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작가님 오셨습니까?
‘아니, 그래도 스피커폰은 좀…….’
양진철 PD가 멈칫거리며 최진섭 CP를 보았다.
하지만 그런 양진철 PD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진섭 CP가 어서 받으라는 듯 턱짓을 했다.
“…….”
‘어휴. 그래… 까라면 까야지, 뭐.’
하는 수 없이 양진철 PD가 전화를 받아들고 스피커폰 모드로 전환했다.
“아, 안녕하세요, 작가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예. 저는 잘 지냈습니다. PD님은요?]
“하하. 저야 항상 뭐 똑같죠.”
양진철 PD가 처음에는 신변잡기식으로 통화를 이어 갔다.
하지만 이내, 선우진이 드라마 계약 관련 얘기를 꺼냈다.
[PD님, 저 드라마 계약 관련해서 부모님께 허락받았어요.]
“아! 다행이군요. 그러면 저번에는 작가님이 일산까지 오셨으니, 이번에는 제가 근처로 찾아뵐까요? 아무래도 작가님 부모님도 만나 뵙고 해야 하니까요.”
[아뇨. 계약은 저번처럼 제가 찾아가는 거로 할게요. 어차피 부모님께서 바쁘셔서 동의서로 대신할 거거든요.]
“예. 작가님 편하신 대로 하십쇼. 하하, 그러면 이번에는 저번에 대접 못 해 드린 식사라도 한 끼 하시는 게 어떠세요? 방송국 근처에 괜찮은 집들이 여럿 있거든요.”
[네. 저야 좋죠. 아, 그런데요. PD님. 그때 얘기했던 계약 내용이요. 조금 바꿀 수 있을까요?]
‘…음.’
옆을 보니 최진섭 CP가 묘한 눈길로 양진철 PD를 바라보고 있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의미를 알기 쉬운 눈빛이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말하지 않았냐.
뭐, 이런 의미가 담긴 듯했다.
“아, 계약 내용이요. 혹시 그때 말씀하셨던 회당 고료 관련해서인가요?”
[네. 저번에 제시해 주신 금액은 좀 적은 것 같아서요.]
“예. 작가님. 안 그래도 제가 먼저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하하.”
[…….]
“사실 저번에 말씀드린 게 회당 고료로 최대 400만 원까지 드릴 수 있다 했잖아요? 그런데 아무래도 작가님께서 더 좋은 조건을 원하시는 것 같으셔서… 제가 윗선에 직접 말을 꺼내 봤거든요. 회당 500만 원! 어떠신가요?”
[흐음. 500보다 더 높이는 안 되는 건가요?]
‘이런.’
양진철 PD가 눈치를 보듯 최진섭 CP를 살폈다.
“쯧.”
아니나 다를까.
참나,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믹스커피를 타 마시고 있던 최진섭 CP가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그러더니 ‘야, 짤라 뭐 돈 맡겨 놨어? 뭐 이리 당당해?’ 하고 타박한다.
혹여 소리가 통화 너머로 들어갈까 싶었던 양진철 PD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아아. 작가님 그게…….”
사실, 양진철 PD도 마음 같아서는 고료로 더 큰돈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그걸 결정할 수 있는 건 그가 아닌 최진섭 CP다.
그리고 눈치를 보아 하니 최진섭 CP는 고료 인상을 절대 허락해 줄 것 같지 않았고.
‘아이고.’
그래도 혹시 몰라 간절한 눈빛을 최진섭 CP에게 보내는 양진철 PD였다.
하지만 그 눈빛을 본 최진섭 CP가 곧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거절의 의미였다.
“…사실 회당 500이 저희가 신인 작가님들에게 드릴 수 있는 최고 대우거든요.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이게 드라마국 내에 존재하는 암묵적인 룰 같은 거라서요.”
하는 수 없이 양진철 PD가 고료 인상은 힘들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네. 알아요. 그러니까 ‘신인’이 아니면 그 룰을 지킬 필요가 없어지는 거 아닌가요?]
통화 너머로 선우진 작가의 말이 들려온다.
이게 무슨 뜻이지.
꼭 자기가 신인 작가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선우진이었다.
양진철 PD가 약간의 궁금증을 담아 입을 열었다.
“어… 어어. 그렇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작가님께서는 이번이 입봉작이시니까…….”
[아닌데요?]
“예?”
[이번이 입봉작. 아니라고요.]
“…예?”
이건 또 뭔 소리래?
