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표국 역대급 무공 천재 47화
표두(鏢頭) 선발전(4)
“다른 방법이요?”
방법이 있다는 말에 응운곤과 천세은의 시선이 모였다.
“네, 일단 기본 물품이 필요하니까요.”
먼저 장운 일행은 은자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으며 표행 및 선발전 시험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절대로 무력행사를 해선 안 되었다.
다른 방법을 통해 재물 재화를 벌면 안 된다는 소리였다.
빈털터리 신세로 황금표국을 빠져나온 그들은 지금 당장 식사를 할 식량조차 없었다.
‘그리고 최후의 역전을 위해서라도 사야할 것들이 있지.’
다시 말해 많은 금자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는 말씀.
“어디로 가시려고요?”
“섬서성에서 만광전장의 눈치를 받지 않는 곳은 없을 텐데요?”
두 사람의 말에 장운은 한 인물의 얼굴을 떠올렸다.
“서안 일대에서 만광전장이 아니라…… 제 눈치만을 보는 한 상단이 있습니다.”
장운의 미소가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 * *
“단주님, 단주님!”
서안 명운산 일대의 조그마한 상단인 은전상단.
명운산의 단풍이 익어가는 고즈넉한 아침 전경을 채 즐기기도 전에 혼란이 찾아왔다.
“에휴, 무슨 일이냐?”
은전상단을 이끄는 단주, 이정만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대꾸했다.
그나마 이게 나아진 모습이었다.
며칠 전에는 마음의 병이 단단히 걸려 수일 동안 침상 위에만 누워 있던 것이다.
그가 괴로워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도대체 언제 황금표국 측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질까?
이정만은 지난번 실수로 황금표국의 셋째 도련님인 금령공자 장운을 몰라뵙고 모욕을 주고 말았다.
이에 장운은 이를 갈며 복수를 약속했었고 그날을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차라리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지, 시간이 지날수록 깜깜무소식 상태에 이어지자 속마음이 타들어 갔던 것이다.
“나와보십시오!”
그런 이정만의 속도 모른 채 수하들은 뭐가 그리도 놀랐는지 눈을 처음 본 강아지처럼 펄쩍 뛰고 있었다.
“시끄럽다. 이제 우리 상단도 운명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네놈들도 각자도생(各自圖生)을 꾀할 준비나 하거라.”
몇 날 며칠 동안 마음이 문드러졌기에 좋은 소리가 나올 리 없었다.
지금 상단이 휘청거리고 있으며 언제 망할지 모르는데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지금의 이정만은 무림맹주나 사흑천주가 나타나도 그다지 놀라지 않을 것만 같았다.
‘도대체 뭐 때문에 그래?’
수하들이 하도 난리를 치길래 밖으로 나와보았더니 이게 웬걸?
“나요, 장운. 기억하시겠소?”
다짜고짜 장운과 더불어 뛰어난 무인으로 보이는 두 표사까지 등장하자 무덤덤하던 이정만은 곧바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허억! 허어억! 허어어억!”
그는 심호흡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드디어 왔다!’
솔직히 이런 날이 오리라곤 예측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일 줄은 몰랐다.
마침내 장운이 다시 방문하자 그는 올 것이 왔구나 싶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추측하건대 장운은 장천호의 서신을 직접 전달하기 위해 은전상단을 찾았으리라 생각했다.
“너무 놀라지 마시죠, 이 단주.”
장운은 놀라는 이정만의 등을 토닥이며 본론을 꺼내 들었다.
“상단을 살리고 싶으십니까?”
“네에?”
이정만은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상단을 살리고 싶다니?
당연히 살리고 싶다마다!
“네에, 네!”
간신히 정신줄을 잡고 대답을 한 이정만이었다.
“아직 그대의 악랄한 행동에 대해 아버지께 보고하지 않았지.”
“그, 그게 정말입니까?”
이정만은 도저히 믿지 못하며 두 눈을 크게 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아직까지 은전상단의 업무는 차질이 없었으며 황금표국으로부터 내려온 지령도 없었던 것이다.
