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화. K-팝 페스티벌 (4)
난 세나와 소진이를 데리고 호텔로 돌아왔다.
병원에 갔던 조유경과 박예진은 먼저 돌아와 있었다.
“위세척 한번 했어요. 다행히 별 이상은 없대요.”
난 조유경에게 물었다.
“몸은 괜찮아? 집에 돌아가서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 아니에요!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말로 돌아가라고 할까 봐 걱정됐는지 조유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박예진이 물었다.
“경찰서 간 건 어떻게 됐어?”
소진이는 조금 전 있었던 일들 두 사람에게 말해주었다.
“진짜? 미루 오빠가 그놈을 때렸다고?”
“응. ‘내 여동생 건드리는 놈은 누구도 용서하지 않겠어’라고 하시면서 주먹으로 이렇게 때렸어.”
아, 아니.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이어진 얘기에 박예진과 조유경은 깜짝 놀랐다.
“미루 오빠가 그 자리에서 재벌을 불렀다고?”
“응. 화안그룹 회장 둘째 아들 허민웅 알아?”
“당연히 알지. 그 사람이 미루 오빠 전화 받고 바로 달려온 거야?”
“응응. 미루 오빠는 자기 친동생이나 다름없다면서. 아! 그리고 세나한테는 용돈도 주셨어.”
“우와! 우와!”
애들은 존경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빠 너무 대단해요.”
“너무 멋있어요.”
“아니, 뭐…….”
왠지 어깨가 으쓱해지는데.
세나는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난다는 표정이었다.
“그놈들 확실히 처벌받는 거 맞지, 오빠?”
술에 물뽕을 탄 것은 마약 강제 투약에 성범죄 미수에 해당한다.
본인들이 범죄를 자백한 만큼, 그 자리에서 전원 체포됐고 스마트폰을 압수했다. 이런 짓을 오늘 처음 했을 리는 없을 테니 캐보면 줄줄이 나오겠지.
뭐, 그건 그거고…….
난 세나를 보며 말했다.
“넌 지금 그게 중요해?”
“그럼 뭐가 중요한데?”
그나마 뺨 한 대 맞고 끝나서 천만다행이지, 자칫 잘못하면 큰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요즘 미친 인간들이 어디 한둘인가?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이번 기회에 따끔하게 혼내야 한다.
“내가 밤늦게 돌아다니거나 위험한 데 가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그리고 그런 일 있으면 주변에 도움을 청하든지 나한테 바로 연락을 하든지 해야지. 거기서 싸우면 어쩌자는 거야?”
그러자 세나는 입을 삐죽 내밀며 눈을 흘겼다.
“아! 왜 자꾸 나한테 뭐라 그래?”
난 눈을 부릅떴다.
“여동생이…… 말대꾸?”
반성은커녕 감히 오빠에게 대들다니!
“너 이럴 거면 당장 서울로 돌아가.”
“싫어. 오빠가 뭔데?”
“부모님께도 말씀드릴 거야.”
“와, 치사하게. 일러라, 일러!”
“…….”
어째 얘기하면 할수록 나만 쪼잔한 놈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떻게 된 애가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를 안 하지?
결국 난 최후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너 그리고 앞으로는 용돈 없어. 차도 압수.”
“뭐!?”
그 말에 세나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제 반성 좀 하겠지?
그런데…….
“씨잉!”
갑자기 세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아앙!”
처음에는 우는 시늉만 하는 줄 알았는데, 정말로 양쪽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난 속으로 당황하며 말했다.
“아, 아니. 뭘 잘했다고 울어?”
그러자 세나는 울면서 소리쳤다.
“흑흑!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
“싸운 게 잘못이지.”
“그럼 친구가 나쁜 일 당하는 걸 보고만 있으라는 거야? 오빠는 선우 오빠가 그런 상황이면 참을 수 있어?”
“그건…….”
난 잠시 선우가 나쁜 일을 당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과연 난 그 모습을 보며 참을 수 있을까?
“…….”
아주 잘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자기 일은 자기가 해결하겠지. 친구의 도움을 받으려는 나약한 생각따윈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애들도 있는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평소 잘 안 울던 애가 갑자기 우니까 좀 당황스럽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울 걸 그랬나?
당황해 주위를 둘러보자 애들이 입 모양으로 합창하듯 말했다.
‘뭐해요? 빨리 안아서 달래줘요.’
