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화. 박스오피스 (6)
취재를 끝마친 트리시는 먼저 뉴욕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무리 출장이라고 해도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는 없으니.
난 공항까지 그녀를 배웅 나갔다.
“미루는요?”
“전 아직 할 일이 남아서요.”
온 김에 아이스스톰과 프리즈너도 한 번씩 들러야 하고.
“뉴욕에는 또 언제 와요?”
“일단 한국 갔다가요.”
“그냥 뉴욕으로 이사할 생각은 없어요?”
“글쎄요.”
데이비드도 비슷한 얘기를 하긴 했다.
하지만 막상 뉴욕으로 이사한다고 해도 어차피 실리콘밸리와 LA를 왔다 갔다 해야 한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이곳저곳 떠돌아다녀야 하는 운명인 모양이다.
트리시는 나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럼 다음에 봐요.”
“조심해서 가요.”
* * *
트리시가 떠나자 또다시 혼자가 됐다.
난 홀로 고독을 씹으며 아이스스톰으로 향했다.
인수 전에 한번 왔었지만, 인수 후 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
일전에 만났던 조나던 호퍼 CEO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생각해 보니 이제는 CEO가 아니구나.
선우가 양사 CEO를 맡으며 그의 직책은 COO로 낮아졌다. 하지만 그의 측근을 CFO로 임명함으로써 재정에 대한 자율권을 줬다.
난 회사를 둘러보며 그와 대화를 나눴다.
“이번에 블록밸리에서 출시한 게임도 엄청난 흥행이군요. 다들 감탄했습니다.”
“선우의 말로는 단순한 게임이라고 하던데요. 만들기 별로 어렵지 않았다고.”
“단순한 게임일수록 제작자의 실력이 빛을 발하는 법이죠. 가위바위보도 어떻게 진행하느냐에 따라 재미가 크게 갈리니까요.”
그냥 립서비스로 하는 말은 아니고, 진심으로 감탄하는 듯했다.
“회사 분위기는 어떤가요?”
“별문제 없습니다. 오히려 직원들은 예전보다 더욱 의욕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맥스비전을 떠나 SW게임즈의 품에 안겼지만, 아이스스톰은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선우가 아이스스톰을 인수한 직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일단 오버클락2의 출시를 3개월 미룬 것.
이대로 내면 망할 거라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그사이 각 히어로의 밸런스 패칭과 스토리 모드 개발에 나섰다.
사실 선우의 판단은 정확하다.
실제로 1회차 때 오버클락2는 준비 없이 출시했다가 추락하니까.
난 그에게 말했다.
“외부결제에 대해 동의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이스스톰은 페니 결제를 도입하고 외부결제를 허용했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자마자 바로 아이스스톰의 모든 게임들은 NOS와 플레이마켓에서 퇴출당했다.
PC가 주력이긴 해도 아이스스톰이 모바일 게임을 안 만드는 것은 아니다.
전체 매출에서 모바일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20퍼센트.
다른 게임사에 비하면 낮은 편이긴 하지만, 매출이 매출이다 보니 금액 자체는 2억 달러가 넘는다.
양대 마켓에서 퇴출당한 만큼 당연히 모바일 매출은 폭락했다.
이렇게 될 걸 알면서 동의해준 이유는…….
“수수료에 대해 불만이 크지만, 그동안 누구도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가 엔플과 구블이니까요. 저 역시 나서주기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레전드게임즈가 인앱결제 수수료 문제로 엔플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을 때, 고마움과 부끄러움을 함께 느꼈습니다. 아마 그건 모두가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는 농담처럼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이제는 주주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농담처럼 말하긴 했지만, 사실 이게 핵심이다.
애초에 레전드게임즈와 블록밸리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비상장회사이기 때문이지.
상장기업이라면 주가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매출이 떨어지면 주가가 떨어지기 마련.
괜히 결산 전에 신작 게임을 출시하거나, 대작 게임과 망작 게임을 같은 해에 내놓아 손실을 감추는 게 아니다.
