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8화. K-바가지 (1)
회사 청소는 청소업체가 알아서 해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책상 아래 얘기. 다들 책상 위에는 온갖 것들을 가득 쌓아두고 있었다.
원래 회사원들은 다른 사람이 책상 위 물건에 손대는 것을 싫어한다. 게임 개발자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평소 치우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다 필요한 것들이라며 털끝 하나 못 건드리게 하던 잡동사니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선우는 깨끗해진 책상 위를 보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하면 되는구나.”
“위기 상황에서는 뭐든 할 수 있는 법이지.”
특수부대원이 쳐들어와도 불가능했을 일이 여고생이 온다는 말에 이렇게 쉽게 되다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이 도착했다.
견학을 온 학생은 스무 명.
학생들은 일제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갑작스러운 여고생 무리의 등장에 직원들은 다들 엄청 신경 쓰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티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어디 보자. 버그 픽스가…….”
“이번 1.17 패치에 대한 피드백 정리했나요?”
“이번 컨퍼런스에 자료 보냈어요?”
“…….”
다들 애쓴다.
선우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SW게임즈에 잘 오셨습니다.”
학생들끼리만 온 건 아니었고, 20대 후반 정도의 여성도 함께였다.
다름 아닌 인솔 교사.
꾸민 듯 안 꾸민 듯 단정하면서도 화사한 복장을 한 그녀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전영고등학교 미술선생 김보라입니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여고생들이 한마디씩 했다.
“저희 선생님 아직 미혼이에요.”
“남자친구도 없으세요.”
“지금 애인 모집 중이시래요!”
그러자 김보라 선생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너, 너희들 조용히 안 해!?”
말은 그렇게 해도 은근 싫지 않은 것 같은 눈치다.
선생님에게 이런 장난치는 건 요즘 애들도 똑같구나.
“지금부터 회사를 둘러 보고 게임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려드릴 테니, 보고 궁금한 거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김보라 선생이 시작 전 학생들에게 주의사항을 말해주었다.
“사진 촬영 금지, 개별 행동 금지, 방해행위 금지. 알았지?”
선우는 학생들과 함께 회사를 한 바퀴 돌며 각자의 역할에 대해 말해주었다.
다들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견학을 했다.
이어서 회의실로 들어가자 질문이 쏟아졌다.
“게임을 만들려면 코딩을 배워야 하나요?”
“예전에는 그랬는데 최근에는 코딩 없이도 게임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많이 나와있어요. 블록밸리와 나이트라이트가 대표적이죠. 그리고 게임은 프로그래밍이 전부가 아니라 시나리오, 음악, 미술 등이 합쳐진 종합 엔터테인먼트이기 때문에…….”
선우는 전자칠판에 글을 써가며 열정적으로 설명해주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흠, 제법 어른다운걸.
* * *
난 트리시와 통화했다.
[헤이, 미루. 잘 지내고 있어요?]
“네. 트리시는요?”
[열심히 취재하고, 열심히 기사 쓰고 있어요.]
트리시는 현재 월스트리트의 가장 유명한 기자.
기사의 영향력이 워낙 크다 보니 월가의 내로라하는 투자자들이 그녀의 취재에 응했다. 트리시 덕분에 난 한국에 있으면서도 월스트리트의 생생한 분위기를 전달받을 수 있었다.
[드림페이는 엄청 대박이네요. 미국에서도 난리예요. 게임 업계에서는 완전히 자리 잡았네요. 저도 가입했어요.]
“잘했어요.”
[미루 말대로 리믹스는 결국 상장폐지됐네요.]
리믹스 상장폐지는 외국에서는 별 이슈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부분 국내에서 거래되고, 외국에서 거래되는 양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니까.
투자자들에게 끼치는 영향도 미미했다.
그러나 게이머들에게는 꽤 큰 영향을 끼쳤고, P2E 게임에 대한 반감이 커지며 관련 게임사들 주가는 소폭 하락했다.
트리시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최근 벤자민 디아민디 감독님에게 재밌는 제안을 하나 받았어요.]
“뭔데요?”
[게임스타트 사태를 영화화하려고 하는데, 같이 시나리오를 써보는 게 어떠냐구요.]
