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화. 에런 베이커 (4)
에런 베이커를 만난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좀 긴장했지만, 대화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편해졌다.
그는 위인이나 선배 투자자로서가 아닌, 마치 동네 할아버지처럼 편하게 내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난 또 하나 궁금한 걸 물어보았다.
“어째서 엔플에 투자하신 건가요?”
원래 그는 IT기업에 잘 투자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절친인 베일 게이츠의 권유에도 NS에 투자하지 않았고, 2000년대 IT기업들이 미친 듯이 폭등할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그의 수익률을 비웃었던 투자자들은 닷컴버블이 터지며 모조리 쓸려나갔다.
이후 에런 베이커는 뒤늦게 IMB에 투자했으나 별다른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엔플 주식을 대거 매수했다.
그가 엔플에 투자했을 때만 해도 모두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엔폰의 대성공으로 인해 엔플의 주가는 이미 오를 만큼 오른 상태였고, 엔플의 창업자이자 혁신의 아이콘이었던 스티비 쉴러가 사망하며 전망이 불투명해졌으니까.
언론에서는 스마트폰 시장 과다 경쟁으로 엔플의 성장세가 꺾일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 에런 베이커는 엔플의 주식을 대량 매수했다.
금액으로 보면 화이트로드 역사상 가장 큰 투자였다.
그는 콜라를 집어들며 말했다.
“전 항상 코카콜라를 즐겨 마십니다. 누군가는 건강에 안 좋다고 하지만, 그건 피자나 햄버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자들은 코카콜라를 마십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노숙자들 역시 코카콜라를 마십니다. 부자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코카콜라를 마시고,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 역시 코카콜라를 마십니다.”
에런 베이커는 콜라를 한모금 마신 다음 내려놓았다.
“어느 날 보니 제 아들과 손주들이 엔폰을 쓰더군요. 그리고 회사 청소부와 마트 캐셔들 역시 엔폰을 쓰더군요. 그 순간, 엔플은 IT기업이 아닌 코카콜라 같은 필수 소비재 기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저렴한 콜라가 나와도 사람들은 결국 코카콜라를 마십니다. 마찬가지로 더 저렴한 스마트폰이 나와도 사람들은 결국 엔폰을 씁니다. 그게 제가 엔플에 투자한 이유입니다.”
투자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쉬운 이유다.
하지만 어느 투자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투자의 결과는 어땠을까?
탐 키튼 체제 이후 흔들릴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엔플의 주가는 다섯 배 넘게 상승했고, 현재 화이트로드의 포트폴리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0퍼센트에 육박했다.
에런 베이커는 엔플 주식을 산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선택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회장님께서는 평생을 투자자로서 활동하셨는데, 혹시 다른 일을 해보고 싶지는 않으셨나요?”
“만약 제가 야구 선수나 축구 선수였다면 지금까지 그 일을 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체스 선수나 바둑 선수였어도 마찬가지였겠지요. 하지만 투자는 이 나이까지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젊었을 때보다 더 재밌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 투자자는 축복받은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자산 중 90퍼센트는 60세 이후 만들어졌다. 수익률은 젊을 때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지만, 투자금 액수 자체가 커졌기 때문이다.
그를 보면 어째서 복리를 마법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다.
“미스터 한 역시 계속해서 투자를 할 생각이지 않습니까?”
“예. 뭐…….”
오랫동안 투자를 하며 경험과 연륜을 쌓아온 그와는 달리, 내가 가진 거라고는 고작 미래에 대한 지식뿐.
벌써부터 슬슬 밑천이 딸리는 중이다.
그냥 딱 10년째 되면 은퇴하고 돈 쓰러 다니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뒷일은 데이비드에게 맡겨놓으면 알아서 하지 않을까?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뭔가요?”
“많은 것이 중요합니다. 다만 한 가지를 꼽으라면 바로 실패하지 않는 것입니다. 백만장자가 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은 복권을 사는 겁니다. 당첨되기만 하면 누구나 돈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방법을 추천하지 못하는 건 당첨자를 제외한 모두가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전 뛰어난 투자자들이 단 한 번의 실패로 인해 시장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많이 봐왔습니다. 그래서 전 더 많은 돈을 버는 투자보다 실패하지 않을 투자를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모든 투자에는 위험이 따르지 않나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조심해도 100퍼센트 안전한 투자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시장은 비이성적이라서 기대이익은 크고, 손실은 가장 적은 시점이 있습니다.”
“샐러드유 사태가 벌어졌을 때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를 사들였던 것처럼요?”
내 말에 에런 베이커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좋은 기업을 싸게 사면 실패를 줄일 수 있으니까요.”
1964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샐러드유 통이 가득한 창고를 담보로 대출해주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통 안에 있는 것은 위만 샐러드유였고, 그 아래는 전부 바닷물이었다.
이 일로 인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6천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고, 발표 직후 주가는 반토막났다.
에런 베이커는 신중하게 판단했다.
손실은 어디까진 일시적이고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내재가치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를 사용했으니까.
모두가 주식을 내던질 때, 에런 베이커는 과감하게 자산의 40퍼센트를 투자해 매수에 나섰다.