하지만 아이스스톰은 SW게임즈에 인수되며 비상장회사로 전환됐다.
따라서 더 이상 주가에 일희일비하거나 주주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니 이런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초대형 게임사라 할 수 있는 아이스스톰마저 외부결제 도입으로 퇴출되자, 게임업계 전체가 또다시 술렁거렸다.
아마 엔플과 구블 역시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매출 타격을 받는 것은 이쪽이다.
아이스스톰의 경우 하트스톤 모바일 버전이 퇴출된 것은 물론, 앞으로 모바일로 개발할 IP들이 전부 양대 마켓에 입점하지 못하게 생겼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적당한 시점에 결판을 낼 테니까요.”
내 말에 그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 * *
난 이어서 프리즈너도 방문했다.
“어서 오십시오.”
“잘 지내셨어요?”
“물론입니다.”
난 사이먼 라이너스 대표와 악수를 나눴다.
과거 프리즈너는 그저 그런 병맛 영화를 만들던 B급 영화사.
그러나 이제는 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거대 영화사로 성장했다.
그 이유는 좀비네이도의 성공 덕분……은 아니고, 자회사인 CG 전문 제작 업체 알카트라즈 덕분.
좀비네이도가 컬트적인 인기를 끌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B급 영화 중에서 대박을 쳤다. A급 영화들의 수익과는 비교하기 힘들다.
하지만 알카트라즈는 다르다.
현재 영상업계 CG 산업을 선도해나가는 중이다.
엄밀히 말하면 써릴 스크린 자체는 로열티만 내면 누구나 쓸 수 있다.
LED 스크린을 붙여 배경을 만들고, 써릴 엔진으로 실시간 렌더링하면 되니까.
그러나 이를 가장 다루는 특수 프로그램과 노하우는 오직 알카트라즈만 지니고 있다. 때문에 전세계에서 일감이 밀려드는 중이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눴다.
“LA에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사실은…….”
내 얘기를 들은 그는 깜짝 놀랐다.
“설마 다리안 헤럴슨이 은인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대표님일 줄이야. 대표님은 어딜 가든 특별한 일을 겪네요.”
“우연이죠.”
어째서인지 안 믿는 것 같은 눈치다.
“그러고 보니 산체스 감독님은 어디 가셨나요?”
“촬영 때문에 하와이에 가 있습니다.”
“하와이요?”
“예. 이번에는 좀비쓰나미를 찍을 계획이라서요.”
“…….”
좀비들이 고생이 많다.
* * *
난 LA에서 열린 한 영화의 시사회에 참석했다.
취재진들이 몰린 가운데, 레드카펫에서는 유명 배우들과 제작자들이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했다.
혼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느낌상으로는 살짝 얹은 것 같은데 무게 때문인지 한쪽 어깨가 주저앉았다.
“이 친구, 여기서 또 보는군.”
고개를 돌려 보니 아는 얼굴이 보였다.
“어! 덩컨 씨.”
그는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냥 코리라고 불러줘.”
그의 옆에는 지난번 다리안의 저택에서 봤던 미남미녀도 있었다. 바로 에덴 크레이그와 제인 실버스틴이다.
“또 보네요.”
“반가워요.”
난 그들과 악수를 나눴다.
“다 같이 온 거예요?”
내 물음에 코리 덩컨이 대답했다.
“페이지 감독님 영화잖아. 빨리 보고 싶어서.”
“아하! 올리버 페이지 감독님 팬인가 보네요.”
“물론이지.”
그러자 옆에 있던 에덴이 깐죽거리듯 말했다.
“에이, 아니잖아요. 오늘 시사회에 지유 배우가 참석한다는 얘기를 듣고, 혼자 오기 심심하다고 저희까지 끌고 온 거예요.”
“정말요?”
“예.”
코리 덩컨은 에덴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 친구 농담도 참.”
“어억! 내 어깨!”
연기인지 진짜인지 에덴은 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난 혀를 내둘렀다.
“팬이라고 린스타에 올린 게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네요.”
