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화. 에런 베이커 (8)
유재호 회장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설마 에런 베이커 회장을 움직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난 그를 보며 말했다.
“회장님 덕분입니다.”
“제 덕분이요?”
“예. 마음 같아서는 지지 선언이라도 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는 재벌이 지지하면 오히려 국민들의 반감을 살 우려가 크기 때문.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모두가 인정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지지를 해준다면 어떨까?
마침 에런 베이커가 나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 왔고, 그래서 그에게 인터뷰에서 관련 언급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와킨스빌로 찾아가는 대신 한국에서 베이커 회장을 만난 거군요.”
“그런 거죠.”
에런 베이커 회장의 방한은 그 자체로 세계적인 이슈였다.
이런 상황에서 ‘부결시 투자자들은 당장 한국을 떠나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하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사실 그 정도로 세게 발언할 거라고는 나도 상상도 못 했다.
그저 ‘매우 좋은 개혁이다’라는 정도만 말해줬으면 했는데.
어쨌거나 에런 베이커의 인터뷰로 인해 개혁안 국회 통과에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부결될 경우 정치적 후폭풍을 피하기 힘든 상황.
결국 일부 의원들이 마음을 바꿔 찬성표를 던졌고 개혁안은 아슬아슬하게 국회를 통과됐다.
우여곡절 끝에 사회보험개혁안이 통과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남궁석 대통령의 지지율이 오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개혁안의 내용이란 결국 돈은 더 내고 혜택은 덜 받는 것.
머릿속으로는 해야 한다는 걸 알아도 월급에서 빠져나가는 돈을 보면 속이 쓰릴 수밖에.
반발 역시 이어졌고, 의료단체와 양대노총 등은 총파업과 궐기대회를 예고했다.
그래도 증시는 일제히 상승세로 돌아섰고, 투자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루 씨가 처음 남궁석 의원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고 말했을 때만 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궁석이 대통령이 된 건 한국에게 있어서는 행운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말에 난 피식 웃었다.
아마 이건 유재호 회장이 정치인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 아닐까?
이런 사람이 오랫동안 대통령을 하면 좋겠지만…… 그의 임기는 얼마나 안 남았다. 그 이유는 남궁석 본인이 개혁안과 맞바꿔 자신의 임기를 잘라냈기 때문.
어느 누가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언젠가는 그의 진심을 국민들이 알아줄 날이 오면 좋겠네요. 혹시 이 모든 걸 계획한 겁니까?”
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이건 1회차 때는 없었던 미래다.
이 미래를 만들어낸 것은 약간의 우연과…….
“남궁석 대통령의 의지와 노력 덕분이죠.”
유재호 회장은 미소를 지었다.
“그 의지와 노력 역시 미루 씨 덕분이지 않나요?”
“예?”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는 법이죠. 미루 씨가 그를 믿어줬기에 남궁석 대통령 역시 개혁을 완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에이, 설마요.”
“나중에 한번 물어보세요. 제 말이 맞을 겁니다.”
“…….”
정말 그런가?
난 그와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렸다.
나중에 같이 또 순댓국 먹으며 소주 한잔 할 수 있으려나? 거기 맛있었는데.
유재호 회장은 시계를 보며 말했다.
“슬슬 손님이 오실 시간이 됐군요.”
* * *
[(WST) 화이트로드 에런 베이커 회장, 유성전자 방문]
한국에 머물고 있는 에런 베이커 회장은 유성전자 공장을 방문했다.
유재호 회장은 직접 베이커 회장을 맞이해 화성의 반도체 공장을 안내해주었다.
공장 견학 이후 베이커 회장은 ‘반도체는 인류 문명의 필수품이다. 유성전자는 메모리와 비메모리, 설계와 제조를 함께하는 최고의 반도체 기업이다. 최근 진출한 데이터센터 산업 역시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두 사람은 따로 투자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략)
화이트로드의 투자 포트폴리오 중 절반이 엔플이다. 그리고 유성전자는 엔플의 경쟁기업이다.
만약 에런 베이커 회장이 유성전자에 투자한다면, 이는 엔플에는 악재가 될 전망이다.
* * *
난 허민웅을 만났다.
“헤이, 브로.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똑같아요.”
“역시 한국이 좋지?”
“아무래도 그렇죠.”
돈 있으면 어디든 살기 편한 건 마찬가지지만, 여기에는 친구도 있고 가족도 있으니.
허민웅은 슬쩍 물었다.
“에런 베이커 회장 한국에 온 거 너 때문이지?”
“왜 그렇게 생각해요?”
“너 아니면 그 할아버지가 한국에 올 일이 있겠어? 너 아는 사람이면 다 그렇게 생각할걸.”
“음…….”
어느새 너무 유명해진 게 아닌가 싶다.
허민웅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어! 혹시 남궁석 지지 발언도 니가 시킨 거 아니야?”
“아니에요.”
“아니긴. 너 맞잖아. 맞네, 맞아. 어쩐지 정치랑 항상 거리를 두고 있던 양반이 과격한 발언을 하기에 누가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나 했는데, 니가 칼 들고 협박했구나. 내가 이런 거 잘 엄청 잘 맞춘다니까.”
“…….”
잘 맞추긴 뭘 잘 맞춰?
칼 들고 협박은 안 했다. 그냥 좋은 말로 부탁했을 뿐이다.
“그보다 할 얘기가 좀 있어요.”
“뭔데?”
“에런 베이커 회장이 화안에너지를 방문할 거예요.”
그 말에 허민웅은 눈을 번쩍 떴다.
“어! 진짜?”