“이 단주, 나는 말이오. 사람은 계기만 있으면 언제든 변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 그날의 일은 반성을 하셨소?”
“물론입니다! 당연하지요! 다시는 조그마한 부를 믿고 까불지 않겠습니다.”
이정만은 큰 조카뻘인 장운에게 쩔쩔매며 기합이 든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럼 한 번 기회를 주지. 나를 좀 도와주겠소?”
“도, 돕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제가 필요한 것들이 있소. 며칠 동안 먹을 식량과 더불어 발이 빠른 준마(駿馬), 질기고 커다란 그물 및 내가 필요한 몇 가지들을 구해다 줄 수 있는지 궁금하군.”
“그건 어렵지 않지만…… 아아!”
이정만은 말하다 말고 갑자기 엊그제 만광전장으로부터 내려온 극비 공문 하나를 상기할 수 있었다.
-만광전장의 전표를 사용하는 모든 상단, 전장에게 고함.
-추후 황금표국 셋째 도련님인 금령공자 장운이 오거든 은자 두 개 이상을 내어주지 말 것.
-만약 이를 어길 시…… 본 만광전장과 척을 질 것이며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생각하겠음.
짧지만 매우 강렬한 서신이었다.
그러나 이정만은 장운의 일로 정신이 없었기에 극비 공문 따위는 그저 대충 눈으로 훑고 옆으로 내던졌을 뿐이다.
장운에게 은자를 주든, 금자를 주든 자신에게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씨익!
이정만의 반응을 보여 장운은 확신했다.
‘역시 둘째 형의 입김이 닿았군.’
장운은 화가 나거나 분노에 떨지 않았다.
본래 알력 다툼이라는 것이 모두 공작이며 더러운 것이기에 구태여 심력을 소모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동시에 그는 이정만에게 자신을 선택하라고 굳이 강권하지 않았다.
그가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기다릴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래, 결심했어!’
이정만은 곧바로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자신의 목숨과 은전상단의 운명은 장운에게 걸려 있다.
설령 만광전장과 척을 지게 되더라도 장운이 황금표국의 주인이 된다면?
‘그렇다면 도리어 만광전장은 몰락하게 될 것이고…… 어쩌면! 우리 은전상단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이정만은 본디 제법 쓸만한 재주를 지닌 상인이었다.
워낙 심보가 못되어서 그렇지, 금자 냄새 맡는 후각만큼은 기가 막히게 발달했는데 그 감이 지금 작동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더.
‘나는 만광전장 따위보다 장운 소협이 더 무섭다!’
아직도 눈만 감으면 그날 객잔에서 일어났던 악몽이 떠오르곤 했다.
“당연히 돕겠습니다. 제가 큰 실수를 저질렀으니 불이익이 있다 해도 도와야지요. 그 대신…….”
이정만이 우물쭈물거리며 뭐라 더 말하려는 찰나!
“알겠소. 내 다 알고 있지. 이 단주께서 도와주시는데 제가 어찌 비정하게 굴 수 있겠소이까?”
장운은 노련하게 말하며 채찍과 당근을 동시에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그 결과!
“말씀하신 것은 다행히 본 상단 내부에 있습니다. 얼마든지 가져다 쓰시고…… 혹시 금자도 필요하십니까?”
말 그대로 죽다 살아난 은전상단의 주인, 이정만.
그는 무척이나 오랜만에 윗니 아랫니 치아를 다 보이며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 * *
장운 일행이 은전상단으로부터 뛰어난 준마를 빌려 말을 타고 달려갈 무렵.
“참으로 소인배인 사람이에요.”
천세은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지난번 객잔 사건을 모두 지켜보았기에 그 마음은 더했던 것이다.
“차라리 본능과 욕심에 충실한 것이 낫습니다. 적어도 제 목에 칼을 겨눌 위인이 아니니……. 과연 어디까지 지원해 주는지 지켜봐야겠죠.”
장운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전생의 경험상 이정만과 같은 자를 잘 안다.
약자에게는 철저히 강하지만 강자에게는 납작하게 굴복하는 자들 말이다.
