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표국 역대급 무공 천재 103화
대리 검수(劍手)(1)
금옥관의 주인, 금령공자 장운이 동료들과 함께 천세은의 복수를 완벽하게 마무리 지은 지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한 달 동안 장운은 혹시라도 소문이 새어나갔나 싶어 약간의 준비를 하였지만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사천 당문은 눈치를 전혀 채지 못했다.
오히려 사천 당문이 당분간 자중하며 봉문하겠다는 소문이 들려와 안심하였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일이 잘 풀렸군.’
천세은은 복수를 완성하고 사천 당문은 봉문을 선언하였으니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었다.
혹자는 사천 당문마저도 뿌리를 뽑아야 하지 않겠느냐 반문하겠지만 천만의 말씀.
완벽한 복수는 바로 복수의 대상이 감히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우뚝 서서 훨씬 나은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참된 복수이리라.
“장 가가. 제법 굵직한 의뢰인이 오나 봐요. 표국 입구에서부터 많은 소리들이 들리는군요.”
비옥수 천세은이 말했다.
그녀도 복수에 만족하는 듯 얼굴이 밝아졌다.
달라진 것은 또 하나 더 있었다.
과거 음침하고 어두운 기색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졌으며 장운을 보다 더 노골적으로 흠모하였다.
“과연 그렇구려.”
장운 역시 금옥관 바깥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도대체 누구인가 싶은 그때였다.
“장운 도련님! 국주님께서 의뢰인과 함께 오시고 있답니다.”
표두 감우량이 놀라운 소식을 알려왔다.
“네? 아버님이요?”
뜻밖의 소식에 두 눈이 휘둥그레 떠진 장운.
그가 차기 국주로 내정된 이후, 금령검객 장천호는 어느 정도 관망하며 노후를 조금은 편하게 보내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모처럼 공식 석상에 모습을 보인다고 하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이다!’
장운은 저 멀찍이서 아비인 장천호가 여러 검객들과 함께 대동하며 금옥관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목격하였다.
“다들 아버님과 의뢰인을 모시는 데 있어 소홀함이 없도록 준비해 주십시오!”
이에 만반의 준비를 갖춘 장운은 일행들과 함께 도열하며 그들을 기다렸다.
그들이 다가오는 동안 장운은 차분히 면면들을 확인했다.
‘아버님을 제외하고는 젊은 검객 셋과 노검수가 한 분.’
깔끔한 차림새로 보아 고명한 명문 정파의 무인이 분명했으며 동일한 복장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노검수와 세 명의 무인들은 동문(同門)이 틀림없어 보였다.
장운은 장천호가 수염이 아름다운 노검수와 정답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매우 친한 관계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장운아, 내 미리 연락도 없이 방문하여 미안하구나.”
모처럼 오랜만에 모습을 보이는 장천호가 일행을 이끌고 막내아들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아닙니다. 아비가 아들을 찾아오는데 연락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그저 방문해 주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장운은 공손하게 인사를 하며 아버지를 반겼다.
최근 들어 사천 당문의 무인을 상대하느라 총회에도 잘 나가지 못하고 이래저래 반가웠던 것이다.
“과연 장안의 화제라는 금령공자다운 기개와 마음씨로군.”
부자의 인사에 현묘한 분위기를 내풍기는 노검수가 참지 못하고 두 눈을 반짝였다.
“아버님. 실례지만 이 귀인께서는 누구신지…….”
“아, 내 정신을 좀 보게. 미리 소개를 한다는 것을 잊었군.”
장천호는 너스레를 떨며 이마를 한 차례 짚더니.
“운아, 인사를 드려야. 이분은 바로 항산파(恒山派)의 장문인이신 항산검옹(恒山劍翁) 진호충 대협이시다.”
“……!!”
순간 장운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 오대검파(五大劍波) 중 한 곳이자 천하제일검을 몇몇 배출한 강호 전통의 명문 검문이 아니던가?
