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화. 에런 베이커 (2)
화이트로드는 19세기 애틀란타에서 설립된 작은 섬유회사다.
그런데 50년 전쯤 한 투자자가 이 회사를 통째로 인수했다.
그때부터 본업인 섬유업은 뒷전으로 미뤄놓고 보험회사, 음료회사, 카드사, 금융사, 철도회사 등 유명한 기업들에 투자하며 투자지주회사로 변모했다.
현재 화이트로드의 시가총액은 약 6,000억 달러로, 전세계 7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몰락해가던 중소 섬유회사를 초거대 투자지주회사로 만든 사람은 바로 에런 베이커.
그는 거대 기업의 CEO이자 세계적인 부자지만, 검소하면서도 규칙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해 정해진 업무를 하고, 퇴근 후에는 집에 돌아와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신혼 때 구매한 2층짜리 작은 주택에 계속 살며, 아침은 출근하며 맥도날드에서 해결했다.
화려한 파티에 참석하지도 않았고, 사치를 하지도 않았다.
얼마 전 중형차를 새로 산 것이 최근 몇 년 동안의 가장 큰 지출이다.
에런 베이커는 11살 때 처음 주식 투자를 시작했고, 90세가 된 지금까지 투자를 해왔다.
투자는 그의 특기이자 취미이고 삶이었다.
수십 년 동안 매일 시장을 지켜봐 왔지만, 매일이 새롭고 매일이 즐거웠다.
시장은 언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곳.
그런데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그는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80년 동안 투자를 해오며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누군가 시장을 움직이고 있는 건가?”
스스로 말하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는 자료를 다시 살펴보았다.
최근 금융업계에서 벌어진 모든 큰일에는 한 투자회사가 연관되어 있었다.
바로 컨티뉴 캐피탈이다.
“맞아. 여기가 등장한 이후로 시장의 흐름이 달라졌어.”
설립된 기간이라고 해봐야 고작 3년 남짓.
그러나 그동안 말도 안 되는 성과를 이뤄냈다. 이는 단지 수익을 많이 냈다는 것만이 아니다.
에런 베이커는 타인의 투자수익률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투자는 상대를 이겨야만 승리할 수 있는 경기가 아니다.
남이 얼마를 벌든 내가 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실패하지 않는 것이다.
2000년대 초반 IT기업이 폭등하기 시작하자, 투자회사들은 너도나도 IT 주식을 사들였고, 기업 가치는 더욱 올랐다.
증시 활황으로 투자회사들은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고, 돈 잔치를 벌였다.
그러나 화이트로드는 여기에 뛰어들지 않았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20퍼센트 수익을 유지했다.
에런 베이커는 지금은 비이성적인 상황이고 조만간 거품이 꺼질 거라 했지만, 언론과 전문가들은 그를 퇴물이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닷컴버블이 터지며 수많은 IT기업들이 파산했고, 여기에 돈을 넣은 투자회사들 역시 같이 파산했다.
이는 금융위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돈을 뺄 때는 누구보다 과감하게 움직였다.
매번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항상 결국은 에런 베이커가 옳았음이 증명됐다.
원래대로라면 컨티뉴 캐피탈이 얼마를 벌든 그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IT업계에서 엔플과 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앱결제 수수료를 둘러싼 소송전, EU 집행위원회의 반독점법 강화, 클라우드 시장에서의 약진, NS와 유성전자의 협력, 그리고 드림페이 출시 등등.
다행히 무엇 하나 엔플에 치명타가 되지는 않았고, 당장 엔플의 주가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에런 베이커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엔플의 장기 성장성이 훼손될 수도 있다는 것을.
화이트로드의 포트폴리오에서 엔플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절반.
만약 엔플에 문제가 생기면 화이트로드 역시 휘청거리게 될지 모른다.
‘포트폴리오를 조정해야 하나?’
이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투자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일 수도 있다.
에런 베이커의 큰 장점 중 하나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의 정답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제자에게 물어보는 것이지.’
결심을 한 그는 컨티뉴 캐피탈 CEO에게 연락했다.
* * *
어느 분야든 최고를 꼽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가장 위대한 정치인이 누구냐, 가장 뛰어난 스포츠 선수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각자 다른 대답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가장 위대한 투자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모두가 한 사람의 이름을 말할 것이다.
바로 에런 베이커.
화이트로드의 회장인 그는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투자자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자자다.
특정 기간 동안 그보다 높은 수익률을 올린 투자자는 셀 수도 없이 많지만, 매년 20퍼센트 수익을 50년 동안 꾸준히 올린 투자자는 역사상 그밖에 없었다.
따라서 에런 베이커는 투자자들에게 있어서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자 슈퍼스타나 다름없었다.
[반갑습니다. 에런 베이커입니다.]
그런 사람이 뜬금없이 연락해오자 데이비드 록허트는 내심 당황했다.
하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데이비드 록허트입니다. 이렇게 통화하게 돼서 영광입니다.”
[하하, 영광은 무슨. 바쁠 테니 본론부터 얘기하자면 한번 만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 때문입니까?”
에런 베이커는 자신의 생각과 상황을 설명했다.
[……이러한 이후로 최근 투자에 대해 고민이 많습니다.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노투자자의 솔직한 말에 데이비드 록허트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자자.
