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9화. 기공식2 (1)
난 선우가 타준 믹스커피를 마시며 대화했다.
“대체 뭐가 그렇게 바빠?”
“알잖아. 지금 아이스스톰 인력이 빵꾸 나있는 거.”
현재 아이스스톰은 극심한 개발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중이다.
그 원인은 바로 작년에 터진 성추행, 성폭행, 성희롱, 성차별 사건 때문.
처음 아이스스톰에서 성폭력 문제가 터졌을 때만 해도 한 직원의 범죄행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조사 과정에서 사내 성추행 문제가 줄줄이 드러났다.
피해를 당한 여직원들은 제보를 하고 처벌을 요구했지만, 윗선에서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넘어갔다.
여기에 더해 기업 내에는 성차별적인 문화가 만연해 있어서, 여성 직원들에게 각종 차별을 가하고, 일부러 승진 심사에서 떨어트리기도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게임 업계는 물론 미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가해자로 지목된 당사자들은 조사를 받고 사직서를 썼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매튜 스트리블링 CEO까지 사임했다.
이 사태로 인해 맥스비전 스톰이 기업 매각까지 결정하게 됐으니, 보통 큰 사건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제라도 바로 잡아서 다행이지만, 문제는 그렇게 해서 나간 사람들이 주요 개발자였다는 것.
고위 임원, 디렉터, 리드 디자이너, 그래픽 디자이너 등등.
때문에 엄청난 업무 공백이 발생했고, 개발 중이던 게임은 규모를 축소하거나 일정을 연기해야 했다.
선우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선 개발자들 뽑고 조직을 개편하고 있으니, 끝나면 좀 나아지겠지.”
“고생이 많네.”
하기야 한 번에 이 거대한 기업을 집어삼켰으니, 당분간은 힘들 수밖에.
난 선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래.”
멀리 갈 것 없이 그냥 지하 식당가에서 먹기로 했다.
우리는 대충 밥을 먹은 다음, 유성타운 지하에 있는 유성디지털스토어를 둘러보았다.
매장의 메인 섹션에는 역시나 스마트폰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전과는 달리 게이밍존이 따로 마련되어 있고, 거기에는 입간판과 홍보문구가 적혀 있었다.
[코스믹폰으로 나이트라이트, 블록밸리, 판타지아 테일즈R을 마음껏 즐기세요!]
그 옆의 부스에는 레전드덱이 전시되어 있었다.
“오! 판타지아 테일즈R 깔려있네. 이런 거 보면 뿌듯하지 않아?”
선우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 이런 걸로 뿌듯할 것까지야. 빨리 올라가자. 나 일해야 해.”
돌아가려는데,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들어와 직원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레전드덱 구매할 수 있나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현재는 품절입니다.”
“그럼 언제 들어오나요?”
“아직은 저희도 연락 받은 게 없어서요.”
레전드덱 초도 물량이 매진된 뒤.
유성전자는 공장을 풀로 돌려 기기를 찍어내고 있지만, 현재까지도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중이다.
현재까지 판매량은 350만 대.
이는 NS, 소뉴, 린텐도 3사 콘솔을 제외하면 가장 많이 팔린 콘솔이라 할 수 있다.
“아! 여기는 있을 줄 알았는데. 뭔 가는 곳마다 품절이야. 레전드덱 사서 들고 다니며 판타지아 테일즈R 해야 하는데.”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물었다.
“판타지아 테일즈R이 그렇게 재밌어?”
“너 아직도 안 해봤어? 그놈의 브라더후드M 때려치우고 빨리 하라니까.”
“뭐가 그렇게 재밌는데?”
“내가 해본 MMORPG 중 최고야. 캐릭터, 스토리, 연출, 퀘스트 등등. 말하자면 끝도 없어. 이 게임 만든 사람 아무래도 천재 같아.”
그는 신나서 친구에게 판타지아 테일즈R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설명해주었다.
난 선우의 어깨를 쳤다.
“뭐해? 가자며?”
“잠깐만. 이것만 마저 듣고.”
“…….”
