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착한 것도 문제다
“에쓰비씨? 뭐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SBC?
그런 이름의 엔터 회사가… 잠깐만, SBC?
“뭐, 뭐라고요?”
STR엔터 소속 매니저 박창수.
선우진에게는 김대훈 따까리 1이라는 칭호로 불리우는 그는 자신도 모르게 건들거리던 자세를 바로 했다.
물론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된 건 아니었다.
SBC…….
그러니까 선우진의 새 소속사 매니저인 줄 알았던 눈앞의 남자가 SBC 소속 직원이라고?
박창수는 제 귀로 들었음에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혹시 자기가 잘못 들은 건 아닐까?
“SBC라고요, SBC. 아니, 참나. SBC 제작 센터에 와 놓고도 SBC를 몰라요?”
그런 기대를 해 봤지만 아니었다.
제대로 들은 게 맞았다.
박창수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의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고준환도 마찬가지였다.
“흠, 흠흠. SBC 직원이시라고요? 혹시 소속이 어떻게 되시는지……?”
그래도, 박창수는 혹시 모르는 기대를 놓치지 않았다.
SBC 소속 직원이라고 말했다 해서 STR엔터가 무조건 저자세로 나갈 필요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지상파 방송국이 대부분의 기획사보다 갑인 건 맞지만, 상대가 말은 SBC 직원이라고 해 놓고서는 알고 보니 조명 팀과 같은 외주 팀 소속일 수도 있었으니까.
STR엔터가 규모가 작기는 해도 나름 이 바닥에서는 꽤 오래 해먹은 기획사다.
만약 상대가 외주 회사 소속인 조명 감독이나 조명 팀인데 그냥 SBC 이름을 댄 거라면, 그래도 이 정도 시비는 적당히 성의 표시만 하면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나요? 나 드라마국 소속 양진철 PD요. 그러는 그쪽은? 대놓고 이놈 저놈 하는 거 보니, STR엔터인지 뭔지에서 그렇게 잘나가는 분이신가 보죠?”
이어진 양진철 PD의 말에 박창수의 기대가 산산히 부숴졌다.
‘씨발. 드라마국 PD? 진짜로?’
욕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상황이다.
다른 부서도 아니고 드라마 PD면 갑 중 갑, 슈퍼 갑이다.
그것도 케이블도 아닌 지상파 방송국의 PD면 이 업계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는 위치다.
대형 기획사의 팀장급 되는 위치면 몰라도, 실장급 매니저에 불과한 박창수 정도야 얼마든지 좆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었다.
만약 지금 일이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매니저가 어딜 감히 방송국 PD한테 대들어? 따위의 생각을 가진 PD들이 앞다투어 STR엔터를 보이콧할지도 몰랐다.
“그… 그런 게 아니라…….”
‘뭐야 씨발? 대체 선우진 저 새끼가 드라마국 PD하고 어떻게…….’
박창수의 시선이 선우진에게로 돌아갔다.
아까부터 왠지 모를 미소를 짓고 있더라니.
자신의 윽박지름에 당황해서 지은 미소인 줄 알았건만,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선우진과 드라마국 PD가 아까 귓속말까지 하고 그랬던 걸 보면 보통 친한 사이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걸 보고 이 새끼가 선우진 새 매니저구나 확신했던 건데… 매니저가 아닌 드라마국 PD였다니.
“잠깐만. STR엔터면 거기 아냐? 이장수 있는 곳?”
“이, 이장수 팀장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요. 뭐야? 팀장님, 팀장님 하는 걸 보면 이장수 그 친구보다 아래 직급인데도 방송국에서 이렇게 행동한 겁니까? 이야, 난 또 엔터 사장님 납신 줄 알았네!”
심지어 이장수 팀장을 언급하기까지 한다.
이장수 팀장은 STR엔터의 배우 매니지먼트 팀 팀장이다.
박창수가 속한 가수 매니지먼트 팀 팀장인 김대훈보다 2년 선배다.
그런 이를 저렇게 하대하듯 말하는 걸 보면, 그냥 그저 그런 드라마 PD도 아니라 꽤 힘 있는 PD라는 뜻이었다.
‘씨바알. 좆됐다. 괜히 배우 팀 지원 가겠다고 나서 가지고.’
박창수는 5시간 전의 자신이 했던 행동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대체 왜 배우 팀 지원 가겠냐는 물음에 알겠다고 대답했던 걸까.