난 깜짝 놀랐다.
“어! 정말요?”
[네. 시나리오는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라서 후반 작업만 같이 하면 될 것 같아요.]
실제로 1회차 때도 게임스타트 사태는 다큐멘터리와 영화로 만들어졌다.
발단은 1회차랑 이번이나 비슷하지만, 결과는 나로 인해 좀 달라졌다.
원래는 마지막에 개인투자자들이 뿔뿔이 흩어지며 큰 손실을 본 사람이 속출했지만, 이번에는 공개매수 덕분에 거의 모두가 이익을 보고 헤지펀드들을 털어먹었다.
결말이 사이다(?)로 바뀐 만큼 영화로 만들면 크게 흥행할 것이다.
“영화 시나리오까지 진출이라니. 엄청난데요.”
[헷, 다 미루 덕분이에요.]
“주연은 누구예요?”
[아마 다리안 헤럴슨이 맡게 될 것 같아요.]
“어떤 역할인데요?”
[베팅닐이요.]
“아하.”
베팅닐은 리딧 월스트리트 에이프 채널에서 게임스타트 관련 글을 올리며 매수를 독려하고, 개인투자자들을 이끈 인물.
다리안 헤럴슨이 베팅닐이라.
왠지 인생 캐릭터가 만들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번 영화에 지유도 출연할 수 있대요.]
“어! 정말요?”
[네. 디아민디 감독님이 세븐 라운드에서 본 지유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나봐요.]
“오…….”
같이 세븐 라인드를 본 게 이런 결과를 불러올 줄이야.
벤자민 디아민디 감독은 할리우드의 흥행 보증수표.
올리버 페이지 감독에 이어서 벤자민 디아민디 감독의 영화까지 출연한다면, 배우로서 한 단계 더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트리시와 통화를 끝낸 나는 생각난 김에 지유에게 연락했다.
[앗! 선배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있어?”
[네네. 선배님은요?]
“나야 뭐 똑같지.”
[많이 바쁘시죠?]
“뭐…….”
사실 할 일 없어서 놀고 있는 중이다.
뭐, 내가 놀아도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하니 괜찮겠지.
“얘기 들었는데, 이번에 벤자민 디아민디 감독 영화에 출연할 수도 있다며?”
[네. 연락받고 너무 기뻐서 저도 모르게 소리 질렀어요.]
“축하해.”
세븐 라운드 시즌2 촬영에, 할리우드 영화 촬영까지, 올해도 많이 바쁘겠구나.
“이번 신곡도 좋던데.”
[정말요?]
“응.”
요즘 연기에 열중하느라 가수로서 폼이 떨어지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역시나 지유는 지유였다.
[아! 저 다음 달에 부산에서 콘서트해요.]
“K-팝 페스티벌?”
[네네.]
다음 달에 부산에서 K-팝 페스티벌이 열린다.
기간은 무려 사흘로 이 기간 동안 합동 콘서트, 개인 콘서트, 패션쇼, 사인회, 팬미팅 등 각종 행사가 열리는 그야말로 초대형 페스티벌이다.
수많은 기획사가 참가하는 이런 기획이 가능한 것은 컨티뉴 캐피탈 한국지사가 엔터 업계 전반에 투자를 한 덕분.
이번 행사는 드림페이 활성화 과정의 일환으로 기획됐다.
애니버스는 세계 최대 엔터 플랫폼. K-팝이 중심임에도 한국보다 해외 가입자가 몇 배나 많다.
공연 예매의 경우 해외결제가 자주 이뤄지는 만큼, 환전과 해외결제 수수료가 없는 드림페이가 적격이라 할 수 있다.
이 엄청난 이벤트에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 K-팝 팬들이 관심을 가졌고, 정부와 지자체도 홍보에 나섰다.
[그런데 좀 문제가 있는 모양이에요.]
“응? 무슨 문제?”
[뭐냐면…….]
* * *
부산은 모두가 아는 한국 제 2의 도시이자 해운대와 광안리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관광지. 여름철만 되면 전국의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든다.
하지만 겨울은 상대적으로 관광 비수기.
