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화. 박스오피스 (4)
로저는 다리안에게 물었다.
“그런데 오늘 뭘 보자고 했지?”
“세븐 라운드.”
“아, 맞다. 한국 드라마는 본 적이 없는데. 재밌으려나?”
에덴 크레이그가 말했다.
“전에 만들어진 ‘방과 후 생존활동’ 봤었어요. 끝까지 다 보지는 못했는데, 신선했어요.”
제인 실버스틴은 기대된다는 표정이었다.
“전 보고 싶었어요. 요즘 엄청 인기잖아요. 친구들도 다들 재밌다고 추천하더라구요.”
다리안이 말했다.
“이제 한 명만 더 오면 되는데. 이 친구는 또 늦는군.”
마지막 한 명은 누굴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한 남자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헤이, 다리안. 저 왔어요.”
사람이 걸어오는데 무슨 바위가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를 본 순간 난 나도 모르게 탄성을 냈다.
“와아!”
이제까지 덩치 큰 사람은 많이 봤지만, 이건 상상 그 이상이다.
키 2미터 8센티에 몸무게 130킬로그램. 온몸이 터져나갈 것 같은 근육으로 가득했다. 몸에 딱 달라붙은 짐웨어를 입고 있어서 갈라진 근육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났다.
진짜로 팔뚝이 내 허벅지보다 굵다.
정말로 나랑 같은 인간이 맞는 건지 의심이 될 정도다.
흉악한 몸과는 달리 얼굴은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 웃는 표정이 왠지 능글맞다.
그의 이름은 코리 덩컨.
난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팬입니다.”
“오! 어떤 영화를 재밌게 봤지?”
“아니요. WWE에서 활약하실 때부터 팬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우연히 케이블TV에서 본 WWE 경기 장면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때는 그게 100퍼센트 진짜인 줄 알았다.
나중에 철저한 각본 아래 이뤄진 연출이라는 것을 알고 실망……하기는커녕 더욱 열광했다.
주작(?)이긴 해도 재밌으면 됐지.
내 말에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정말이야?”
현재는 영화배우지만, 그 이전에는 프로레슬러였다.
할리우드에 프로레슬러 출신 배우는 꽤 있는 편이다.
애초에 프로레슬러는 종합 엔터테인먼트. 웬만한 쇼맨십과 연기력은 이미 갖추고 있다.
대부분 거구에 근육질이라는 신체적인 조건과 단조로운 연기 패턴으로 인해 조연이나 단역에 머무르고 있지만.
하지만 코리 덩컨은 예외.
그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프로레슬러 출신 배우 중에서 가장 크게 성공했다. 작년 할리우드 출연료 순위 3위를 찍었던 것 같은데.
혹시라도 만나게 되면 기념으로 가슴에 챱(Chop) 한 번 날려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저 손을 보니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참았다.
내 목숨은 소중하니까.
난 예전부터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프로레슬링을 보면서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되나요?”
“얼마든지.”
“철제 의자로 맞는 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 무슨 트릭이 있나요?”
“트릭?”
“예. 보통 사람들은 그런 걸로 한 대만 맞아도 아파 쓰러지잖아요. 그런데 프로레슬러는 멀쩡한 게 신기해서요.”
프로레슬링을 보다 보면 선수들이 링 밖으로 나가 접이식 철제 의자를 집어 들고 상대를 두드려 패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장면.
일반 격투기에서는 당연히 반칙이지만, 프로레슬링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오죽하면 체어샷(Chair Shot)이라고 해서 아예 기술로 따로 분류되어 있다.
그러자 코리 덩컨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다니. 그거 얼마나 아픈데.”
“예?”
“당연하잖아. 우리도 인간인데, 맞으면 아프지. 다른 것도 아니고 철제 의자라니까. 쇠파이프나 다름없는 걸로 얻어맞는데, 안 아플 리가 있어? 한 대만 맞아도 버팔로한테 들이받혀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어. 그냥 이를 악물고 버틸 뿐이지.”
트리시가 슬쩍 물었다.
“하지만 맞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벌떡 일어나 싸우잖아요.”
“그거야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거지. 사실은 졸라 아파. 멍도 들고 가끔 뼈에 금도 가고. 한번은 너무 아파서 집에 돌아가서 엉엉 운 적도 있어.”
“아…….”
난 또 철제 의자가 모형이거나, 무슨 비결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냥 진짜로 맞는 거였다니.
역시 프로레슬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다리안에게서 내 소개를 전해 들은 코리 덩컨은 흥미를 나타냈다.
“어! 컨티뉴 캐피탈에서 일한다고?”
“예.”
그는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흠, 내가 거기랑 좀 안 좋은 기억이 있는데.”
다리안은 웃으며 말했다.
“이 친구가 토머스 모터스의 초기 투자자였거든.”
“아…….”
하필 토머스 모터스를?
“페이스노트에 투자하기도 했고.”
“어…….”
하필 페이스노트를?
코리 덩컨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티슬라에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봤지.”
“…….”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대표에게 전해줘. 만나면 저먼 수플렉스를 한 방 먹여주겠다고.”
저먼 수플렉스(German Suplex)란 뒤에서 양손으로 허리를 잡은 다음 뒤로 넘겨 바닥에 내리꽂는 프로레슬링 기술.
모래밭에서 시전하면 머리가 흙 속에 파묻힌 채 거꾸로 꽂히게 된다.
아스팔트나 대리석 위에서 시전하면……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니, 툼스톤 파일 드라이버가 좋겠군.
툼스톤 파일 드라이버(Tombstone Piledriver)란, 상대를 거꾸로 끌어안은 채 그대로 주저앉아 머리를 바닥에 내다 꽂는 기술.
워낙 위험성이 크다 보니 현재는 WWE에서도 금지된 기술이다.
“…….”
아니, 왜 이렇게 사람을 거꾸로 바닥에 꽂는 걸 좋아해?
생각해보니, 프로레슬러 시절 매번 그런 피니시 무브(Finish Move)를 했다. 파종하듯 사람을 링에 심는다고 해서 별명이 플랜터(Planter)였지.
난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아무래도 대표라는 사실은 숨기는 게 좋을 것 같다.
내 표정을 본 코리 덩컨은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농담이야.”
“하하…… 역시.”
그는 친근하게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그래도 꼭 전해줘. 알았지?”
무슨 아나콘다가 몸을 휘감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난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록허트 대표님께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뭐, 내가 당하는 거만 아니면 되지.
다리안은 손뼉을 쳤다.
“자, 그럼 다 모인 것 같으니 시작해 볼까?”
* * *
다리안의 저택 지하에는 20석 규모의 개인 영화관이 있다.
우리는 각자 팝콘과 음료수를 들고 다 같이 앉았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할리우드 무비스타들과 함께 하는 세븐 라운드 감상회가 시작됐다.
편당 길이는 그리 길지 않은 편이라 총 상영시간은 407분.
이 정도면 영화 세 편 분량이다.
오늘 다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볼 수 있는 데까지 볼 생각이다.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잡담을 나누는 분위기였으나, 어느 순간부터 다들 완전히 집중해서 보기 시작했다.
1라운드 게임인 서바이벌 게임이 끝나자, 요원들은 게임 도중 사망 처리 된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그 자리에서 전부 쏴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