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화. 박스오피스 (7)
[지유, 더 임페커블에서 인상 깊은 연기로 관객들의 호평]
[할리우드 러브콜 이어져……]
[지유 뮤직비디오, 에이튜브 1억 뷰 돌파!]
[지유, LA 주니어 하이스쿨 전격 방문!]
지유는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기 가수.
하지만 미국에서는 K-팝 마니아들 일부만 알 뿐, 대중적 인지도는 없었다. 그런데 세븐 라운드에 이어 더 임페커블까지 흥행하며, 미국에서의 인기가 식을 줄을 몰랐다.
어느 정도냐면 지유의 예전 곡들이 빌보드차트에 슬금슬금 올라왔다.
지유는 영화 홍보 행사와 함께 인터뷰를 소화하느라 며칠 동안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 * *
난 호텔 커피숍에서 지유를 마주했다.
나를 본 그녀는 반가워하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랜만이네.”
머리를 하나로 땋아서 묶고, 빵모자라 불리는 베레모를 썼다.
옆에는 여성 매니저가 함께였다.
나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를 들었는지 매니저는 허리 숙여 인사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경호원들도 같이 있으니, 아무 걱정 마세요.”
그녀는 먼저 차를 타고 돌아갔다.
“뭐 마실래?”
“아! 전 물이면 돼요.”
난 커피를 마셨고, 지유는 생수를 마셨다.
“제법 멀쩡하네.”
“안 멀쩡하면요?”
“지금쯤이면 쓰러져있을 줄 알았거든.”
내 말에 지유는 웃으며 말했다.
“저 엄청 튼튼해요.”
체구는 작아도 지구력은 좋은 모양이다.
하기야, 그렇지 않으면 야생 같은 연예계에서 살아남기 힘들었겠지.
“시사회에 와주셔서 감사해요.”
“뭘. 나야말로 초대해줘서 고마워.”
난 진심으로 축하를 건넸다.
“축하해. 드라마도 대박이고, 영화도 대박이네.”
지유는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좀 얼떨떨해요. 한국도 아니고, 미국에서까지 이렇게 인기일 줄이야. 여기 와서 인사랑 악수만 수천 번은 한 것 같아요.”
“손이 얼얼하겠네.”
“네. 아! 저 코리 덩컨이랑도 악수했는데, 혹시 기사 봤어요?”
“응.”
“팔에 매달려서 사진도 찍었어요. 팔뚝이 무슨 통나무 같던데요.”
이건 그가 주위 사람들과 자주 하는 장난. 놀이기구처럼 양쪽 팔뚝에 사람을 매달고 빙글빙글 돌기도 한다.
“…….”
그런데 왜 나한테는 하라고 안 했어?
나도 하고 싶었는데!
혹시 사람 차별하나?
지유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얼마 전에 세나 만났어요.”
“그래? 잘 지내고 있대?”
내 물음에 지유는 당황하며 물었다.
“예? 동생이랑 연락 안 해요?”
“뭐…….”
굳이 연락할 필요가 있나 싶다. 살아있는 것만 확인하면 되지 않을까?
무소식이 희소식인 법이지.
“나가서 좀 걸을까?”
“좋아요.”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조금만 걸어가자 바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가 나왔다.
혹시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 지유는 선글라스를 썼다.
햇빛이 강한 캘리포니아에서는 낮에 선글라스를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때문에 별로 눈에 띄지는 않았다.
사복을 입은 경호원들은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우리의 뒤를 따라왔다.
“역시 LA는 좋네요. 익숙하기도 하고.”
“큰아버지가 계신다고 했지?”
“네. 어렸을 때부터 방학 때마다 자주 놀러 왔어요. 제가 쌍둥이 애들 잘 돌봐줬거든요.”
지유는 자랑하듯 말했다.
“저, 애 엄청 잘 봐요.”
혹시 그래서 세나랑도 잘 놀아주는 건가?
