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화. Don't be evil (7)
강남 유성타운.
이곳에는 사장단과 임원진들이 차례대로 모여들었다.
비서실 직원들은 속속 들어오는 차량의 문을 열며 방문객을 맞이했다.
유성전자는 한국 내의 임직원 수만 해도 10만 명이 넘는 거대 기업.
전세계를 상대로 영업을 하는 데다가 워낙 사업 영역이 넓다 보니, 같은 회사에서 일하면서도 1년에 얼굴 한번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오랜만에 만난 이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장님.”
“오! 김 상무 오랜만이야.”
“에이, 상무라니요. 얼마 전 전무로 승진했습니다.”
“하하!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꼬꼬마 같던 친구가 어느새 전무라니. 시간 참 빨라. 애는 잘 크고?”
“예. 첫째는 얼마 전 결혼했습니다.”
“아, 맞다. 그렇지. 해외 출장 중이라 못 가서 미안해. 축의금은 잘 받았지?”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풍성함을 자랑하시던 사장님께서도 어느새 정수리가 휑해졌…….”
“어허!”
미리 모여 인사와 잡담을 나누던 이들은 시간이 되자 다들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유성전자의 임원급이면 어디를 가도 대접받는 위치다.
이 중에는 능력을 인정받아 다른 기업에서 이직해왔거나, 신입사원 시절부터 산전수전 다 겪고 이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도 있었다.
그들 모두는 긴장 어린 표정을 한 채 한 사람을 기다렸다.
‘무슨 일로 회의를 연 거지?’
정례회의도 아니고, 예정에 없던 회의다.
각자 중요한 업무를 맡고 있는 바쁜 사람들을 갑자기 한자리에 모았다는 건 중요한 발표나 안건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김지석 비서실장이 말했다.
“회장님께서 들어오십니다.”
그 말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한 남자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유성그룹 총수이자 유성전자 회장인 유재호였다.
“앉으세요.”
그가 먼저 자리에 앉자, 다른 사람들 역시 자리에 앉았다.
유재호 회장은 임원들의 면면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바쁠 텐데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돌아가셔서 업무를 보셔야 할 테니, 바로 회의를 시작하죠.”
그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오늘 이렇게 모이시게 한 이유는 중요한 경영 판단을 내리기 전에 의견을 들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유성전자는 앞으로…….”
한동안 설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설명이 끝나고 나자 깊은 침묵이 감돌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였던 만큼 다들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후.
IM부문 구동진 사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말씀은 구블과 갈라서시겠다는 겁니까?”
“아니요.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파트너십에 약간의 변화를 주는 것뿐이죠.”
“구블에서 강하게 반발할 겁니다.”
구블은 유성전자가 코스믹스토어를 키우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표하긴 했지만, 직접적인 대응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앱마켓은 구블의 여러 사업 중 하나일 뿐, 핵심 사업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건은 다르다.
그야말로 구블의 핵심사업을 건드리는 일이니까.
만약 이 일로 인해 구블과 관계가 틀어지면, 다른 사업 역시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받을 게 분명했다.
“아시겠지만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파트너도 없습니다. 구블은 자체 스마트폰인 셀픽 시리즈를 내놓고, 중국 제조사들과 협력을 강화하며 코스믹폰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일부 서비스를 더 나은 것으로 바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유성전자가 구블의 눈치를 봐야 하는 기업입니까?”
예전에 회장이 이런 말을 했다면 다들 속으로 실소를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유재호 회장의 경영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 유명훈 회장은 유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올려놓은 장본인이다. 그러나 유재호는 회장직에 오를 때까지 딱히 보여준 게 없었다.
때문에 다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동우정밀 인수, RD쿼넷과 NP세미 등 팹리스사 인수, ADM 지분 투자, 데이터센터 사업 진출 등등.
투자하는 것마다 대박을 터트리며, 유성전자뿐 아니라 그룹사들 주가를 끌어올렸다.
오죽하면 주주들 사이에서도 ‘유성전자 주가는 유재호 회장이 멱살 잡고 캐리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사실상 최근 유성전자 주가 상승은 전부 유재호 회장의 경영 판단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유재호 회장은 다시 물었다.
“설사 이번 일로 구블이 등을 돌린다고 해도, 유성전자가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입니까?”
유성전자는 코스피 시총 부동의 1위 기업이지만, 엔플이나 구블 등의 빅테크 기업에 비하면 을의 위치였다.
이전이었다면 구블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유성전자가 구블과 멀어진다고 해도 과연 구블이 유성전자와 쉽게 등 돌릴 수 있을까?
설사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상관없다.
유성전자는 반도체 시장에서 독보적인 기업으로 올라섰고, 자체 칩을 설계하고 코스믹스토어를 키우며 스마트폰 판매량 역시 크게 늘렸다.
또한 스노우 크래시와 손을 잡고 데이터센터를 건설하며, 스스로 반도체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덕분에 주가 역시 빅테크 기업들을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비벼볼 만한 수준까지는 올라섰다.
구동진 사장이 먼저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경우 구블 역시 큰 피해를 입게 될 겁니다.”
임원들의 얼굴에는 어느새 한번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떠올라 있었다.
유재호 회장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럼 진행하겠습니다. 향후 구블과 생길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분석하고, 대응 방법 정리해 제출하세요.”
* * *
앱공정성연대(CAF)는 연일 플레이마켓 독점 강요에 대해 구블을 강하게 비난했다.
소송에 가담하는 게임사들은 점점 늘어났고, 각국 규제 당국은 조사에 나섰다. 여론의 이목이 쏠리자 정치인들 역시 발언 수위를 높였다.