더군다나 항산검옹 진호충은 무공 실력은 장문인치고 평범한 일류에 불과하더라도 평생 선행을 베풀며 가난하고 굶주린 자를 도운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나 흉년이 찾아오는 해면 장천호와 함께 어려운 이들을 살피곤 하였다.
‘물론 오래전 몰락하여 이제는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나 그 전통과 역사는 가히 존경할 만하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항산파와 함께 오대검파로 손꼽히던 다른 문파와 달리 크게 몰락을 하여 문원이 얼마 안 된다는 점이었다.
어찌나 몰락을 했던지 항산파에 몸을 담고 있는 인원이 채 열이 되지 않아 곧 멸문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황금표국의 장운이 항산파의 장문인께 인사를 드립니다.”
장운은 그래도 존경의 마음을 담아 말하였다.
이는 검신 시절부터 오대검파의 영향을 받아왔다고 생각했기에 존중의 의미였다.
“아닐세. 이 진 모야말로 훤칠한 장운 소협을 보니 개안하는 기분이 드는군. 으허허헛!”
진호충도 장운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호쾌한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에 비해 진호충의 제자로 보이는 항산파 젊은 검객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이들은 내 제자들일세. 뭣들 하느냐? 어서 장운 소협께 인사를 하지 않고.”
그들은 영 내키지 않은지 무례와 무심을 오가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항산파의 주진형이라 합니다.”
“규태입니다.”
“우만정입니다.”
아니, 약간은 삐딱하기까지 느껴졌다.
흡사 사부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뭐 그렇게 호들갑을 떠냐는 듯 보였다.
“이 녀석들이 정말…….”
진호충도 그런 제자들의 반응을 알아차렸는지 대노를 하려다가 주변의 눈을 살피고는 애써 꾹 눌렀다.
“흠흠, 장운 소협께서 이해를 해주십시오. 다 이러는 이유가 있으니…….”
제자는 무례할지 몰라도 사부는 무척이나 예의 바르고 깍듯한 인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항산파는 점점 그 생명이 다해 과거의 역사와 명예는 물론이고 현재는 장문인마저도 절정 고수들에게 우스운 취급을 받는 실정이었다.
더군다나 살림이 너무 어려워 금령검객 장천호와 오래된 친분이 아니었더라면 의뢰를 하러 오지 못했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뭐든 편히 말씀해 보시지요.”
장운은 장천호가 젊었던 시절, 이 항산파의 장문인인 진호충에게 도움을 받았다던 말을 상기하며 그를 편하게 대해주었다.
“그것이…….”
장운의 환대 때문일까?
잠시 주저하던 진호충이 어렵사리 말문을 떼기 시작하였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항산파의 사정이…… 그리 좋지 않네.”
“아닙니다. 오래된 거목(巨木)은 뿌리가 뽑히지 않는 법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일시의 어려움뿐입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여튼, 우리 항산파는 지금 여기 세 제자들과 그 밑의 더 어린 제자 몇몇, 그리고 일을 도와주는 오래된 하인들을 제외하면 인원이 없네. 문제는 이런 우리 항산파에 도전장이 날아왔다는 것이지.”
진호충의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네? 도전장 말입니까?”
너무 어이가 없다 못해 우스울 지경이었다.
현재 항산파의 사정이 어려운 것은 구파일방은 물론이오, 전 무림이 다 아는 실정이었다.
그런데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과거 항산파가 이룩한 여러 업적과 명예를 기리며 존중했기에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다.
그래서 항산파를 건드리지 않는 것은 무림에 있어 일종의 불문율이나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누가 감히?’
항산파가 힘이 없을지언정 함부로 건드렸다간 여러 무인들로부터 지탄을 받기에 건드리기 쉽지 않은 곳인데 누가 도전장을 보낸 것일까?
“그들은 우리 항산 인근 오대산(五臺山)에 세를 확장하여 온 자들이었다네. 회검문(灰劍門)이라고…….”
“회검문!”
