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차이나 머니, 굿 머니
“자, 저번 시간에 21번 문제까지 했었나? 22번부터 다시 살펴보자. Prior to file-sharing services, music albums landed exclusively…….”
개학 이후 학교에서 내가 집중하는 몇 안 되는 영어 시간.
‘파일 공유 서비스 이전에, 음악 앨범은 독점적으로…….’
나는 선생님의 영어 읽기에 따라 지문을 살폈다.
같은 반의 다른 아이들처럼 수능 공부를 하는 건 아니다.
원래 연영과를 준비했었던 만큼 수능은 널널한 최저 기준만 맞출 정도면 됐고, 대학 진학을 반쯤 포기한 지금은 수능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
내가 지금 영어 지문 읽기에 집중하고 있는 건… 그냥 신기해서다.
‘해석이 꽤 잘된단 말이지.’
수능 난이도의 지문이 그리 어렵지 않게 해석이 된다.
뭐, 머릿속에서 전치사나 to 부정사 같은 문법이 떠오른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읽다 보니 무슨 뜻인지 자연스럽게 알겠다.
중간중간 모르는 단어가 있어서 약간 버벅이기는 하는데, 그래도 어찌저찌 알아먹는 정도는 가능했다.
물론 내가 회귀 이전부터 영어를 잘했던 건 아니다.
그나마 전 과목 중 가장 시험 성적이 나은 과목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수능 지문을 쭉 읽는 것만으로도 해석이 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랬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꽤나 자연스럽게 해석이 된다.
그러니까, 개학하고 나서 고작 한두 달 영어 시간에 집중했다고 이렇게 된 거다.
‘처음에는 회귀도 했으니 영어나 익혀서 나중에 외국 여자들과 대화 나눌 때 써 볼까 하고 집중한 건데…….’
지금은 내 실력이 쑥쑥 느는 게 스스로도 느껴져서 그런가, 영어 공부가 꽤 재밌다.
이런 걸 보면 정체 모를 회귀자 특전에 대한 내 추측이 어느 정도 맞는 것 같았다.
‘아마 내가 갖고 있던 재능이 더욱 극대화된다거나… 그런 류.’
뭐, 영어 학원이라고는 연기를 시작하기 전 중학교 때 몇 년 다녔던 게 전부인데, 남들 평균 이상은 했었으니까.
그래도 영어에 재능은 있었다는 소리겠지.
아무튼 과거로 온 내가 웹 소설 천재가 된 것처럼, 영어도 예전보다 잘하게 됐다.
머리가 엄청 좋아졌다거나 갑자기 공부를 전체적으로 잘하게 됐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내가 회귀 이전에 가장 끔찍하게 느꼈던 과목, 수학.
원래도 젬병이었던 그건 각 잡고 공부 한번 해 볼까 하고 몇 시간 집중해도 여전히 머릿속에 하나도 안 들어오더라.
‘그러니까 원래도 잘했거나 재능 있던 건 더 잘해지게 되는 거고… 원래도 재능 없던 거였으면 꽝인 거고.’
이것저것 실험해 본 덕분에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말인즉슨, 여전히 변함없는 내 연기력을 미루어 생각해 보았을 때, 내게는 연기 재능이란 게 정말 눈곱만큼도 없었다는 소리였다.
뭐… 내가 지난 삶에서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망 없는 목표에 시간을 낭비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번 생에는 내가 가진 재능이 뭐였는지 찾는 것도 재밌겠어.’
우선 지금 찾은 건 두 개.
과거로 오기 전에도 스스로 나쁘지 않다 생각했던 글 쓰는 재능이랑 영어 재능.
어쩌면 영어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외국어에 대한 재능일 수도 있었다.
그걸 확인해 보기 위해 중국어도 한번 공부해 볼 생각이었다.
사실, 중국어 공부는 해야 할 만한 이유가 있기도 했다.