그리고 그는 그때 산 주식을 50년 넘은 지금까지도 보유하고 있다.
“저 역시 미스터 한에 대해 궁금한 게 참 많습니다.”
“그냥 미루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하하! 그럼 저도 에런이라 불러주시겠습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원래 DA증권 직원이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컨티뉴 캐피탈을 만들게 된 겁니까?”
“그 이야기를 말씀드리려면 프리머스 펀드 사태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난 천천히 얘기를 시작했다.
물론 치킨집하다가 차에 치어 회귀한 건 빼고.
에런 베이커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내 얘기를 들었고, 사마라 회장 구출 건에서는 놀란 듯 탄성을 냈다.
“직접 일본에 찾아가서 사마라 회장을 만난 겁니까?”
“그렇습니다.”
“설마 사마라 회장의 일본 탈출 배경에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건 언론에는 안 알려진 사실. 일본 정부 역시 숨기고 있으니. 공표를 해봐야 나야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면 그만이다.
“요코하마 일렉트론의 중국지사에서 문제가 생길 걸 미리 알았습니까?”
난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누가 인수하든 달갑지 않았을 테니까요. 뭔가 수를 쓸 거라 예상하긴 했습니다. 그 정도로 극단적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요.”
“만약 엔플이 인수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습니까?”
“그랬으면 저희가 인수했을 겁니다. 물론 그 전에 중국지사의 반란을 사전에 차단했겠지만요.”
내 얘기가 다 끝나고 나자, 에런 베이커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재밌는 이야기로군요. 나중에 책으로 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너무 길어서 사람들이 보다가 중간에 하차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컨티뉴 캐피탈이 대단한 투자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이적인 수익률을 올리고 있더군요. 아시겠지만, 전 남의 수익률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옆 사람이 1000달러를 벌었다고 해서, 제가 번 100달러의 가치가 달라지지는 않으니까요. 수익률보다 놀라운 것은 모든 투자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마치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
그 말에 난 허를 찔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에런 베이커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나 예를 들어보자면, 저는 드림페이가 성공하기 힘들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아마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지 못한 것은 게임업계의 강력한 지지였습니다.”
아마 게임사들이 적극적으로 드림페이를 도입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급속도로 퍼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게임사들이 드림페이를 도입한 것은 인앱결제 수수료에 대한 반감과 컨티뉴 캐피탈에 대한 감사함 때문.
“결국 엔플과 구블을 상대로 한 인앱결제 소송, 페더 공격과 페니 발행, 구블의 수수료 인하 등의 일은 드림페이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드림페이는 레전드게임즈가 소송을 했을 때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일이다.
에런 베이커는 나를 보며 물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미루가 생각하는 미래입니다. 어떤 미래를 그리고 계십니까?”
동서고금을 통틀어 최고의 투자자로 불리는 사람이 1만 킬로미터를 날아와 나에게 한 질문이다.
그런 만큼 말해줄 수 있는 선에서는 최대한 말해줘야겠지.
난 그에게 말했다.
“미래는 클라우드에 있습니다. 그리고 스노우 크래시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기업이 될 겁니다.”
“엔플보다도 말입니까?”
“네.”
난 내가 직접 겪은,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모습을 얘기했다.
그는 집중해서 내 얘기를 들었다.
잠시 후.
“그게 미루가 생각하는 미래입니까?”
“네.”
내가 말해준 건 무슨 대단한 비밀 같은 게 아니다. 누구나 예측하고 예상할 수 있는 것들에 불과하다.
한참을 진지하게 고민하던, 에런 베이커는 웃으며 말했다.
“역시 한국에 오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귀한 의견은 들을 수 없었을 테니까요.”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에런 베이커는 눈을 밝게 빛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덕분에 앞으로 투자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가올 일이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정말로 설레는 듯한 표정이다.
90세가 되어도 이런 맑은 눈과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부럽다.
“제가 얼마나 더 살지는 모르지만, 미루가 말한 미래가 올 때까지 계속 투자를 해보고 싶습니다.”
“음…….”
사실 나는 그가 얼마나 더 사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건 말해주지 않는 편이 좋겠지.
“많은 걸 받았는데 당장 드릴 게 없군요. 나중에라도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보통 이런 말은 예의상 하는 것이기 마련.
하지만 난 바로 그에게 말했다.
“그럼 혹시 지금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사실 만나 뵈면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었습니다.”
설마 이렇게 바로 부탁을 받게 될 줄은 몰랐는지, 그의 눈에서 이채롭다는 빛이 떠올랐다.
“뭔지 들어보고 싶군요.”
난 조심스럽게 얘기를 시작했고, 그는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내 얘기를 다 들은 그는 한동안 진지하게 고민했다.
한참 후, 그는 입을 열었다.
“흠, 쉬운 부탁은 아니군요.”
“실례가 되거나 무리라고 생각되면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보다는 이유가 좀 궁금합니다. 어째서입니까?”
미안해서? 고마워서? 아니면, 부채의식 때문에?
난 한참 생각한 다음 말했다.
“제가 그 사람을 많이 좋아하거든요.”
에런 베이커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좋습니다. 오늘 얘기에 대한 값을 치르려면 그 정도는 해야겠군요.”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