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도 잘하는 놈이 잘한다-7화 (7/267)

7화 이 계좌로 보내시면 돼요

나, 선우진.

아직 죽지 않았구나.

미래에는 매일같이 키보드랑 씨름하느라 연애는커녕 여자 구경을 몇 년은 못 했었는데…….

역시 그건 내 탓이 아니었어!

웹 소설 작가라는 직업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고!

‘잠깐만. 내가 겉은 19살이어도 속은 28살이잖아. 이러면 범죄 아닌가?’

…는 무슨.

다시 생각해 보니 범죄 아니다.

9년 더 살다 과거로 왔다고 해서 내가 19살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잖아?

즉, 나도 19살이고 걔도 19살.

그런고로, 아무런 문제없음.

땅땅-!

‘뭐, 번호 하나 따갔다고 벌써부터 사귈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오랜만에 있는 여자와의 접촉이 기뻐서 잠깐 망상한 것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웹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밤늦게 나가 노는 삶보다는 모니터 앞에서 활자와 씨름하는 삶이 더 익숙해진 게 자그마치 5년이지 않은가?

그 탓에 주위 친구들한테서 너는 기껏 멀쩡한 하드웨어를 타고나 놓고 왜 그걸 안 써먹냐는 타박도 자주 들었었다.

‘이번 생에는 안 그래야지.’

회귀자 특전 덕분인지, 글 쓰는 속도가 예전의 나와 비할 수 없이 빨라진 지금의 나다.

하루에 남들 쓰는 분량의 몇 배를 쓴다 하더라도 여가 생활을 즐길 시간은 충분하고도 남을 거다.

게다가 비트코인 떡상이 그리 머지않았다.

투자금을 최소 30배 이상 불릴 수 있는 기회가 내년 초쯤.

그때까지는 시드 머니를 위해 작품 활동에 전념하겠지만, 그 이후부터는 나도 이것저것 하면서 삶을 즐길 생각이다.

회귀 전에는 기껏 잘생기게 태어나 놓고 몇 번 못했던 연애도 실컷 해야지.

톡, 토도독-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핸드폰에 찍힌 정하연의 번호를 저장했다.

가면서 내가 찍어 준 번호로 전화 한 통을 남긴 정하연이었다.

‘정하연… 얘가 내년에 데뷔했었나? 내후년인가?’

과거 기억을 조금 더듬었다.

아마 내년이 맞을 거다.

내가 어찌저찌 모 대학의 연극영화과에 진학해서 대학 생활에 이제 막 적응할락 말락할 때, STR엔터에서 걸 그룹을 론칭했던 때가 바로 그때였으니까.

거기에 정하연도 속해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으음.

그런데 그 걸 그룹이 어떻게 됐더라.

‘한 몇 달 음악 프로 정도에만 나오다 그 이후로 못 봤던 것 같은데…….’

앞서 말했듯, STR엔터의 아이돌 파트는 9년 후에도 중박짜리 보이 그룹 하나 키워 낸 게 전부인 곳이다.

바꿔 말하면 내년에 데뷔하는, 정하연이 속하게 될 걸 그룹은 쫄딱 망한다는 소리였다.

내 어렴풋한 기억으로도 정하연을 TV에서 본 게 데뷔 초 음악 방송 몇 번 정도가 전부지, 그 이후로는 없었을 정도다.

‘외모만 보면 톱 티어 아이돌급인데 말이지.’

그런 애가 내 번호를… 흠흠.

아무튼.

쟤가 내 번호 따갔다고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까 봤던 동글동글한 눈도, 웃을 때 접히는 매력적인 입매도 정말 귀여웠다.

실패한 걸 그룹의 일원이라고는 생각 못 할 정도다.

내가 예전에 군대에 있던 시절 한창 유행했던 여자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거기서 외모로 화제가 됐던 몇몇 연습생들과 비슷한 수준이다.

아마 정하연도 그 프로그램에 나왔다면 외모만으로도 초반에 꽤 인기를 끌었을 거다.

어쨌든.

그런 정하연이 데뷔 이후 소리 소문 없이 묻혔다니.

조금 신기하기는 했다.

하지만 뭐…….

연예계가 이쁘다고 다 뜰 수 있는 곳도 아니고.

생각해 보면 정하연 같은 경우는 생각보다 흔한 경우다.