그냥 하던 대로 그가 말고 있던 아이돌들 따라다녔으면 이런 대참사는 생기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가수 팀 소속 매니저라고 예능국 PD 얼굴들 정도는 외우고 다녔으니 말이다.
물론, 누구를 탓하랴.
다 박창수 그가 스스로 싼 똥이거늘.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박창수가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대가리 박기.
조금 어려운 말로는 석고대죄.
물론 진짜로 무릎을 꿇고 엎드리지는 않았고, 거의 엎드리는 것만큼 머리를 숙인 박창수였다.
“아이고. 아까는 그렇게 기세등등하시더니, 제가 PD인 걸 알고 나니까 좀 쫄리시나 봐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양진철 PD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히 선우진한테 놈놈거렸던 매니저다.
분명 선우진이 그에게 말하길, 예전에 배우 준비를 잠깐 했었다고 했으니 아마 그때 선우진을 담당했던 이인 것 같았다.
그리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좋게 끝난 사이는 아닌 듯했고.
‘이럴 때라도 작가님한테 잘 보여야지.’
사실 선우진이 아니었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다.
자신이 PD라는 걸 몰랐을 때는 고압적으로 나오다가, 알고 나니 태도가 손바닥 뒤집 듯 바뀐다.
그런 모습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물론, 매니저뿐만 아니라 뒤에 있던 연예인도 마찬가지로.
제 매니저가 미성년자에게 윽박지르는 걸 가만히 놔둔 걸 보면, 인성을 알 만했으니까.
“그쪽은 누구예요? 배우?”
“아… 예! 안녕하십니까! 배우 고준환이라고 합니다! 지금 SBC에서 김준태 피디님이랑 작품 같이하고 있습니다!”
“준태요? 준태랑 한다는 걸 보면 그대와 당신?”
“예. 맞습니다!”
그대와 당신은 지지난달부터 SBC에서 방영되고 있는 아침 드라마다.
아침 드라마치고도 시청률이 별로 좋지 않아 후배인 김준태가 며칠 전 죽는 소리를 냈던 게 기억이 났다.
아무튼, 모르는 얼굴에서 짐작은 하긴 했지만, 별로 급 높은 배우는 아니라는 뜻.
‘나중에 준태한테 언질이라도 해야겠어.’
뭐, 그렇다고 드라마에서 하차시키라거나 그런 압박을 넣을 생각은 없다.
사실 아무리 그가 선배라고는 해도 같은 PD인 김준태에게 하차를 강요하는 건 월권에 가깝기도 했고, 선우진에게 놈놈거리던 매니저라면 몰라도 그냥 꼴좋다는 듯 바라보기만 했던 고준환에게 가하기에는 심한 처사이기도 했으니까.
그냥 네 드라마에 나오는 고준환이라는 배우를 만났는데 성격이 좀 그렇더라? 정도의 말만 할 생각이었다.
어쨌든.
“죄송합니다! 피디님!”
재차 고개를 숙이는 박창수를 본 양진철 PD가 말을 이었다.
“저한테만요?”
“…예?”
“여기 이분한테도 사과하셔야죠. 아까 보니까 이놈 저놈 하면서 막 대하는 게 장난 아니더만.”
“아… 예, 예. 그… 렇죠.”
양진철 PD의 말을 들은 박창수가 더욱 똥 씹은 표정이 됐다.
PD야 그렇다 치더라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가 막 다루던 연습생에게 사과라니.
대체 둘이 어떤 사이기에 자기한테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다가는 큰 사달이 날 것 같았다.
꾸벅-
어쩔 수 없이 박창수가 선우진에게도 허리를 숙였다.
그래도 사과를 입밖으로 꺼내지 않고 행동으로 대신한 게 나름의 자존심이라면 자존심이었다.
피식-
비록 그가 지켜 낸다고 지켜 낸 자존심은 뒤이어 들려온 선우진의 피식거리는 소리에 바로 깨지고 말았지만.
“됐으니까 대충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짓죠, 뭐. 아, 김대훈 씨한테는 안부 전해 주시고요. 이제 가시죠, PD님.”
“예. 아! 내 정신 좀 봐. 커피 이리 주시죠. 하하.”
“정 원하신다면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결국 그렇게 떠나는 선우진과 양진철 PD였다.
“이… 뭐 하자는 거예요!”
남겨진 둘.
그중 고준환이 박창수를 찌릿 노려보며 말했다.