이 자식 뿌듯해하는 거 맞네.
* * *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중요한 행사가 하나 있었다.
바로 유성전자 반도체 공장 라인 기공식.
최근 반도체 업계에서 공격적인 투자가 이뤄지고 있는 만큼, 생산 라인 증설은 딱히 특별할 게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세계의 관심이 집중됐다.
그 이유는 기존 EUV 방식이 아닌 NIL 방식을 적용했기 때문.
EUV가 광원으로 회로를 그리는 방식인 반면, NIL은 도장을 찍듯 웨어퍼에 찍는 방식.
NIL이 EUV보다 훨씬 경제적이지만, 기술적 문제로 인해 미세공정에는 그동안 적용되지 못했다.
그런데 유성전자가 동우정밀을 인수한 이후.
유성전자는 동우정밀 특허를 기반으로 비용을 투자해 NIL 기술 고도화에 나섰다. 그리고 드디어 성공했고, 5나노 생산 라인에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유성전자, 화성 공장 5나노 라인 건설에 5조 원 투자!]
[EUV가 아닌 NIL 방식 채택!]
[세계 최초로 초미세공정에 NIL 적용!]
[유재호 회장의 동우정밀 인수. 미래를 보는 투자였나?]
이제까지 미세공정에는 EUV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리고 그 장비를 만드는 회사는 전세계에 오직 한 곳뿐.
바로 네덜란드의 ESML이다.
ESML의 EUV 장비가 없으면 아예 생산 라인 건설이 불가능한 만큼 그동안 설비투자에 있어서 병목현상이 벌어졌다.
그런데 정말로 NIL 방식을 미세공정에 적용할 수 있다면, 향후 반도체 업계의 판도가 바뀌게 될 것이다.
때문에 PSMC 등의 경쟁사는 물론, 관련 회사들은 일제히 이번 투자를 주목했다.
이번 투자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은 ESML.
자칫하면 독점적 지위가 깨질 수도 있다는 우려에 3000억 달러까지 올랐던 ESML 주가는 23퍼센트가 폭락했다.
-미세공정에 NIL을 적용한다고? 저게 가능해?
-과연 수율과 성능이 제대로 나올까?
-설마 안 되는데 재타이거가 5조를 투자하지는 않을 거 아니야?
-이미 기술 자체는 완성했다잖아. 실제라인에 적용해봐야겠지만.
-동우정밀 인수는 유성전자의 신의 한수!
-경쟁사에 넘어가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
-이거레알~ 원래 중국기업이 인수하려 했는데, 재타이거가 먼저 인수를 결단함.
-이야! 역시 재타이거!
* * *
난 동호 선배와 함께 기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차를 타고 경기도 화성으로 향했다.
“화성 오랜만이네. 예전에 기업 탐방 갈 때 가끔 갔던 것 같은데.”
“그러게요.”
화성에는 유성전자의 국내 최대 반도체 공장이 위치해 있다.
그렇다 보니 반도체 관련 소부장 기업들도 많이 몰려 있어서 한때는 열심히 탐방을 다녔다.
“그러고 보니, 알렌 에버하트는 화성 언제 간대?”
“…….”
이게 갑자기 뭔 질문이야?
그리고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당사자한테 직접 물어봐요.”
“투윗 날렸는데, 답변이 없어.”
그야 그런 식으로 투윗 날리는 사람이 하루에 수만 명쯤 될 테니까.
“NIL 방식 미세공정 라인이라니. 동우정밀이 제대로 한 건 했네. 한때는 망하기 직전의 회사가 이런 엄청난 기술을 개발해내다니. 유성전자 입장에서는 완전 잭팟 아니야?”
“대박이죠.”
이 기술이 가진 가치는 돈으로는 환산이 안 된다.
덕분에 유성전자는 미세공정에서 주도권을 잡았으니.
“그때 니가 회사채 알아봐달라고 했을 때만 해도 의아했었는데. 설마 채권 살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거야?”
“그럴 리가요.”
1회차 때 동우정밀은 중국기업에 인수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로 인해 유성전자에 인수됐다.