데뷔곡이 별로라거나, 운이 없었다거나, 회사의 힘이 별로라거나 등등.

여러 이유로 한참을 노력해도 뜨지 못하는 게 연예계, 특히 아이돌판이다.

왜, 당장 몇 년 후에도 그런 이유로 묻혀 있다가 직캠 하나 유튜브에 올라왔다고 무서운 역주행을 일으킨 걸 그룹도 있지 않은가.

심지어 그 그룹은 그 노래만 잘나간 게 아니라 그 이후로 한동안 1티어 아이돌 취급을 받을 정도로 전성기를 가지게 된다.

‘뭐, 얼굴 예쁘다고 다 성공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지.’

재능이 있다고 모두가 성공할 수는 없다.

연예계라는 곳은 특히 더 그렇다.

재능도 없던 내가 하기에는 조금 웃긴 말이지만, 하여튼 내가 봐 온 연예계는 그랬다.

‘회귀자 특전이 연기력도 높여 줬으면 좋긴 했을 텐데.’

상태창이나 이능력 같은 게 생긴 건 아니지만, 나는 내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 말고도 또 다른 축복을 받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집필 속도와 엄청나게 늘어난 필력.

이건 분명 내가 회귀하면서 받은 특전임이 틀림없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가 없다.

아무튼, 조금은 아쉽게도 그런 내 회귀자 특전은 연기력에서는 전혀 발휘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얻은 특전이 내 직업이었던 웹 소설 작가와 관련된 거라 그전 직업이었던 배우와도 관련된 특전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전혀 없더라.

혹시나 싶은 마음에 방문 걸어 잠그고 혼자 독백 연기를 해 봤는데, 내 똥망 같은 연기력은 그대로였다.

‘괜찮아요? 많이 놀랬죠? 다친 덴 없어요?’

내년 즈음에 나올 한 옛날 보이 그룹 출신 연예인의 발연기.

고저 없이 꼭 로봇 같은 모습 때문에, 나중에는 밈(meme)화까지 되는 그 레전드 연기와 비슷한 수준 그대로.

그게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내 연기력 수준이었다.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물론 지금의 나는 배우에 대한 미련이 조금도 없다.

사실 나는 화려한 셀럽의 삶을 꿈꿨던 거지, 성공한 대배우가 되는 걸 원했던 게 아니니까.

후자의 삶은 회귀한 지금의 나로서도 힘들지만, 전자의 삶은 이제 얼마든지 달성 가능한 목표였다.

아무튼.

“야! 선우진!”

STR엔터에서 배우 파트를 담당하고있는 매니지먼트사업부 1팀.

내가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얼굴이 잔뜩 벌게진 채 나를 반기는 이가 있었다.

김대훈 따까리 1.

아니, 내 매니저.

이미 김대훈이 왔다 간 건지 내게 화난 기색이 가득했다.

“너 김 팀장님한테 다 들었어! 네가 연습생이지, 톱 배우야? 그딴 건방진 태도는 어디서 배운 거야? 너, 연습생 생활 그만하고 싶어?”

오, 바로 이렇게 본론으로 들어와 줄 줄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

“못 들으셨어요? 그만두고 싶다고요. 사실 오늘 그것 때문에 온 거예요.”

* * *

“…허, 이거… 허, 참나.”

그만하고 싶냐는 협박에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던 걸까.

이름도 가물가물한 내 담당 매니저는 계약 해지 과정 내내 눈만 껌뻑거렸다.

뭐, 덕분에 번거로운 과정 없이 계약 해지를 일사천리로 끝낼 수는 있었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회사가 내게서 붙잡을 만한 가치를 못 느꼈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부모님이라도 데리고 오지.”

“바쁘셔서요. 대신 동의서 가지고 왔잖아요.”

인감도장도 찍혀 있다.

물론 부모님 몰래 내가 찍은 거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너… 이렇게 우리랑 쫑내 놓고 다른 회사 들어가는 건 아니지?”

“네. 안 그럴 거니까 걱정 마세요.”

“그러면 그때는 위약금도 물릴 수 있으니까 명심해.”

그렇게 말하며 나를 노려보는 매니저다.

겁이라도 주려는 거겠지만, 내가 진짜 19살도 아니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래도 STR엔터의 좋은 점이 계약 해지에 따른 위약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건 아이돌 파트가 아닌 배우 파트의 연습생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였다.