“네. 수소에너지 쪽에 투자 생각이 있는 듯하니 잘 얘기해봐요.”
에런 베이커는 세계 최고의 투자자.
그의 행보 하나하나가 투자에 대한 힌트인 만큼, 그가 방문하는 기업에 투자자들의 관심이 집중됐고, 실시간으로 보도가 이어졌다.
따라서 그의 방문만으로도 수소산업에 대한 시각이 달라질 것이다.
허민웅은 감격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며 말했다.
“형이 너 많이 좋아하는 거 알지?
“그만 좋아해요.”
“에이, 왜 그래? 좀 좋아하자. 자꾸 이러면 형 서운해.”
난 친한 척하는 허민웅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 * *
[에런 베이커 회장, 화안에너지 방문!]
[허민웅 사장, 베이커 회장과 한 시간가량 면담]
[베이커 회장, 수소에너지는 차세대 친환경 에너지원! 투자 협력 논의!]
에런 베이커는 유성전자에 이어서 화안에너지를 방문했다.
허민웅은 정중하게 그를 맞았다.
언론사들이 모여있는 앞에서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눴고, 그 장면은 전세계에 기사로 나갔다.
-이야! 우리 망나니 많이 컸네~
-진짜ㅋㅋ 사고치고 돌아다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완전히 정신 차렸네.
-화안에너지 떡상 중! 안 팔고 있기를 잘했네!
-민웅아~ 주주들은 너만 믿는다~
-드디어! 중국과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도 투자를!
-에런 베이커가 관심을 보이는 걸 보면, 수소가 대세인가?
-그래서 지금이라도 유성전자랑 화안에너지 사, 말아?
-사사사!
* * *
에런 베이커 회장의 한국 일정 마지막은 바로 컨티뉴 캐피탈 한국지사의 방문이었다.
세계 최고 투자자를 만날 수 있다는 얘기에 휴가를 갔던 직원들마저 다들 출근했을 정도다.
으음, 우리 회사 직원들의 애사심이 이 정도일 줄이야.
민아름도 왔고, 성윤아 역시 드림 파이낸셜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녀는 좋아 어쩔 줄 몰랐다.
“살면서 에런 베이커 회장님을 직접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고마워요, 미루 씨.”
“뭘요.”
잠시 후, 에런 베이커 회장이 안으로 들어오자 직원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직원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니, 역시나 투자자들에게는 슈퍼스타나 다름없다.
동호 선배는 지사장으로서 에런 베이커와 악수를 나눴다.
“방문해주셔서 영광입니다, 회장님.”
“저야말로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옆에는 민아름이 함께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회장님. MFW 대표 민아름입니다. ”
“MFW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날 줄 알았다면 옷을 좀 더 차려입고 올 걸 그랬습니다.”
민아름은 웃으며 말했다.
“어머, 지금도 너무 멋지신데요.”
이어서 성윤아가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드림페이 대표 성윤아입니다.”
“반갑습니다. 드림페이는 미국에서도 돌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회장과 얘기를 해보니, 큰 관심을 나타내더군요.”
“저, 정말인가요?”
“물론입니다. 나중에 한번 자리를 마련해보겠습니다.”
그 말에 성윤아는 활짝 웃었다.
에런 베이커는 컨티뉴 캐피탈 한국지사를 둘러보고, 직원들을 상대로 간략한 강의를 하고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직원들과 함께 다 같이 사진도 찍고, 사인도 해주었다.
* * *
회사에서의 공식 일정이 끝난 뒤.
우리는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난 그를 호텔로 바래다주었다.
우리는 호텔 안에서 커피와 콜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난 궁금한 마음에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 제 부탁을 들어주신 건가요?”
꽤나 무리한 부탁이었다.
때문에 부탁을 하면서도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먼저 큰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그래도 적당히 언급만 해주실 수도 있지 않았나요?”
내 말에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진심이 와닿았기 때문입니다. 미루도 남궁석 대통령도, 진심을 다해 옳은 일을 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기에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이번에 큰 신세를 졌습니다.”
“하하, 도움이 됐다니 저도 기쁩니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세계 최고의 투자자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사이 수많은 투자자들이 떠올랐다가 몰락한 것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내가 아는 미래는 몇 년 후면 끝난다.
아니, 그 전에 이미 미래가 변하는 중이다.
과연 언제까지 투자를 계속할 수 있을까?
“성공한 투자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
에런 베이커 회장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투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합니까?”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질문이다.
투자란 돈을 벌기 위해 리스크를 감당하는 행위.
난 회귀를 한 덕분에 1회차 때는 상상도 못 할 돈을 벌어들였다.
이미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있다.
음식점에서는 가격표를 보지 않고 주문하고, 갖고 싶은 건 얼마든지 살 수 있다. 지금부터 열심히 평생 써도 벌어들인 돈의 10분의 1도 쓰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돈은 나에게 그렇게 큰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떤 게 중요할까?
난 회귀한 이후 많은 것을 바꿨다.
진세연은 SBC 간판 아나운서가 됐고, 지유는 최고의 스타가 됐다.
동호 선배는 컨티뉴 캐피탈 한국지사의 사장이 됐고, 선우는 1회차 때부터 꿈꿔왔던 게임사를 차려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마음껏 만들고 있다.
그리고 세나와 부모님은 1회차 때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다.
이는 아무리 많은 돈과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다.
“사람입니다.”
내 말에 에런 베이커는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지었다.
“제가 수십 년에 걸쳐 깨달은 진리를 벌써 깨달았군요. 그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성공한 투자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진부한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
수십 년 동안 그가 했던 투자가 그의 말에 무게를 더해주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