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6화. 가족 여행 (1)
권미자는 남편 한병진과 함께 가이드와 통역의 안내에 따라 트래킹 코스를 걸었다. 일행 중에는 그들 부부 외에 젊은 남성 둘도 있었다.
권미자는 작은 목소리로 남편에게 말했다.
“저 둘 왠지 좀 수상해 보이지 않아요?”
“뭐가?”
“친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까워 보이는데. 혹시 커플 아닌가?”
“흠,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병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미국이야.”
부부는 대화를 하며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하와이는 사시사철 여름 날씨. 햇빛은 세지만 습도가 낮고 바람이 선선해 그렇게까지 덥지는 않았다.
“젊었을 때 이런 곳을 많이 다녔어야 했는데.”
한병진의 말에 권미자는 동의했다.
“그러니까요. 이제라도 와서 다행이네요.”
“더 늙기 전에 앞으로도 좋은 곳 많이 다닙시다.”
권미자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결혼할 때만 해도 하와이든 발리든 다 데려가준다고 하더니, 겨우 세부 한 번 데려가 놓고선.”
공장에서 일하고, 애 키우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한병진은 변명하듯 말했다.
“그, 그래서 이렇게 하와이에 데려왔잖아.”
“당신이 데려온 거예요? 미루가 보내준 거지.”
“알잖아. 마음만 먹으면 나도 충분히 올 수 있는 거. 이번에는 특별히 미루에게 양보한 거야. 당신도 남편보다는 아들이 해주는 게 좋지 않아?”
“흥!”
권미자는 살짝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아들을 생각하니 왠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부모님 하와이 여행 보내주는 아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친구들에게 실컷 자랑했다.
“그런데 미루 일은 잘되고 있는 거예요? 요즘은 거의 미국에서 살다시피 하던데.”
“어어, 뭐 그렇지.”
모든 걸 알고 있는 남편과는 달리 권미자는 아들이 그저 미국에서 아는 사람이랑 작은 투자회사를 하는 것 정도로 알고 있었다.
“투자인지 뭔지는 잘되고 있대요?”
“그럼그럼. 돈도 엄청 잘 벌고 있대.”
컨티뉴 캐피탈은 이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모펀드.
수익률로는 따라올 수 있는 곳이 없을 정도고, 투자 하나하나 시장을 뒤흔들 만한 파급력을 지녔다.
때문에 가끔 관련 기사를 볼 때면 심장이 주저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권미자는 예전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사실 멀쩡한 회사 때려치우고, 투자인지 사업인지 한다고 했을 때만 해도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 뒤부터 모든 일이 잘되기 시작했다.
남편의 사업도 쭉쭉 성장해 이제는 대기업에 직접 납품할 정도로 커졌고, 좋은 집, 좋은 차, 그리고 가정부에 운전기사까지 생겼다.
권미자는 직감적으로 남편의 사업이 번창하는 건 아들이 힘을 써준 덕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불법적인 일을 하는 건 아니죠?”
“아, 아니. 그런 건 절대 아니야.”
아들의 말에 따르면 오히려 범죄자들을 붙잡기 위해 FBI랑 무슨 협력을 하고 있다고도 한다.
몇 번이나 남편의 다짐을 받은 권미자는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얘기를 하는 사이 가이드 겸 통역이 말했다.
“이제 곧 정상입니다.”
잠시 후, 탁 트인 하와이의 전경이 나타났다.
시내와 푸른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한병진은 아내를 보며 말했다.
“미루는 앞으로도 잘할 테니 지금처럼 지켜봅시다.”
권미자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누구 아들인데.”
* * *
한세나는 하와이에서 찍은 사진을 단톡방에 올렸다.
그러자 바로 친구들의 답장이 주르륵 올라왔다.
[소진: 바다 너무 예쁘다! 어때? 거기 바베이도스보다 더 좋아?]
[세나: 그건 아닌 듯. 대신 섬이 커서 좋아. 휴양지와 도시를 반반씩 섞어놓은 느낌이야. 근처 다른 섬 투어도 갈 수 있고.]
[소진: 미루 오빠는 어때? 잘 있어?]
[세나: 그럼.]
[유경: 세나 넘 부럽~~]
[예진: 오빠도 오빠 나름이지. 미루 오빠 같은 오빠가 어디 흔한 줄 알아? 우리 오빠는 타이탄 코인으로 날린 거 복구하겠다고 또 코인 투자하겠다고 했다가 집안 뒤집어짐.]