50년 넘는 기간 동안 계속 성공을 거두며, 최고의 투자자로 군림했다.
그럼에도 선택에 신중을 기하며, 새파랗게 어린 투자자에게 가르침을 청하다니!
‘과연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왠지 한참을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투자자가 안 그렇겠냐마는 데이비드 록허트 역시 에런 베이커를 마음속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온다고 하니,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기에 데이비드 록허트는 솔직하게 말했다.
“회장님께서 만나자고 하시는 것은 저에게는 매우 큰 영광이고, 원하신다면 언제든 시간을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하고 계신 고민이라면 저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만나보시는 게 도움이 되실 겁니다.”
* * *
데이비드의 얘기를 전해 들은 나는 충격에서 쉽게 깨지 못했다.
에런 베이커가 날 만나기 위해 한국에 오겠다니!
이게 정말 실화인가?
아직도 잘 믿기지가 않는다.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데, 선우가 말했다.
“아니, 에런 베이커를 만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미야모토 시타로가 널 만나기 위해 한국에 온다고 생각해봐.”
그러자 선우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허억! 그런 영광스러운 일이!”
“내가 지금 딱 그런 상황이야.”
“흠, 알렌 에버하트를 만난 게 더 대단하지 않나?”
“그렇진 않아.”
알렌 에버하트는 관종이라 대중들 앞에 나서는 것을 즐기고, 사방에서 출몰한다. 때문에 그를 만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에런 베이커는 와킨스빌 밖으로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다. 주주총회도 그곳에서 여니까.
때문에 별명이 ‘와킨스빌의 현자’다.
또한 주주총회를 제외하면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거의 없었다.
게다가 그의 현재 나이는 90세.
워낙 고령인 만큼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가는 일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런데 한국에 온다니!
그것도 나를 만나기 위해!
선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런데 돈은 니가 더 많지 않나?”
에런 베이커의 화이트로드 지분은 16퍼센트 수준.
반면 컨티뉴 캐피탈은 100퍼센트 내 거다.
투자한 기업들이 다들 비상장이라 가치평가가 어렵긴 하지만, 컨티뉴 캐피탈의 가치는 최소로 잡아도 2,000억 달러 이상.
1,000억 달러에 불과한(?) 에런 베이커에 비하면 내가 좀 더 많은 셈이다.
“뭐, 돈이 중요한 건 아니지.”
그가 존경받는 이유는 단지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이 아니다. 옳은 투자 철학을 세우고, 평생에 걸쳐 이를 실천하며 살았기에 존경받는 거다.
내 얘기를 들은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미야모토 옹 역시 게임을 많이 팔아 존경받는 게 아니라, 게임에 대한 철학 때문이니.”
원래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이를 실천하는 게 어려울 뿐이지.
그러나 에런 베이커와 미야모토 시타로는 평생에 걸쳐 각자 자신의 말을 결과물로 입증해 보였다.
때문에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거고.
“그래서 에런 베이커 회장님께서 무슨 일로 널 보자는 건데?”
“나한테 투자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다는데.”
그러자 선우는 눈을 껌벅였다.
“이게 무슨 게일 베이츠가 컴퓨터에 OS 깔아달라는 소리야?”
“그러게나 말이다.”
사실 내가 제일 황당하다.
차라리 알렌 에버하트에게 로켓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말지.
설마 나한테 오를 만한 종목을 찍어달라고 하지는 않을 테고.
그렇다면 투자에 대한 전반적인 얘기가 될 텐데…… 문제는 나한테 무슨 대단한 인사이트가 있는 게 아니라는 것.
만약 회귀하지 않았다면 그저 일개 증권사 직원에 불과했겠지.
대체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사실 안 만나겠다고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나의 팬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에런 베이커를 단독으로 만날 기회는 흔치 않다.
오죽하면 그와 같이 점심 먹으며 대화하는 자선경매가 1천만 달러에 낙찰되겠는가?
다시 말해 에런 베이커와 단둘이 얘기를 나눈다는 것은 1천만 달러의 가치가 있다는 것. 어쩌면 나에게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 수도 있고.
게다가 현재 그는 90세의 고령.
이번이 아니라면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지 모른다.
* * *
[(WST) 화이트로드 에런 베이커 회장 한국 방문!]
(전략)
……에런 베이커 회장이 다음 주 한국을 방문할 거라는 소문에 대해 화이트로드 측은 사실이라 확인해주었다.
다만, 방한 이유에 대해서는 별다른 코멘트를 하지 않았다,
그가 현재 90세의 고령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특별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베이커 회장이 한국을 찾는 것은 20년 만으로,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 것 역시 12년 만이다.
(중략)
투자의 귀재, 와킨스빌의 현자인 그가 어떤 이유로 한국을 방문하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어떤 얘기를 할지, 벌써부터 전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에런 베이커가 방한할 거라는 기사를 본 한국 투자자들은 깜짝 놀랐다.
-어! 베이커 옹이 한국에 온다고?
-아니, 그런 귀한 분이 이런 누추한 곳까지 ㅎㄷㄷ
-중국도 일본도 아닌, 한국을 콕 찝어서 오다니!
-국뽕이 차오른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는 거야?
-설마 국장에 투자하려는 건가?
-지금이라도 한국 주식 사야 하나?
-그래서 재타이거랑 만나, 안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