선우진의 말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진 건 양진철 PD와 최진섭 CP 둘 모두 마찬가지였다.
“작가님, 혹시 그게 어떤 뜻인지 조금 더 자세하게 들을 수 있을까요?”
[아, 제가 중국에서 드라마 하나를 계약했거든요. 제가 쓴 소설 하나가 요새 중국에서 인기가 좀 좋은데, 드라마화 제안이 왔거든요. 제가 거기 드라마 작가로 참여하게 됐어요. 그러니까 입봉은 이미 한 셈이죠.]
“아아. 그러니까 작가님께서 소설을 쓰셨는데 그게 중국에서 드라마화가… 예?”
조금은 멍청한 광경이었다.
10초도 되지 않아 ‘예?’라는 물음을 벌써 세 번째 던지고 있는 양진철 PD였으니.
하지만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도저히 선우진의 말이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설을 썼다니…….
그래, 거기까지는 오케이.
그런데 그게 중국에서 인기가 좋아서 드라마화가 되고, 거기에 드라마 작가로 참여한다고?
그거 꼭…….
“헙!”
순간 놀라 입을 닫는 양진철 PD였다.
선우, 선우진.
선우진, 선우.
그때 떠올린 칼넘강 작가의 필명이 추측에 확신을 더했다.
“서, 설마… 선우진 작가님께서 쓰셨다는 소설이 칼, 칼잡이가 너무 강함입니까?”
[어? 예. 맞아요. 어떻게 바로 아셨네요? 필명 때문인가?]
“미친……!”
[……?]
“아, 아아…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양진철 PD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뱉었다.
지금 그가 들은 게 모두 사실이라면, 아까 전 그가 그토록 부러워했던 월 7억 작가가 바로 선우진이라는 소리였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뭐야? 무슨 얘기를 하는 건데 이렇게 놀라? 칼잡이 뭐? 중국은 또 뭔 얘기고?”
사정을 모르는 최진섭 CP가 옆에서 물었다.
돌아가는 꼴이 뭔가 이상했으니 궁금증이 도진 것이다.
하지만 대답해 줄 겨를이 없는 양진철 PD였다.
양진철 PD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잠깐만. 분명 기사에서 칼넘강의 드라마 제작비 추정치가 100억 원이라 하지 않았나?’
그가 이번 드라마 기획에 배정받은 예산의 수 배를 훌쩍 넘는 금액이다.
100억 원의 제작비면 한국 기준으로도 상당히 높은 액수였다.
‘고등학생 작가가… 알고 보니 월 몇 억을 버는 소설가였고, 심지어 중국에서 100억 원짜리 드라마도 만든다고?’
누가 이걸 믿을 수 있을까.
당장 지금 자신도 너무 놀란 나머지 욕을 뱉을 정도였다.
장담컨대, 이건 한동안 한국을 뒤흔들 수도 있을 정도의 빅뉴스였다.
왜, 한국인들이 가장 열광하는 코드들이 바로 외국에서 활약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과 어린 천재이지 않은가.
‘그중 하나도 아니고, 국뽕과 천재 모두를 갖춘 거지.’
고작 19살의 나이로 벌써 인세로만 10억 원을 벌었고, 앞으로의 수익은 최소 몇십 억 원이 될 작가.
심지어 그 작품은 무협의 본고장이라는 중국에서 100만 부가 넘게 팔리고 드라마까지 제작이 된다.
그런데 그런 작가가…….
‘직접 드라마를 쓴다 이거지, 그것도 지상파 방송국에서.’
뉴스가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을 거다.
온갖 인터넷 뉴스와 커뮤니티에서 이 소식을 퍼 나를 거고, 심지어 그가 근무하는 SBC는 물론 다른 지상파 방송국 뉴스에서도 이 소식을 몇 번이나 떠들 거다.
그리고 그건 고스란히 드라마의 홍보로 이어지게 될 터였다.
즉, 엄청난 마케팅 효과가 자동으로 생기게 되는 것.
“저… 작가님, 작가님께서 선우 작가님이라는 걸 제게 말씀하셨다는 건, 그걸 숨길 생각이 없으시단 거겠죠?”
[예. 그렇죠. 뭐, 따로 홍보 기사라도 낼까 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런 건 방송국에 계신 PD님이 더 전공이실 것 같아서.]
“하하. 그럼요. 그럼요. 제 동기 중에 보도국에서 일하는 놈들이 한 트럭입니다.”