‘아무래도… 내가 중국에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것 같으니까.’
[편집자: 작가님! 축하드립니다. 중국에서 또 증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ㅎㅎ] - 1시간 전.
아까 쉬는 시간에 확인한 편집자의 톡이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손가락을 놀려 톡창을 쭉 올려 봤다.
[편집자: 작가님! 중국에서 초판 부수가 거의 매진되고 있어서 첫 증쇄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 13일 전.
13일 전에 온 연락이 첫 번째 증쇄.
[편집자: 선우 작가님! 축하드립니다! 증쇄 물량이 다 매진될 기미라 추가 증쇄한다네요! ㅎㅎ] - 6일 전.
6일 전에 온 게 두 번째 증쇄.
그리고 아까 받은 연락이 세 번째였다.
‘분명 두 번째에는 첫 번째보다 훨씬 넉넉하게 발행한다 했는데…….’
그게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거의 다 팔려 버린 거다.
처음 증쇄 연락이 왔을 때만 해도 중국 내에서 칼넘강의 종이책 판매가 심상치 않다는 것 정도만 들었었는데… 지금 보니 그냥 심상치 않은 정도로 끝나지가 않은 것 같았다.
‘이러면 거의 40만 부? 그쯤 팔린 건가?’
한 달 반 동안 팔린 게 40만 부.
중국어로 번역된 분량이 6권이었으니, 거의 권 당 7만 부를 판 것이었다.
심지어 40만 부 중 30만이 넘는 부수가 최근 2주 사이에 판매된 물량이었다.
“…….”
내 책이 중국에서 한 권 팔릴 때 내가 받는 돈이 얼마였더라.
4위안이 조금 안 되니까 대충 700원 정도다.
그러면 700 곱하기 40만은…….
‘2억 8천만 원.’
말이 안 나오는 액수다.
그중 저번 달 종이책 인세로 받은 게 700만 원이었으니, 그것을 빼더라도 다음 달에 들어올 인세가 대략 3억 원이다.
그것도 종이책으로만 따졌을 때의 얘기다.
종이책 시장에서의 흥행과 더불어 웹 연재의 조회수도 껑충 뛰었다고 한다.
웹 연재에서는 번역이 되는 대로 실시간으로 최신화가 업데이트되니까, 서점에서 책을 구매해 읽은 독자들이 다음 내용이 너무 궁금한 나머지 인터넷을 찾아본다는 것이었다.
아마 종이책만큼은 아니어도 지난 달 수익보다 두 배 이상 오르기는 하겠지.
그렇게 되면…….
‘월4억킥?!?!’
이거 참.
월억킥 선우로 진화한 지 얼마나 됐다고 수익이 이렇게 뛰다니.
다음 작품도 무협을 써야 하나?
아니면 요즘 중국에서 유행한다는 선협물?
원래는 초심으로 돌아가 내가 처음 썼던 웹 소설 장르인 스포츠물을 쓸까 했었는데… 고민이 되는 순간이었다.
* * *
학교가 끝나자마자 택시를 타고 일산으로 향했다.
오늘 이곳에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착하고 약속 장소였던 카페로 들어가 보니, 약속 시간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었다.
나는 노트북을 꺼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탁- 타닥-
‘칼넘강도 슬슬 완결이네.’
내가 칼넘강의 완결 화수로 잡았던 건 350화.
어제 올린 최신화가 337화였으니, 아마 빠르면 내일이나 모레쯤 완결이 날 것 같았다.
JP미디어는 물론 중국 출판사 측에서도 분량을 더 늘려 주면 안 되냐고 여러 번 요청이 오기는 했는데… 고민 끝에 그러지 않기로 했다.
중국에서 오는 수익이 혹할 정도로 달달하기는 해도 원래 계획대로 끝내는 게 가장 맞는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무튼.
‘아직 안 왔나?’
오늘 약속은 예전에 내가 보냈던 드라마 공모전과 관련된 약속이었다.