친구들은 다들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유경: 세나는 좋겠다~ 오빠가 하와이도 데려가주고. 나만 오빠 없어ㅜㅜ]
[예진: 혹시 여동생 하나 더 안 필요하시대?]
[소진: 같이 여행 간 김에 미루 오빠한테 잘해드려!]
생각해보면 오빠 덕에 얻은 혜택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인데, 그동안 내가 오빠한테 너무 소홀했던 것 같아.’
애초에 따로 사니 얼굴 볼 일도 얼마 없기도 하고. 그러니 지금처럼 같이 있을 때 강렬한 임펙트를 심어줄 필요가 있다.
결심을 한 세나는 단톡방에 글을 올렸다.
[세나: 오케이. 이번 기회에 오빠의 마음을 확실하게 사로잡겠어!]
* * *
난 정오가 지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
늦게 거실로 나오니, 세나가 소파에 누운 채 누군가와 열심히 톡을 하며 히죽히죽 웃는 것이 보였다.
“…….”
어째서인지 기분이 좀 나쁜데.
“부모님은?”
내 물음에 세나는 바로 대답했다.
“나가셨어. 오늘 트래킹 가는 날이잖아.”
“아, 그랬지.”
하와이라고 하면, 보통 푸른 바다와 새하얀 백사장을 생각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트래킹 코스 역시 매우 유명하다.
아버지가 평소 등산을 좋아하시는 만큼 여행 코스로 추가했다.
가이드가 함께하지만 아무래도 외국이다 보니 걱정이 돼서 경호원도 함께 보냈다. 부모님은 일반 관광객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넌 왜 같이 안 갔어?”
“두 분이 오붓하게 즐기시라고. 신혼여행 느낌 좀 내시면 좋잖아.”
“…….”
그냥 걷기 싫어서 안 간 것 같은데.
“안 나가고 호텔에 있게?”
“오늘 하루는 특별히 오빠랑 놀아줄게.”
“응?”
이게 대체 뭔 소리야?
난 당황하며 물었다.
“……혹시 내가 뭐 잘못했니?”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데 왜 가만히 있는 날 괴롭혀?
내가 소파에 앉자, 세나는 슬금슬금 엉덩이를 움직이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친한 척하는지 모르겠다.
혹시 또 용돈 필요한가?
“오빠 오늘 일해야 하니, 혼자 놀도록.”
그러자 세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여기까지 와서 무슨 일이야?”
“할 일이 좀 있어.”
“좋아. 그럼 내가 오빠 비서해줄게. 오늘 하루는 날 비서라고 생각해.”
“응. 필요 없어.”
“에이, 그러지 말고.”
난 잠시 세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생각해보니 남들에게 가족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기에는 여동생이 딱이다.
여동생을 잘 챙겨주는 오빠라…… 나쁘지 않은 콘셉트군.
“아무 말 하지 않고 조용히 있을 수 있어?”
“그럼. 동생 못 믿어?”
세나는 5분도 조용히 있지 못하고 떠드는 성격.
그러나 이번에는 왠지 믿음이 간다.
다른 건 몰라도 얘가 영어를 못할 거라는 건 확실하니.
“오케이. 따라와.”
* * *
난 세나와 함께 호텔에서 빌린 차를 타고 호놀룰루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이 보이자 세나는 깜짝 놀랐다.
“어! 공항은 왜? 설마 엄빠 하와이에 버리고 혼자 돌아가게? 고구려장?”
“……고려장이겠지.”
참고로 고려 시절에도 그런 풍습은 없었다고 한다.
“마중 나가는 거야.”
“누가 오는데?”
“보면 알아.”
차는 금방 공항에 도착했다.
난 출국장에서 세나와 함께 기다렸다.
잠시 후, 20대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복장은 티셔츠에 반바지, 그리고 크록스.
그는 나를 보더니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형.”
“어서 와.”
겉보기에는 동네 백수처럼 보이는 그의 이름은 시드 루카스.
“오는데 힘들진 않았어?”
“괜찮아요. 편하게 누워서 왔어요.”
시드는 평소 잠자고, 먹고, 잠깐 쉬는 시간을 빼면 거의 일만 한다.