“아니. 뭔 소리를 하는 거냐고. 나도 좀 알자.”
최진섭 CP가 계속해서 옆에서 궁시렁거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깔끔히 무시한 후 생각을 이어 가는 양진철 PD였다.
‘이건 된다. 무조건 된다.’
당장에라도 그가 제작하게 될 드라마의 장밋빛 미래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물론, 사전 홍보가 잘된다고 해서 모든 드라마가 성공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드라마의 성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재미.
실제로 양진철 PD가 그간 가장 걱정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공모전용으로 제출한 2회본까지야 당장에 제작하고 싶을 만큼 재밌었다지만, 과연 3회, 4회… 나아가 드라마의 후반부까지 그 재미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아직 19살밖에 되지 않은 작가가?
뭐, 그런 걱정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선우진이 선우 작가였다는 걸 알게 되니, 그런 걱정이 싸그리 사라져 버렸다.
재미를 잘 뽑을지 걱정한다고?
누구를? 안늙강과 칼넘강을 쓴 선우 작가를?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그렇기에.
“작가님! 집필료 올려 드리겠습니다!”
생각을 끝낸 양진철 PD가 이렇게 소리쳤다.
그걸 들은 최진섭 CP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 얼마로요?]
“회당 2,000! 2,000만 원 어떠십니까?! 정말로 저희가 드릴 수 있는 최고 대우입니다.”
“…야이 씨! 너 미쳤어?”
이제는 휘둥그레지다 못해 욕지거리를 퍼부으려는 최진섭 CP였다.
양진철 PD가 검지를 입술에 가져가 조용히 하라는 뜻을 전했다.
그 모습에 더욱 어이없어 하는 최진섭 CP였지만, 양진철 PD는 아랑곳하지 않고 선우진과의 통화를 이어 갔다.
당장 중요한 건 최진섭 CP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계약 의사가 있는 선우진과 어서 계약을 확정짓는 거였다.
그리고 AD 시절부터 최진섭 CP의 라인을 타고 있는 양진철 PD였으니, 이 정도 독단으로는 딱히 크게 뭐라 하지도 않을 거다.
오히려 사정을 알고 나서 칭찬하면 칭찬했지.
어쨌든.
“하하! 예! 작가님. 그러면 그때 뵙는 거로 하겠습니다. 예, 들어가십쇼.”
몇 분 후.
양진철 PD와 선우진의 통화가 끝났을 때.
“야, 인마! 너 진짜 미쳤어? 2,000은 뭔 2,000이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고딩한테?!”
여전히 선우진을 고딩이라 칭하는 최진섭 CP에게 양진철 PD가 소리쳤다.
“어허! 고딩이라뇨! 작가님이십니다! 선우진 작가님!”
* * *
“선우진이라는 이름으로 예약된 방이 어디죠?”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몇 시간 전 양 PD와의 통화를 마친 나는 지금 다시 일산에 와 있었다.
‘24부작이면 다 합쳐서 4억 8천인가? 그래도 고료가 조금 오르니까 꽤 쏠쏠하네.’
전화로 얘기를 했던 계약을 마무리짓기 위해서였다.
양 PD 쪽에서는 우리 집 근처로 오겠다 했지만, 그건 내가 거절했다.
괜히 집 근처 돌아다니다 부모님이나 부모님 지인을 마주칠 수도 있을 테니.
아버지가 주민 자치 위원회인가 뭔가를 하셔서 동네 여기저기 나를 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어쨌든.
드르륵-
종업원이 안내해 준 문을 열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니, 양 PD와 처음 보는 사오십 대 남성이 보였다.
나를 본 그들이 일어나서 나를 반겼다.
“아이고오! 작가님 오셨습니까? 오시는 길 불편한 건 없으셨죠?”
그렇게 말하며 두 손으로 내 손을 잡는 사오십 대 남성.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반가운 것처럼 인사를 하길래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는 미묘한 표정을 한 채 내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양 PD가 있었다.
“하하. 앉으시죠. 아, 저는 SBC 드라마국 1팀장 최진섭 CP입니다.”
“안녕하세요. 선우진입니다.”
최진섭 CP라.
기억에 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뭐, 예전 신인 배우 시절의 나는 CP와 마주칠 짬이 못 됐었으니 당연했다.
아무튼.
“작가님, 대본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하하, 제가 아직 PD였다면 이놈한테 양보하지 않고 제가 메가폰을 잡았었을 정도로요.”
CP치고는 꽤 친절한 양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