“애들도 이번에 좋아했겠네.”
“네. 그래서 이번에 애들 학교에도 방문했어요.”
“아! 기사 봤어.”
LA의 중학교에 간 게 그것 때문이었구나. 가서 노래도 몇 곡 부르고 사진도 잔뜩 찍어주었다고 한다.
“애들이 다들 세븐 라운드 재밌게 봤다고 난리예요.”
“…….”
대체 미성년자 관람불가인 드라마를 왜 중학생들까지 보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여기저기서 출연 제의가 들어오고 있다며?”
“네. 그것 때문에 고민 중이에요. 신곡도 내야 하는데.”
가수 활동만 해도 정신없이 바쁠 텐데, 연기까지 추가되다니.
“가수와 연기자 중 뭐가 더 맞는 것 같아?”
“처음에는 가수가 본업이고 연기는 부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연기도 너무 재밌어요. 할 수만 있다면 둘 다 하고 싶어요.”
“동호 선배에게 들으니까, 미국에서 콘서트 계획 중이라며?”
“네.”
물 들어올 때 노 젓자는 생각으로 추진 중이라고 한다.
‘K-팝 페스티벌’ 같은 단체 공연이 아닌, 무려 단독 콘서트다.
“어디서 해?”
“뉴욕으로 생각 중이에요.”
“LA가 아니라?”
한국 가수들의 콘서트는 보통 LA에서 가장 많이 연다.
그 이유는 LA에 한국 교민들이 가장 많기 때문.
“어! 설마……?”
“예. 메기랑 약속했잖아요. 콘서트하면 초청하기로.”
메기가 오기 편하게 뉴욕에서 공연을 하려는 건가?
어린애랑 한 약속을 기억하고 지키려 하다니. 역시 성실한 성격이다. 어쩌면 이런 성격이니 성공한 걸지도 모르겠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바닥에는 분홍색 별과 함께 유명 배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나중에 여기에 이름 새기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요.”
예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일들이 이제는 얼마든지 일어나는 중이다. 그러니 어쩌면 정말로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에는 일정 간격으로 코스프레를 한 사람들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어주고 팁을 받는 공연자들이다.
그들 중에는 놀랍게도 세븐 라운드 진행요원 복장을 한 이들도 있었다.
코스프레까지 등장하다니!
새삼 세븐 라운드의 인기가 실감된다.
같이 거리를 걸으며 구경하는데, 뒤에서 갑자기 사람들의 외침이 들렸다.
“앗! 지유다!”
“어, 진짜! 연희를 여기서 다 보네.”
“사진 찍자!”
그 말에 우리는 당황했다.
지유는 어쩔 줄 몰라하며 나에게 물었다.
“어, 어떡해요?”
“…….”
설마 선글라스까지 꼈는데 알아볼 줄이야!
나야말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지유야 연예인이니 사진 찍히는 게 일이지만, 난 아니다.
일단 혼자라도 도망갈까?
“한수도 같이 있어!”
“……응?”
그 말에 나랑 지유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한수는 왜?
설마 허지훈 배우도 이 자리에 와있나?
고개를 돌려 보니, 사람들이 한쪽에 몰려있는 모습이 보였다.
거기에는 한수(허지훈)와 연희(지유) 코스프레를 한 공연자들이 서 있었고, 사람들은 그들을 둘러싼 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죄송한데, 조금만 비켜주시겠어요? 사진 찍어야 해서.”
“아, 네.”
난 지유와 함께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진짜 지유의 옆에 선 20대 여성은 가짜 지유의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지유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지유 팬이신가요?”
“그럼요.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이번에 앨범도 샀어요. 나중에 콘서트하면 꼭 보러 갈 거예요.”
말을 하면서도 자신과 대화하는 사람이 지유라고는 상상도 못 하는 듯했다.
“…….”
과연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가?
지유는 자신의 코스프레를 한 공연자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저, 저랑 닮았나요?”