뭐, 중국기업이 기술 개발을 해낸 만큼, 유성전자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개발을 끝내고, 바로 생산 라인에 적용할 줄은 몰랐다.
* * *
경기도 화성 유성전자 반도체 공장.
NIL 라인 기공식에는 유재호 회장은 물론, 권혁준 부회장, 김필성 반도체 부문 사장, 동우정밀 사장, 화성시장, 화성부시장, 경기도지사, 화성시 국회의원 등이 정치인과 지역 유력 인사들이 전부 모였다.
또한 국내 언론사들은 물론이고, 전세계 언론사들이 몰려왔다.
행사는 순서에 따라 진행됐다.
테이프 커팅식을 하고, 도지사와 시장이 한마디씩했다.
이어진 순서는 현수막 퍼포먼스.
“하나, 둘, 셋!”
셋을 외치는 순간 모두가 버튼을 눌렀고, 불꽃이 터지며 옥상에서부터 거대한 현수막이 아래로 떨어지며 쫙 펼쳐졌다.
거기에는 ‘화성 NIL 라인 기공식’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환호와 함께 박수가 터져 나올 타이밍이다.
그런데 행사장은 조용한 침묵에 휩싸였다.
모두가 할 말을 잃은 표정.
그 이유는 현수막이 거꾸로 펼쳐졌기 때문.
“…….”
아니, 이게 대체 뭔 일이야?
어떻게 하면 저걸 거꾸로 달수 있는 거지?
유성전자는 ‘관리의 유성’이라 불릴 정도로 실수가 없기로 유명했다. 특히 행사 진행에 있어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세계 최초 NIL 미세공정 도입이자, 무려 10조 원짜리 기공식이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행사에 대형 현수막이 거꾸로 걸리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아마 유성전자뿐 아니라, 유성그룹 행사 역사상 가장 큰 사고가 아닐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실소를 흘릴 헤프닝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동호 선배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 저거 담당한 직원 어쩌냐?”
“오우…….”
내가 그 직원이라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손발이 덜덜 떨리고 눈물이 날 것 같다.
직장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내일 장 열리면 주가 폭락하는 거 아니야?”
1~2퍼센트만 하락해도 1조 원 날아가는 건 순식간이다.
이건 답이 없다.
나라면 사직서 하나 올려놓고 핸드폰 끈 다음 도주하지 않았을까?
몇몇 직원들이 급하게 어딘가로 연락을 하고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당장 손쓸 방법은 없었다.
공장 건물 벽면을 덮은 거대 현수막이다.
저걸 다시 말아 올려서 돌려 달려고 하면 적어도 한두 시간은 걸릴 것이다. 결국 남은 행사는 현수막을 거꾸로 건 채 진행해야 한다.
하필 다음 순서는 유재호 회장의 연설.
세계 최초 NIL 미세공정 라인 기공식이다.
이 장면이 오늘 전세계에 뉴스에 나가는 것은 물론, 앞으로도 두고두고 쓰이게 되이게 될 것이다.
그런데 거꾸로 걸린 현수막을 배경으로 연설을 하게 생겼다.
정말이지 초대형 사고다.
어떻게 할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유재호 회장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는 거꾸로 걸린 현수막을 보며 말했다.
“많이 놀라셨죠? 저도 좀 놀랐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유재호 회장은 미리 준비해왔던 연설문을 내려놓고 말했다.
“사람이든 기업이든 실수를 하고 실패를 합니다. 이 자리에 서니 문득 유성전자가 처음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었을 때가 떠오릅니다. 유성전자의 반도체 역사는 실패의 역사였습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수많은 실패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유성전자는 이번에도 앞으로도 실패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장 큰 실패는 실패를 두려워하며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는 거라 생각합니다. NIL 방식을 미세공정에 적용하는 것은 업계 최초의 시도이고, 그 과정에서 여러 실수와 실패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멈추지 않고 지금처럼 계속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연설이 끝나고 나자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동호 선배는 박수를 치며 혀를 내둘렀다.
“이야! 유재호 회장 멋진데.”
“그러게요.”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