이럴 때 세계 최대 K-팝 페스티벌이 열린다는 소식에 지역 상권은 일제히 환호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K-팝 페스티벌 앞두고 숙박업소 바가지 요금 논란]
[1박 요금 평소의 10배. K-팝 특수에 부산 숙소들 바가지 상술]
[숙박비 폭등, 시 당국이 나서야…….]
전세계 K-팝 팬들이 몰릴 거라는 얘기에 숙박비가 폭등하기 시작했다.
일부 호텔들은 기존 예약자의 예약마저 취소하고 가격을 올려서 다시 내놓기도 했다.
당연히 여론이 좋을 리 없다.
-비수기에 이게 뭐 하는 짓거리냐?
-와아! 1박에 10만 원짜리 100만 원 됐네 ㅎㄷㄷ
-ㅅㅂ 뭔 숙소비가 하루아침에 열 배가 뛰냐?
-K-인플레이션에 짐바브웨도 울고 가겄소.
-진짜 바가지요금 해도 너무 하네.
-한국인이야 적응이 돼서 그러려니 하겠지만 외국인들은 어떡하냐?
-K-팝과 K-드라마 경험해봤으니, 이번에 K-바가지도 경험해봐야지!
-ㅎㅎ 이것이 K-컬쳐쇼크!
-아니, 애초에 K-팝 공연 보러 한국 온다는 것 자체가 한국에 호감이 있다는 뜻일 텐데.
-K-바가지 한번 경험하면 친한도 혐한이 될 듯~
-가격표 보고 실신해서 고국으로 실려가지 않으면 다행임.
-다시는 한국을 무시하지 마라!
* * *
난 동호 선배에게 말했다.
“다음 달 부산에서 열리는 K-팝 페스티벌 말이에요.”
“응. 왜?”
“그거 숙박비 바가지 문제가 좀 심각한 것 같은데요.”
동호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 지금 난리도 아니야. 이번 기회에 다들 한밑천 챙기자는 생각인지 다들 요금 올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더만.”
사람 몰리는 곳에서 바가지요금을 매기는 것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그래도 상식과 정도라는 게 있지 않겠냐만…… 이번에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한국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꽤 올 텐데. K-바가지 한번 경험하고 나면 그동안 K-팝, K-드라마로 쌓았던 이미지가 한방에 다 날아갈지도 몰라.”
한국 문화를 좋아해서 한국에 왔는데, 허름한 호텔 1박에 50만 원, 돼지고기 몇 점에 5만 원, 전통과자 한 봉지에 7만 원, 어묵 한 그릇에 1만 원인 걸 경험한다면?
과거에는 바가지를 경험해도 주변 사람들에게만 알리고 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SNS를 타고 순식간에 전세계로 퍼진다.
좋은 이미지 쌓는 데는 한참 걸리지만, 나쁜 이미지 쌓는 건 순식간.
까딱 잘못하면 K-팝뿐 아니라 한국 대중문화 전반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자체는 손 놓고 있나요?”
“일단 부산시에서 계도랑 단속하겠다고 하는데, 별 소용 없겠지. 요금을 얼마로 책정하느냐는 파는 사람 마음이니까.”
“흠.”
동호 선배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죽하면 행사를 취소하거나 다른 도시로 옮기는 것까지 검토했는데, 이것도 쉽지가 않아.”
이 정도 대규모 페스티벌을 소화할 수 있는 도시는 몇 곳 안 된다.
공연장 같은 경우 이미 다 예약해놨을 테고, 팬들도 이에 맞춰 여행 계획을 짜놨을 테고.
“그리고 다른 도시로 옮겨봐야 어차피 거기도 똑같이 바가지요금 씌울 거 아니야?”
“그렇겠네요.”
그렇다고 이 상황을 가만히 놔둘 수는 없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
“안 그래도 이 문제로 애니버스 쪽이랑 대책 회의할 예정이야.”
“그럼 저도 갈게요.”
내친김에 지유도 부르기로 했다.
내 연락을 받은 지유는 놀란 듯 물었다.
[예? 저도 가도 되나요?]
“응. 너야말로 당사자잖아. 얘기를 들어보면 좀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지유는 바로 대답했다.
[네네. 갈게요,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