했는데.’
생각을 끝낸 태 이사가 제 핸드폰으로 선우에 대해 검색했다.
그러자 보게 된 익숙한 이름 하나.
‘양진철? 스읍.’
분명 고준환의 일로 엮이게 된 그 PD의 이름이었다.
그걸 본 태 이사가 작게 혀를 찼다.
이렇게 된 이상 제 조카를 엿먹인 그를 똑같이 엿먹여 주는 건 불가능하게 됐다.
방 CP한테 그럴 예정이었던 것처럼 약을 쳐야 하면 쳐야 했지.
‘아니야. 오히려 잘됐어. 준환이는 나중에 따로 작품 꽂아 넣으면 되니까.’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아직 방 CP를 통해 그에게 압력을 가하기 전이었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 이후였다면 상황이 무척이나 난감했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니, 태 이사는 자신이 정말로 타이밍이 좋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방 CP를 따로 보기로 한 오늘, 이런 정보를 알게 된다고?
‘이거 아무래도 느낌이 좋은데?’
운도 좋았고, 느낌도 좋았다.
“아, 방 CP님. 접니다. 오늘 뵙기로 했었죠?”
태 이사는 생각했다.
꼭 세상이 자신의 계획이 성공하라고 등을 밀어주는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