“…….”
응?
그냥 놔두면 그치지 않을까?
내가 입 모양을 못 읽었다고 생각했는지, 조유경과 박예진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달래주는 시범까지 보여주었다.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세나를 슬쩍 안아주었다.
왠지 매우 어색한데.
그나저나 내 동생이 이렇게 작았구나.
이 작은 몸으로 남자들에게 달려들다니.
애가 겁도 없지.
세나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흐엥, 나도 엄청 무서웠단 말이야. 오빠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래그래.”
난 얼른 그치라는 의미로 살짝 등을 토닥여주었다.
“흑흑, 용돈이랑 차는 왜 건드려?”
“……어, 미안.”
가족은 건드려도 용돈이랑 차는 건드리면 안 되지.
“흑흑, 내가 티슬라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
에버하트 형, 보고 있나?
자네가 만든 차를 좋아하는 인재(人災)가 여기 있네.
그래서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야?
* * *
난 세나와 둘이 밖으로 나왔다.
호텔 바로 앞은 해변이다.
우리는 그 앞을 잠시 걸었다.
세나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뺨도 부어있고, 눈도 부어있고.
“맞은 데는 괜찮아?”
“괜찮아.”
“앞으로는 진짜 조심해.”
세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알았어.”
“약속한 거야.”
“알았다니까.”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가 대체 누굴 닮아서 겁이 없는지.”
“누굴 닮긴. 오빠 닮았겠지.”
“…….”
진짜 그런가?
세나는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오빠 오늘 좀 멋있었어.”
“나야 항상 멋있지.”
“칫! 뭐래?”
세나는 괜히 입술을 삐죽 내밀다가 뺨이 아픈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역시 아픈 거 맞네.”
“괜찮다니까. 아! 해 뜬다.”
어느새 바다 한쪽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밤을 새운 것도 모자라서 일출까지 보게 될 줄이야.
“바다 보니까 오빠랑 놀러 갔던 거 생각난다. 바베이도스였나? 거기 좋았는데. 하와이도 엄청 좋았구. 우리 나중에 또 놀러 가자.”
“어디 가고 싶은데?”
“여기저기. 미국도 가보고 싶고, 유럽도 가보고 싶고, 호주도 가보고 싶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데려가 줄게.”
“헷, 약속한 거야.”
“그래.”
내가 아니면 누가 얘를 데리고 다니겠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세나가 갑자기 내 팔을 끌어안듯 팔짱을 꼈다.
“어! 남매끼리 뭐하는 짓이야?”
내가 팔을 빼려 하자 세나는 내 팔을 더욱 꽉 붙잡았다.
“왜에? 남매끼리 팔짱 좀 끼자.”
“……1분 만이야.”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나란히 서서 일출을 보았다.
문득 아주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진짜 작고 귀여웠는데…….
난 빛을 받아 밝아지는 세나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뭐, 지금도 아주 조금 귀여운 것 같긴 하다.
* * *
밤새 큰일을 겪긴 했지만, 세나와 친구들은 누구도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범죄 따위가 놀려는 의지를 막을 수는 없는 법!
걱정되는 관계로 남은 일정 동안에는 여성 경호원을 붙이기로 했다.
페스티벌이 시작되자 바쁜 사람들은 더욱 바빠졌다.
그리고 나는 VIP들만 이용할 수 있는 피트니스 센터에 와있었다.
“한 번 더!”
“으어어!”
팔에 힘이 빠져 바벨이 휘청거리자, 코리 덩컨이 재빨리 한 손으로 붙잡아서 걸어주었다.
이래서 운동할 때는 바벨 잡아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한 모양이다.
코리 덩컨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젊은 친구가 이렇게 허약해서야. 운동 좀 해야겠군.”
“……네.”
안 쓰던 근육을 쓰니 온몸이 결리는 느낌이다.
내가 나이가 들어봐서 아는데, 나중에 고생하지 않으려면 운동은 꾸준하게 하는 게 좋다.
“무리하지 말고 오늘은 맨몸 운동으로 하지. 동작 알려줄 테니 그대로 따라 하면 돼.”
설마 코리 덩컨에게 퍼스널 트레이닝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내 옆에는 다리안 헤럴슨과 에덴 크레이그가 함께였다.