이정만과 같은 자는 채찍을 가하다 한 번 당근을 내어주면 눈물을 흘리며 충성을 맹세하는 부류였다.
“그나저나…… 저희는 재물이나 재화를 불린 것도 없는데 이대로 황금표국으로 되돌아간다고요?”
응운곤이 물었다.
장운의 저의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말마따나 궁금한 것이 많았다.
현재 장운은 간신히 얻은 밑천으로 재화를 불리기는커녕 오히려 쓸데없는 것들을 잔뜩 빌린 다음, 황금표국 본관 입구로 되돌아가고 있던 것이다.
“저도 그 부분은 이해가 가지 않아요. 표행을 일찍 마치고 들어가는 것도 좋지만 채점에 있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재화와 재물의 양일 텐데요?”
비교적 머리가 현명한 천세은조차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말과 마차를 더 빌린 다음, 은전상단의 도움을 받아 재물을 불려도 모자랄 판에 잡동사니를 챙겨 들고 본국으로 귀환하다니.
“일단…… 저만 믿고 걱정하지 마시지요.”
장운은 자신에게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응운곤과 천세은을 진정시키며 황금표국 인근에서 가장 가까운 샛고개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공교롭게도 이 샛고개 언덕은 황금표국의 요지 중의 요지이며 표국 내부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반드시 지나야만 했다.
“여기가 좋겠군.”
모두가 걱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운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는 언덕에 말을 묶고는 이정만에게 특별이 얻어온 명주(名酒), ‘소룡아(小龍牙)’와 더불어 향긋하고도 기름진 오향장육(五香醬肉)을 꺼내 들었다.
하루 종일 맨손에 빈속으로 굶어왔던 그들이기에 모두 꼬르륵 반응을 보였다.
“일단 먹고 합시다.”
장운은 여유가 넘쳤다.
물론 이는 자신감이 깔려 있는, 이유 있는 여유였다.
‘표두 선발전 표행 종료까지 이제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남았다.’
그때까지 장운과 일행은 그동안 굶은 것에 대해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미친 듯이 먹고 마시며 세 사람 모두 친목을 도모하고 있었다.
응운곤과 천세은은 걱정 반 우려 반의 시선을 교차하며, 다른 일행이 미친 듯이 표행을 돌아다니며 재물과 재화를 불리는 동안 이렇게 있어도 될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그렇게 표행 종료까지 반나절이 남았을 무렵이었다.
“그럼…… 그동안 많이 먹었으니 소화를 좀 시킵시다.”
그날도 어김없이 진탕 편하게 쉬고 있다가 장운이 돌연 몸을 일으켰다.
그가 움직이는 이유가 있었다.
샛고개 저 너머로 슬슬 표두 선발전에 참가한 자들이 되돌아오고 있던 것이다.
장운은 이제야 두 사람에게 본래 계획을 발설하였다.
“제 계획은 단 하나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잔뜩 재화와 재물을 불려 가져온 다른 일행의 표물을 빼앗는 것!”
표두 선발전 두 번째 관문을 시행하기 전, 장운은 장천호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표행을 임하는 것에 있어 다른 지원자 일행과 충돌하거나 실력 행사를 하는 경우는 어떻게 합니까?
언뜻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질문이었지만 그 속 의미는 다른 참가자의 표물을 빼앗아도 되느냐는 말이었다.
이에 장천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모든 게 포함된 것이 바로 표행이다.
장천호의 말은 간단했다.
빼앗고 지키는 자의 논리가 뒤섞인 것이 바로 표행인 만큼 서로 치고받으며 빼앗고 지키는 행위를 모두 허락한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이 시험을 낸 이유도 그러했다.
타인의 약탈에서 자신의 표물을 얼마나 지킬 수 있는가?
한데 놀랍게도 장운은 자신의 표물 불리기는 완전히 포기한 다음, 모두가 모이는 샛고개 언덕에 모여 다른 이들의 표물을 노리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만광전장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은 내가 역전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그리고 지금부터 장운과 재능 넘치는 두 표사들의 미친 활약이 시작되었다.
“자, 자. 이제 쓸어버리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