코리 덩컨이 지유 얼굴을 보기 위해 시사회에 오다니!
할리우드에서는 매주 수많은 영화가 쏟아진다.
그러나 그중 대중의 이목을 끌고, 상영관을 확보할 수 있는 영화는 극소수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대중과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거장이라 불리는 올리버 페이지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최근 세븐 라운드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지유가 조연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지유에게 있어서 영화 촬영은 세븐 라운드보다 먼저였지만, 편집과 스케줄 등의 문제로 인해 개봉이 미뤄지는 바람에 순서가 뒤바뀌었다.
“그런데 넌 여기 어쩐 일이야?”
“아! 저도 이 영화에 관심이 좀 있어서요.”
“컨티뉴 캐피탈이 영화 쪽에도 투자하나?”
제인이 말했다.
“무슨 말이에요? 컨티뉴 캐피탈은 이제 영화계의 큰손인데.”
에덴은 어깨를 주무르며 맞장구를 쳤다.
“써릴 스크린을 제작한 레전드게임즈와 CG 제작업체인 프리즈너 모두 컨티뉴 캐피탈 산하에 있잖아요.”
“오! 그렇군.”
제인 실버스틴은 나를 보며 농담처럼 말했다.
“요즘 영화 제작에는 써릴 스크린이 필수라고 하니, 미리 잘 보여놔야겠는데요.”
컨티뉴 캐피탈이 이 정도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코리 덩컨이 소리치듯 말했다.
“어! 지유다.”
고개를 돌려 보니, 레드카펫 위에는 원피스를 입은 작은 체구의 여성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 * *
올리버 페이지 감독의 영화 더 임페커블(The Impeccable).
주인공은 아내와 사별한 뒤, 혼자 딸을 키우며 사는 중년 남성.
그런데 딸이 파티에 놀러 갔다가 술과 마약에 취한 채 인사불성이 된 채 깨어나 보니, 그 옆에는 파티를 주최한 남자가 살해당한 채 쓰러져있었다.
이에 딸은 살인범으로 체포되지만, 그녀는 결백을 주장한다.
아버지는 딸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그날 파티에 있었던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그러나 모든 증거와 정황은 딸이 살해했다는 것을 가리켰다.
영화는 점점 진실게임 양상으로 흐르며, 부녀간의 미묘한 감정과 긴장 관계를 그려냈다.
여기서 지유가 맡은 역할은 딸의 친구.
2시간의 러닝타임에서 지유가 총 나오는 시간은 20분 남짓. 분량 자체는 그리 많지 않지만, 이야기의 흐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지유의 연기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영어 발음 역시 깔끔했다.
왜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한국 캐릭터들이 한국말 하는 걸 보면 미국인들은 전혀 이상하게 느끼지 못해도 한국인들이 들으면 이상하게 느끼기 마련.
예를 들어 ‘난햄보칼수가엄써’, ‘요태까지 그래와꼬 아패로도 개속’, ‘평신미친노마’, ‘정주나씨는어때여’ 등등.
이는 반대 역시 마찬가지.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멋지게 영어를 하는 캐릭터를 막상 미국인이 보면 왠지 어색하다.
하지만 지유는 원래 영어를 잘하는 만큼 발음 역시 별문제가 없었다.
* * *
[더 임페커블, 올리버 페이지 감독의 영화의 완성!]
[탄탄한 서사와 훌륭한 연기가 결합 된 최고의 작품!]
[리버티와 함께 올해 아카데미상 유력 후보!]
시사회가 끝나자 기사가 쏟아졌고, 올리버 페이지 감독은 지유의 연기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 그녀의 연기를 봤을 때부터 이 역할에 딱이라고 생각했다. 세븐 라운드로 전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돼서 내가 더 기쁘다.”
배급사에서도 지유의 출연을 내세워 홍보했다.
더 임페커블은 슬슬 관객 수가 떨어지고 있는 리버티를 제치고 미국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섰고, 개봉 첫 주 만에 제작비를 전부 회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