스쿼트와 버피, 플랭크 등 동작 하나하나는 별로 힘들 게 없었다. 하지만 이걸 연속으로 이어서 하니, 시작한 지 5분도 안 돼 숨이 차고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20분을 하고 나자 녹초가 돼서 바닥에 뻗었다.
이는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코리 덩컨은 나에게 물었다.
“괜찮나?”
“아니요.”
돈으로 근육을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우리가 누워있는 사이, 코리 덩컨은 바벨 앞에 섰다. 양쪽에는 바벨이 휘어질 정도의 플레이트가 끼워져 있었다.
그는 그걸 잡고 데드리프트를 했다.
하지만 몇 번 하더니 이내 내려놓았다.
“역시 무겁죠?”
“아니. 너무 가벼워서. 다 꼈는데도 무게가 이거밖에 안 되다니.”
“……예?”
에덴은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우리 같은 정상인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제가 봤는데 최고 기록이 662파운드였어요.”
“…….”
그게 몇 킬로지?
이놈의 야드파운드법은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난 재빨리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보았다.
“헉! 300킬로그램!”
참고로 스쿼트는 608파운드. 벤치프레스는 485파운드라고 한다.
난 다시 계산을 해보았다.
이 정도면 3대 거의 800 아닌가?
참고로 그의 나이는 40대 후반.
“…….”
인간인가?
게다가 그는 집에서 운동만 하는 것도 아니고 1년에 대여섯 편의 영화를 찍고 각종 방송에 출연하며 바쁘게 살고 있다.
그런데도 시간을 쪼개 매일 같이 운동을 하는 것이다.
그를 보니 바빠서 운동 못 한다고 변명하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난 진심으로 감탄했다.
“굉장하네요.”
그는 허벅지만 한 팔뚝을 들어보이며 씨익 웃었다.
“노력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지.”
“…….”
아니, 웬만한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해.
“아무래도 여기는 안 되겠군. 가자, 에덴.”
“예? 어디를요?”
“근처에 짐(Gym)이 있을 거 아니야? 가서 한바탕 뛰고 오자고.”
“아니, 전 다 한 것 같은데…….”
“훌륭한 배우가 되고 싶다며? 좋은 연기는 좋은 근육에서 나오는 법이지.”
태어나서 처음 듣는 얘기다.
난 그에게 물었다.
“정말 그래요?”
코리 덩컨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물론이지. 표정은 얼굴 근육을 움직여서 만들고, 목소리는 성대 근육을 움직여서 내는 법!”
“아…….”
분명 헛소리 같은데 반박을 하기가 힘들다.
에덴 크레이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코리 덩컨의 손에 끌려 나갔다.
* * *
운동이 끝난 뒤.
난 다리안과 앉아서 얘기를 나눴다.
“코리와는 언제부터 같이 운동한 거예요?”
“좀 됐지. 덕분에 체력이 많이 늘었어. 공황도 나아졌고.”
“다리안을 따라서 한국까지 온 걸 보면 엄청 친한 모양이네요.”
그러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그거지만, 또 하나의 이유가 있지.”
“뭔데요?”
다리안은 나를 가리켰다.
“컨티뉴 캐피탈 대표와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흔한 건 아니니까.”
“아…….”
할리우드는 미국뿐 아닌, 세계 영화 산업의 중심.
이곳에서 스타가 되면 벌어들이는 돈은 상상을 초월한다.
영화 출연료만 해도 기본 수백만 달러에 광고, 행사 등등.
톱스타들은 재산이 수억 달러쯤 되다 보니, 주식, 부동산은 물론이고, 스타트업, 미술품, 개인사업 등 여러 곳에 투자한다.
아예 이들만 관리하는 전문 자산관리사가 따로 있을 정도다.
그런 만큼 금융 정보에도 민감할 수밖에.
흐음, 어쩐지 다들 친절하게 대해준다 했더니 그런 속내가 있었을 줄이야.
“물론 모두 좋은 사람들이야. 내가 보증할게.”
“그럼요.”
의도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기분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주위에 잘나가거나 도움받을 만한 사람이 있으면 친해지고 싶어지기 마련. 악의만 없으면 상관없다.
난 소다수를 마시는 그를 보며 물었다.
“이제 술은 완전히 끊었나 보네요.”
“응. 예전에는 취해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술을 끊고 나니 세상에 재밌는 일이 참 많더군.”
“온 김에 실컷 놀다 가요.”
내 말에 다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