“CMA(영국 경쟁시장국)는 즉시 구블에 대한 제재에 나서야 한다!”
“독점은 결국 소비자 피해로 이어지는 만큼 철저한 조사와 처벌을 촉구합니다.”
“소비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EU집행위가 나서야 합니다!”
“빅테크 기업들의 만행을 더 이상 두고 봐서는 안 됩니다!”
구블은 공식 입장문을 발표했다.
[구블이 게임사들에게 플레이마켓 독점을 강요했다는 것은 결코 사실이 아닙니다. 플레이마켓을 택한 것은 개별 게임사들의 선택이었을 뿐입니다. 다만 일부 직원들이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을 확인했고, 당사는 사실확인 후 조치할 예정입니다. 또한 일부 사실이 아닌 부분에 대해서는 법률적 검토를 거쳐 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플레이마켓은 공정한 경쟁을 지향합니다.]
동시에 각국에 행정 소송을 제기해 시간 끌기에 들어갔다.
이에 앱공정성연대는 성명을 발표하며 구블의 행위를 강하게 규탄했다.
[플레이마켓의 독점 강요는 본사의 지시에 의해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이루어졌음이 이미 밝혀졌다. 구블은 책임 회피와 시간 끌기 대신 당당하게 조사에 임하기 바란다.]
레전드게임즈는 앞장서서 업계의 지지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탐 스콧 CEO는 업계의 동참을 호소했다.
“다들 엔플과 구블과의 소송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계란에 신념을 실으면 바위도 깰 수 있다고!”
처음에는 모두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행동에 나섰고, 이제는 조금씩 균열이 생기는 것이 보였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몰라!”
“지금이 아니라면 영원히 이 상황을 바꿀 수 없어!”
“설사 패배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컨티뉴 캐피탈이 있다!”
“정신 차리자, 진짜, 정신 차리자, 나 자신아. 나는 지금 레전드게임즈를 지키는 게 앱마켓을 지키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절대 레전드게임즈 못 잃어! 코스믹스토어 못 잃어! 나는 컨티뉴 캐피탈 못 잃어!”
“만국의 앱 개발사들이여! 단결하라!”
여기에는 게임사들뿐 아니라, 앱 개발사들 역시 동참했다.
다들 불이익을 받을 위험을 감수하고 집단행동에 나선 것은 그만큼 상황이 절박했기 때문이다.
어느새 스마트폰 앱 시장은 PC 소프트웨어 시장을 뛰어넘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런데 이 거대한 시장이 단 두 개의 기업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바로 엔플과 구블이다.
두 빅테크 기업의 독과점으로 인해 가격경쟁은 이뤄지지 않았고, 30퍼센트 수수료는 고정요율이 됐다.
엔플과 구블은 앱마켓으로 매년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였지만, 수수료율은 조금도 낮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포기했지만, 누군가는 이 수수료를 낮추기 위해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ㅋㅋㅋ 독점 강요는 일부 직원의 일탈.
-꼬리 자르기 할 줄 알았다.
-수수료나 낮춰라~
-이게 디지털 건물주랑 뭐가 다르냐?
-근데 건물주는 적어도 장사할 공간은 제공해주잖아. 그렇게 따지면 엔플과 구블은 서버라도 제공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서버는 개발사들이 각자 돈 내서 운영하는데, 얘들은 대체 뭘 한다고 30퍼센트를 뜯어감?
-건물주라기보다는 통행세에 가깝지. 다리 하나 지어놓고 통과하려면 30퍼센트 내고 가라는. 다리 뒤에 장사할 공간은 니들이 알아서 짓고.
-그래서 이번에는 진짜 수수료를 낮출 수 있을까?
-인앱결제 확대나 철회해라!
사람들은 다들 앱마켓 수수료를 놓고 벌이는 이번 소송이 레전드게임즈 소송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지는 2차전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새로운 기사가 시장을 뒤흔들었다.
* * *
[(WST) 유성전자 코스믹폰, 기본 검색엔진 NS 밍으로 갈아타나?]
(전략)
현재 전 세계 검색엔진 시장에서 구블의 점유율은 93.3퍼센트를 차지했고, 모바일 검색엔진 시장에서는 96.8퍼센트를 차지했다.
반면, NS의 밍은 각각 2.9퍼센트와 0.5퍼센트에 불과하다.
성능이 워낙 막강하다 보니, 전세계 스마트폰 제조사들은 구블의 검색엔진을 기본으로 탑재하고 이에 따른 비용을 지불한다.
이는 구블의 경쟁자라 할 수 있는 엔플 역시 마찬가지다.
그동안 유성전자는 자사 스마트폰에 구블 검색을 기본으로 탑재해왔고, 이 계약에 따라 연간 30억 달러를 구블에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유성전자는 계약 기간이 종료되면 코스믹폰의 기본 검색엔진을 기존 구블에서 NS의 밍(Ming)으로 교체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배경에는 NS와 스노우 크래시의 협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NS 측에서는 스노우 크래시는 미미르를 활용해 밍의 검색엔진 알고리즘 개선을 도왔고, 200여 명의 개발자가 참여한 사내 테스트 결과 검색엔진의 성능이 크게 올라갔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중략)
유성전자가 구블 대신 NS 밍을 코스믹폰에 탑재한다면 구블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타격을 입는다.
먼저 30억 달러의 매출 손실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당장의 매출보다 큰 타격은 구블이 독점하고 있던 검색엔진 시장에 균열이 생긴다는 것이다.
유성전자는 전세계 스마트폰 1위 업체인 만큼, 구블이 유성전자를 잃게 되면 모바일 검색엔진 시장에서 점유율이 크게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추후 있을 엔플의 검색엔진 탑재 협상에도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