그것도 나처럼 가망이 없던 연습생의 경우에만.

제대로 된 연습생들은 배우 파트이더라도 위약금이 존재하는 전속 계약으로 묶어 놓는다.

‘재능이 없었던 게… 이 경우에는 다행이려나?’

사실, 나는 원래는 STR엔터 연습생 오디션에 떨어졌던 몸이다.

오디션 때 보여 준 연기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내 비주얼은 잔뜩 칭찬해 놓고 정작 오디션에 합격시키진 않았었다.

그런 내가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연기 트레이닝비, 연습실 사용료 등등 원래라면 기획사에서 ‘투자’ 명목으로 부담했을 돈을 내가 부담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우리 부모님이 부담하셨던 거지만.

왜, 종종 그런 케이스가 기사에 나오곤 하지 않나.

기획사 측에서 연습생 교육을 명분으로 연습생에게 금전을 요구해 소송에 휘말렸다.

이런 거.

내가 그런 케이스였던 거다.

물론 STR엔터도 바보는 아니니까 원래라면 사기죄가 됐을 이런 계약을 편법으로 정당한 계약으로 탈바꿈시켰다.

별도로 학원으로 등록한 사업체를 하나 만들어서 나 같은 연습생들은 거기에 속하게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말이 연습생이었던 거지, 사실상 연기 학원을 다니는 수강생이나 마찬가지였던 거다.

여하튼.

“이걸로 끝인 거죠?”

“어. 이제 너 우리 회사 소속 아니다.”

“네. 그러면 환불금은 이 계좌로 보내시면 돼요.”

“……?”

내 말에 매니저가 눈을 꿈뻑거린다.

뭘 모르는 척해.

“저희 부모님이 2년 단위로 트레이닝 비용 매번 선지급했잖아요. 그거 원래 24개월짜리인데 7달 하고 그만두는 거니까 남은 건 돌려주셔야죠.”

“뭐, 뭐? 야, 너 여기 이 조항 안 보여?”

매니저가 그렇게 말하며 계약서의 한 부분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동의 보호자와 회사가 공동으로 투자하여 트레이닝을 시키고, 아동을 위해 회사에서는 많은 금액이 투자되므로 아동과 아동의 보호자 측의 귀책사유로 인한, 혹은 일방적 계약 파기 시 환불이 불가하다.]

내가 계약 해지 하겠다는 말에 회사가 군말 없이 오케이 한 건, 아마 저 조항 때문도 있을 거다.

트레이닝 명목으로 돈을 미리 받았는데, 그걸 꿀꺽할 수 있으니까.

응, 그런데 그런 거 나한테 안 통해.

탁. 타닥-

“네. 잘 보이기는 한데, 일단 이거부터 보시죠.”

“뭐야? 공… 공정거래위원회 시정 권고?”

나는 집에서 미리 뽑아 온 서류를 매니저한테 건넸다.

거기에는 계약서의 환불 불가 조항이 현행 학원법상 불법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내가 계약한 STR엔터가 대중문화예술기획업체가 아니라 학원인 덕분에 생긴 맹점이다.

즉, 계약서 조항은 좆까라고 하고 STR엔터는 내가 돈 달라고 하면 돈 줘야 한다는 뜻이다.

“제가 미리 변호사 상담도 다 받아 놨거든요? 이거 굳이 소송 갈 필요도 없이 그냥 돌려받을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아, 제가 말 안 했었죠? 저희 삼촌이 변호사신 거.”

“그… 래?”

“네.”

응, 구라야.

삼촌 없어, 나는.

“아니면 회사 법무 팀이랑 상의해 보세요. 뭐, 거기서는 그냥 돌려주라고 하겠지만.”

사실 걸고 넘어지면 무조건 회사가 패배하는 불공정 계약 조항이다.

그런데 이런 걸 굳이 넣은 건 아직 연예계에 대한 꿈을 못 버렸을 연습생들이 이런 것까지 따지지 않아서겠지.

게다가 아직 이맘때만 해도 3대 기획사가 아닌 이상 기획사가 연습생한테 교육비 명목으로 돈을 받는 게 당연해서도 있고.

아무튼.

“히야, 이게 얼마야. 부가세 포함 달에 110이었으니까… 1,870만 원?”

내게는 저 금액이 1,870만 원이 아니라 1,870억으로 보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