자기가 뭘 잘못했다고.
그저 기생오라비처럼 뻔지르르하게 생긴 놈이 있어 구경 좀 했던 게 전부인데, 드라마국 PD한테 찍히게 생겼지 않는가?
“아, 아니. 그게…….”
“씨발. 괜히 당신 때문에 나한테 뭔 일 있기라도 해 봐요.”
물론 박창수로서도 억울할 따름이었다.
PD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먼저 나서서 아닌 척 자기를 부추겨 놓고는!
이제 와서 제 책임은 없다는 듯 구는 꼴이 짜증나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박창수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STR엔터 이사 중 한 명의 조카인 고준환에게는 그가 철저한 을이었으니.
결국, 이번에도 고개 숙여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 * *
쪼옵-
커피가 달다.
분명 내가 마시는 건 시럽 한 방울 넣지 않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인데.
왜 달게 느껴지지?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작가님, 혹시 아까 그 STR엔터가 작가님이 계셨던 회사인가요?”
눈치가 빠른 양진철 PD다.
“네. 보셨다시피 별로 질 좋은 곳은 아니고요.”
“으음. 그렇군요. 이거 제가 어떻게 동기나 후배 애들한테 소문이라도 퍼뜨릴까요? 소문 안 좋은 회사가 있으니 되도록 상종하지 말라고요.”
“아뇨.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어요.”
내가 착해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물론 내 마음씨가 곱디고운 것도 사실이지만, 진짜로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서 그런 거다.
어차피 STR엔터에서 배우로 성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굳이 양진철 PD가 힘쓸 것 없이 알아서 도태될 회사다.
그나마 고준환이 얼굴 제대로 갈아엎고 조금씩 뜨기 시작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는다.
그놈한테 그럴 만한 이유가 있거든.
“아!”
그러고 보니 아까 고준환이 양진철 PD 후배가 맡고 있는 드라마에 출연한댔지?
이거 참.
내 착하디착한 마음씨가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만든다.
“왜 그러세요, 작가님?”
“아까 말씀하신 후배라는 김준태 PD님? 그분하고 친하신가요?”
“그럼요. 제 직속 후배 놈 중 하나입니다. 걔가 지금 하고 있는 게 걔 입봉작인데, 그 전까지는 저랑 같이 일하기도 했었습니다.”
게다가 양진철 PD와도 친한 사이라니.
그렇다면 더더욱 넘어갈 수 없지.
“아하. 입봉작이시구나. 그러면 드라마가 최대한 잘되셔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예? 걱정이요?”
“네. 출연 배우가 갑자기 학폭 이슈가 터진다거나 그러면 드라마에도 피해가 가잖아요? 입봉작인데 그런 일은 없으셔야 할 텐데.”
“학폭이요?!”
“요즘 한창 이슈잖아요. 제가 아는 배우 한 명도 최근 지상파 드라마에 출연하는데… 그 배우가 사실 고딩 때 쌩양아치였던 거 있죠? 오토바이 타고 술 먹고 다니는 거야 개인의 일탈이라지만, 후배들 돈 뺏고 동급생들 패고 그러는 건 아니잖아요.”
역시나 눈치가 빠른 양진철 PD.
처음에는 놀란 얼굴을 하더니, 이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씨익 웃는다.
“그렇죠. 허어, 그런데 작가님 말씀을 들으니 저도 괜히 걱정이 되네요. 준태 그놈 입봉작인데 혹시 출연진 중 그런 배우가 있기라도 한 건 아닐지. 아무래도 한번 확인해 보라고 해야겠습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널 필요가 있으니까요.”
“하하!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그렇게 말한 양진철 PD가 정의감을 불태우는 듯한 얼굴을 했다.
“만약 그런 배우가 있으면 혹시 기사라도 뜨기 전에 빨리 하차시키는 게 낫겠네요. 그리고 다시는 방송국에 발을 못 들이밀게끔 다른 PD들에게도 널리 알려야겠고요.”
후우.
그나저나 내 일도 아닌 담당 PD의 후배 PD 일까지 이렇게 신경 쓰다니.
나, 착해도 너무 착한 거 아닌가?
이렇게 착해서 내가 과연 이 험한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나 있을는지 모르겠다.
착해 빠진 것도 문제인데 말이야.
스스로가 참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쪼옵-
커피가 참 달다, 달아.
누가 나 몰래 설탕이라도 넣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