며칠 전에 연락이 왔었는데, 내 대본이 최우수상으로 선정됐다고 했다.
가장 높은 상인 대상은 아니었다.
뭐, 대상을 못 탔다고 실망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내가 쓴 배우물 ‘천재 배우가 되다(가제)’가 어느 정도 드라마에도 잘 맞는 장르이기는 해도, 완벽하게 알맞은 건 아니었으니까.
공모전의 심사 위원을 맡았을 기성작가들이나 CP, PD들이 보기에는 최고 상을 주기 애매했겠지.
최우수상에도 충분히 만족했다.
상금이 3,000만 원이나 되기도 했고.
아무튼, 그래서 내가 일산에 와 있는 거다.
내가 대본을 보낸 SBC의 제작 센터가 이곳에 위치해 있으니까.
‘사실 상금은 SBC보다 다른 방송국들이 더 높기는 했는데…….’
그런데도 SBC를 택한 건 다른 방송사에는 존재하는 인턴 작가 과정이 SBC에는 없기 때문이었다.
공모전에 대본을 제출하려고 인터넷을 뒤적이다 알게 된 사실인데, 사실 방송 3사의 공모전은 말이 공모전이지 드라마 작가 지망생들한테는 기업의 입사시험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기업에서 신입을 뽑는 것처럼 공모전을 통해 방송국이 드라마 작가를 채용하는 시스템이었다.
작가들은 공모전에서 입상하게 되면 해당 방송사한테서 별도의 월급을 받으면서 인턴 작가로 활동하게 된다더라.
그리고 인턴 작가가 되면 의무적으로 6개월에서 1년 사이의 기간 동안 담당 PD랑 작품 기획, 논의도 하고 다른 입상 작가들하고 합평회도 해야 했다.
그런데 SBC만큼은 몇 년 전에 인턴십 제도가 폐지되어 유일하게 인턴 작가 과정이 없었다.
입상만 하면 곧바로 드라마 작가로 활동할 수 있는 거였다.
그래서 다른 방송국을 제치고 SBC 공모전을 택한 거였다.
우우웅-
스마트폰이 울려 확인해 보니, 오늘 만나기로 한 담당 PD였다.
벌써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예. 여보세요.”
나는 전화를 받아들고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입구 쪽에서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나를 살피는 남성이 한 명 보였다.
“아, 여기예요. 지금 손 들고 있어요.”
“어… 어어, 예! 찾았습니다.”
서로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SBC의 양진철 PD입니다. 선우진 작가님 맞으시죠?”
“네. 하하, 아닌 것 같나요?”
이렇게 물은 건 양진철 PD가 내 얼굴을 계속 힐끔대면서 머리를 갸우뚱하고 있어서였다.
“예. 처음에는 노트북을 앞에 놓고 타자를 치시기에 작가님이신가 보다 했는데, 얼굴을 보니까 너무 작가상은 아니셔서… 하하. 신인 배우이신 줄 알았어요.”
“그런가요? 사실 배우를 준비하기는 했었어요. 뭐, 재능이 없어서 금방 때려쳤지만요.”
“정말요? 아니, 얼굴만 보면 당장 데뷔하셔도 될 것 같은데…….”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딴 병신 같은 연기력을 가지고 뭔 배우야, 당장 때려쳐!’
예전에 내가 조연을 맡았던 한 미니시리즈의 담당 PD에게서 들었던 발언이다.
결국 그 배역에서 잘리고, 내 연기 인생 마지막 촬영이 됐었다.
그리고 그때의 담당 PD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양진철 PD였다.
‘이렇게 보니까 또 반갑네.’
그랬던 사람이 나보고 당장 데뷔해도 될 것 같다고 하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뭐, 양 PD한테 악감정은 없다.
당시에는 심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 짜증도 났었지만… 며칠 뒤에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 보니 양 PD의 말에 틀린 게 하나 없다는 걸 알게 됐었다.