주 노동시간이 80시간쯤은 되지 않을까?
본인이 CEO고, 좋아서 하는 일이라지만, 너무 과로하는 것도 좋지 않다. 그래서 이번에 좀비네이도 촬영장 구경하러 가자는 핑계로 꼬드겨 하와이로 오라고 했다.
시드를 본 세나는 바로 아는 척했다.
“아! 전에 봤던 사람이네.”
그 머리로 용케 기억하고 있구나.
세나는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그런데 오빠가 저 사람 바보라고 하지 않았어?”
“…….”
응, 아니야.
시드의 뒤에는 중년 부부가 서있었다.
그들은 바로 시드의 부모님.
기왕 오는 거 가족 여행으로 부모님도 모시고 오라고 했다.
아버지는 백인, 어머니는 히스패닉계로 두 사람 다 시드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시드가 입양되었기 때문.
난 그들과 반갑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미루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제이든 루카스입니다.”
“미셸 루카스예요.”
두 사람 다 인상이 좋아보인다.
난 세나를 소개해주었다.
“이쪽은 제 여동생 한세나입니다.”
세나는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알로하~ 마이 네무 이즈 세나.”
그 모습이 귀여운지 시드의 부모님은 웃음을 터트렸다.
분위기를 보니 한세나 약간 도움이 된 것 같다.
“그럼 가시죠.”
* * *
하와이는 미국인들에게도 유명한 휴양지.
거리상으로 보면 한국이나 미국이나 거기서 거기다.
가족끼리만 조용히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호텔이 아닌, 호화 저택을 통째로 빌렸다.
웬 영국 귀족이 별장으로 쓰는 곳이라고 하는데, 평소에는 블랙우드 호텔 측에서 맡아서 관리하고, 신원이 확실한 사람에게만 빌려준다.
시드의 부모님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집을 둘러보았다.
“이런 곳에서 머물러도 되나요?”
“여기 엄청 비싸 보이는데.”
“괜찮습니다.”
시드가 벌어다 주는 돈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난 시드의 부모님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
시드 같은 천재를 키워낼 정도면 부모 둘 다 보통 사람이 아닐 거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아버지는 회사원에 어머니는 마트 직원.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아이를 갖고 싶었으나 생기지 않았고, 그래서 입양을 택했다고 한다.
부부가 시드를 입양한 것은 다섯 살 무렵.
“어렸을 때는 그냥 평범한 아이였어요.”
“하지만 호기심은 남달랐죠. 항상 모든 일이 일어나는 원리를 궁금해했어요. 특히 컴퓨터와 관련해서요.”
부부는 시드가 궁금해하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계가 분명했다. 그래서 보고 싶어하는 책을 빌려다 주거나, 인터넷에서 논문 등 자료를 찾아보는 법을 알려주었다.
시드는 혼자서 인터넷을 뒤져가며 코딩을 하고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졸업을 하자마자 실리콘밸리 회사에 입사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죠. 그쪽 CEO까지 집에 찾아왔었고.”
시드의 부모님은 세크라멘토에 거주 중.
실리콘밸리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만큼, 시드가 스노우 크래시(당시 쿨라우드)에 입사한 뒤부터는 따로 살았다고 한다.
“롤프 부치를 만나셨나요?”
“예.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얼굴이 반반하고 말이 번지르르한 게 좀 사기꾼 같은 느낌이었어요.”
하기야 그때는 미성년자였을 테니. 회사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했을 것이다.
제이든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말하길 시드가 앞으로 큰돈을 벌게 될 거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희는 돈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허락한 이유는 오직 하나. 시드가 그 일을 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죠.”
시드는 쿨라우드에서 일할 당시 수십만 달러의 연봉을 받았다.
어차피 사는 집도 회사에서 얻어줬고, 딱히 돈을 쓸 일이 없어서 부모님께 전부 가져다 드렸다고 한다.
자식이 돈을 잘 벌면 부모가 흥청망청 쓰거나, 투자를 하거나 사기를 당해 거액을 날려 먹는 것은 흔하디흔한 스토리.
하지만 시드의 부모님은 아들이 버는 돈에는 손도 대지 않고, 고스란히 모아놓고 있다고 한다.
이것만 봐도 얼마나 좋은 부모인지 알 것 같다.
이런 부모를 만난 것도 시드에게는 큰 행운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