회검문이라는 말에 반골 응운곤이 곧바로 반응하였다.
응운곤뿐만이 아니라 천세은이나 중원 각지를 돌아다니는 표두들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자신들을 하얀 정파도, 까만 사파도 아닌 중도(中道)를 지키는 회색이라고 표현하는 검객들의 집단인 회검문 말입니까?”
장운도 그들의 명성을 익히 들은 바 있었다.
위치가 황금표국과 제법 멀기에 그러려니 했는데 이 자리에서 회검문 이야기가 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바로 그들이네. 회검문은 세력을 확장하여 오대산 인근까지 뻗쳤고 나아가…… 우리의 생계까지 위협하게 되었네.”
“으으음.”
그 말에 장운은 깊은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까놓고 말해 싸울 수 있는 무인이 채 열 명도 되지 않은 항산파가 주변의 녹을 먹으면 얼마나 먹는단 말인가?
회검문이 하는 행동의 의미는 하나였다.
“인근의 세력을 독차지하려 하는군요.”
장운이 말했다.
그것은 완전한 정복이자 항산파에 있어 멸문을 의미하였다.
“그렇네. 더군다나 그들은 정파의 소속도, 사파의 소속도 아니니 우리 항산파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 존중을 보낼 이유도 없다며 화해 요청마저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지.”
진호충은 머릿속이 복잡하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시름에 잠겼다.
사람으로 따지면 노인과 같으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항산파와는 달리, 회검문은 한창 나이의 건장한 젊은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회검문주는 무림에 갑자기 툭 튀어나와 정, 사파 고수를 막론하고 모두 꺾는 파란의 비무행을 벌여 어마어마한 명성을 떨치는 작자였다.
“이런 무례한 놈들을 봤나. 설마 전면전을 펼치겠다고 그러던가요?”
장운마저도 막 나가는 회검문의 행동에 놀라움을 참지 못하였다.
“다행히도 그러진 않았고…… 그나마 우리 항산파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전쟁이 아니라 멸문(滅門)을 걸고 비무를 치르자더군. 우리 항산파와 회검문 측에 각각 다섯 명을 보내 더 많이 이기는 쪽이 승리를 차지하는 걸로 하자면서 말일세.”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다 죽어가는 항산파에 시비를 거는 것도 놀라울 따름인데 오 대 오 대결을 제안하다니.
물론 오 대 오 대결 자체는 집단 전쟁을 피하기 위해 문파끼리 많이 사용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뭘까요?”
뒤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감우량 표두가 물었다.
회검문 입장에서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뻔하죠, 뭐. 항산파의 현판을 빼앗고 멸문하는 것으로 보다 더 큰 위세를 떨치려고 그런 게 아닙니까?”
노련한 상수 노관이 깊은 혜안을 자랑하였다.
따지고 보면 회검문 측에서는 항산파를 멸하는 것보다 더 나은 홍보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차피 약한 자는 도태되고 강한 자들만 살아남는 것이 이 비정한 강호무림의 세계다.
정파도, 사파도 아닌 중도의 문파 회검문 입장에서 볼 때 항산파만큼 맛있어 보이는 부위도 드문 것이다.
더욱이 회검문은 검을 표방하는 검문이니만큼 오랜 역사의 검법을 가진 항산파를 이기고 싶어 하였다.
“우리들이 어떻게든 평화롭게 해결하자고 화친을 제안해도 거절하더군.”
그간 진호충의 고심이 어떠했는지 잘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평생을 베풀며 살아온 그에게 있어 회검문 사태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진호충은 삶을 훌륭히 살아왔기에 그 주변인들이 자처하여 그를 돕고자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황금표국의 주인인 금령검객 장천호였다.
“장운아. 그래서 말인데…… 너와 금옥관의 표두들이 좀 나서줘야겠구나.”
장천호의 말에 장운은 이제야 모든 전말과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렇구나. 여기 진 대협께서는 회검문과 비무에 나설 대리 검수(劍手)를 원하는 게 분명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