어찌 생각해 보면 내게 도움을 준 것이기도 했다.
내 가망 없던 배우 지망생 생활을 조금이라도 일찍 끝나게 해 줬으니 말이다.
그리고 양 PD의 성격은 실제로도 별로 나쁜 편이 아니었다.
내게 막말에 가까운 발언을 하기는 했었지만, 촬영 현장에서 그 정도의 까칠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내 연기가 그만큼 심했던 것도 사실이었고.
게다가 처음에는 신인 배우인 나한테도 꽤 친절하게 대했던 양 PD였다.
지금 미성년자인 나한테 정중히 예의를 차리는 모습만 봐도 그랬다.
어쨌든.
“…작가님, 입봉하시게 되면 제가 담당 PD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하하. 사실 심사위에서 제가 가장 높은 점수를 줬던 게 작가님 작품이었어요.”
“아, 그렇나요?”
“예. 기존 드라마들하고는 결이 조금 다르기는 한데… 뒷 내용이 너무 궁금한 게 이건 무조건 되겠다는 확신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제작하고 싶다고 연락드린 거고요.”
양 PD와의 대화는 꽤 순조로웠다.
아무래도 양 PD가 내 대본에 제대로 반한 건지, 작가인 나에 대한 호감도가 벌써부터 최고 수준이었다.
사실, 이렇게 공모전에 당선돼도 드라마 작가로 데뷔하는 건 원래 엄청 요원한 일이라고 한다.
당선된 작품을 무조건 제작해 주는 건 옛날에나 그랬던 거고, 실제 촬영에 들어가기까지에는 1년이 넘게 걸리기도 하는 게 흔하단다.
아예 기획 단계에서부터 엎어지고 새 기획으로 도전해야 하는 경우도 흔했고.
물론, 내가 신경 쓸 얘기는 아니었다.
애초에 오늘 만남은 그냥 공모전 수상 때문이 아니라, 내 대본을 빠른 시일 내에 제작하고 싶다 해서 그 계약을 위해 만난 거였으니.
그런데 딱 하나.
계약에서 조금 걸리는 게 있었다.
“어… 회당 고료는 제시해 주신 금액이 최선이신 거죠?”
SBC 측에서 제시한 내 회당 고료가 300만 원이라는 거.
이게 분명 적은 돈은 아닌데…….
16부작이 기본이니, 거의 5,000만 원은 되는 큰돈인데…….
요새 중국에서 벌어들이는 게 진짜 억 소리 나서 그런가, 뭔가 마음에 썩 들지는 않네.
“예. 어… 고료 인상을 원하시면 최대 이 정도까지 맞춰 드릴 수 있습니다.”
양 PD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 네 개를 펴서 보여 준다.
“이게 입봉 작가님들한테는 일정 고료 이상을 드릴 수가 없어서요. 뭐, 룰 같은 건 아닌데 방송계에서 암묵적으로 조금… 하하.”
그렇게 말하며 민망한 웃음을 짓는 양 PD였다.
으음.
뭐, 나도 잘 알고 있다.
방송계가 이런 암묵적인 룰 같은 것에 꽤 민감한 곳이라는 것을.
그런데.
우웅-
그때였다.
내 스마트폰이 작게 울렸다.
나는 확인해도 괜찮다는 양 PD의 제스처에 슬쩍 톡의 내용을 살폈다.
…어라?
“잠깐만요, PD님.”
“예?”
“그러니까… ‘신인’ 작가한테는 그 금액 이상은 힘들다는 거죠?”
그러면 신인이 아니게 되면 해결되는 거잖아?
[편집자: 헉! 작가님! 대박! 대박 초대박입니다! 채널 CHIN이라고 중국 드라마 전문 채널에서 작가님 작품을 드라마화하고 싶답니다!]
내가 조금 전 확인한 톡의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