“으음…….”
드라마에서 입고 나온 복장이랑 똑같긴 하네.
* * *
미국에서의 일정을 끝마친 지유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고, 나도 전용기에 몸을 실었다.
캘리포니아와 한국 사이에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바다인 태평양이 있다. 그리고 그 중간쯤 미국의 주 하나가 있으니, 바로 하와이다.
전용기는 태평양을 한번에 건너는 대신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에 착륙했다.
난 공항에서 대기 중인 차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차가 멈춰서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년 남성이 차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한 대표님. 이 호텔을 책임지고 있는 조니 라이먼입니다. 저희 호텔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부터 꼭 한번 모시고 싶었습니다.”
외모를 보니 폴리네시아계인 듯하다.
난 그와 악수를 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별말씀을요. 저희 호텔그룹의 은인이시지 않습니까? 계신 동안 조금의 불편함도 없이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래서 내가 블랙우드 호텔만 애용한다.
물론 공짜인 이유가 가장 크지만.
난 그의 안내에 따라 프레지덴셜룸으로 향했다.
방은 총 3개로 거실의 양면을 통해 탁 트인 바다와 해변이 내려다보였다.
금액은 1박에 약 2만 달러.
바베이도스의 블랙우드 리조트에 비하면 매우 합리적인 가격이라 할 수 있다. 어차피 공짜라 비싸도 상관없지만.
잠시 소파에 앉아 바다를 보며 쉬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오빠아!”
고개를 돌려 보니, 알로하 셔츠를 입고 똥머리를 한 여자애가 보였다.
다름 아닌 한세나.
“오빠 언제 왔어?”
“나도 방금 왔어.”
세나의 뒤에는 부모님이 서 계셨다.
“오셨습니까?”
“아들!”
공항에서부터 환대를 받았는지, 다들 목에 꽃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이렇게 다 같이 모인 이유는 며칠 동안 여기서 가족 여행을 할 계획이기 때문.
그동안 일한다고 너무 집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가족 여행을 간 게 언제였더라?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친구나 동호 선배와 놀러 다닌 적은 많아도, 가족 여행은 아주 어렸을 때를 빼고는 가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버지야 항상 공장에 계셨고, 나도 학교나 회사 다니느라 바빴으니.
아버지는 룸을 둘러보고는 감탄했다.
“여기 엄청 비싸지 않니?”
“할인 많이 받았어요.”
사실은 공짜라 할인받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어머니는 좋아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들 덕분에 살면서 하와이를 다 와보네. 여기 온다고 친구들한테 엄청 자랑했어.”
“잘하셨습니다.”
세상에는 하와이보다 좋은 여행지도 많지만, 부모님 나이대에는 하와이가 최고겠지.
어머니의 자랑을 들은 친구들은 아들 불러다 앉혀놓고 ‘엄마 친구 아들은 효도한다고 부모님 모시고 하와이에 여행 갔다더라’라고 말하겠지.
그동안 내가 ‘엄친아’들에게 당했던 거 생각하면, 이번에는 그래도 된다.
부모님은 싱글벙글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신나 하는 건 역시나 한세나.
내 여동생은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말했다.
“하와이 온다고 해서 비키니도 여러 개 샀어. 기대해, 오빠.”
“…….”
뭘 기대하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전혀 기대가 안 된다.
그거 반품 안 되나?
* * *
하와이는 세계적인 관광지답게 아름다운 해변뿐 아니라, 놀거리가 많다.
호텔 측에 얘기해 각종 투어를 신청해 놓았고, 통역까지 고용했다. 부모님과 세나는 무슨 목장이랑 화산섬 헬기 투어를 갔다.
하지만 나는 호텔에 그냥 남아있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이미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더욱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다.
난 선베드에 누워 칵테일을 마시며 눈을 감았다.
그동안 열심히 벌었으니, 쉴 땐 좀 쉬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