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화. 박스오피스 (3)
탁동식 감독은 감격하며 말했다.
[지금도 잘 믿기지가 않습니다. 한국에서만 흥행해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설마 이 정도로 세계적으로 흥행할 줄이야.]
“이제부터 시작이죠. 언론의 관심도 뜨겁던데요.”
[예. 해외 언론에서도 인터뷰 요청이 오고 있습니다.]
“그중 WST도 있지 않았나요?”
[네.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한글로 된 서면 인터뷰가 왔더군요.]
“아! 그거 제가 번역한 겁니다.”
[예? 정말입니까?]
당연하게도 트리시가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관계로 내가 옆에서 도와주었다.
“기자랑 친분이 좀 있어서요.”
[그, 그렇군요.]
“인터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가장 먼저 인터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난 전화를 끊었다.
트리시는 재빨리 나에게 물었다.
“탁 감독님이 뭐래요? 인터뷰하겠대요?”
통화하는 내내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지만, 한국어로 통화했으니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 리가.
“한다고 하네요.”
“오예!”
현재 세븐 라운드의 인기를 보면, 인터뷰는 연예면이 아닌 사회면에 실려야 하지 않을까?
트리시는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미국에서 비영어권 드라마가 이 정도로 인기를 끈 건 처음 있는 일일걸요.”
미국은 드라마의 제국.
채널도 많고 제작되는 드라마도 많은 데다가 같은 영어권인 영국, 호주, 캐나다 등에서도 쏟아져 들어온다.
이거 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만큼 미국인들은 비영어권 드라마들은 잘 보지 않는 편이다.
그나마 본다면 유럽 드라마 정도?
그런데 뜬금없이 한국 드라마가 말도 안 되는 흥행기록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도 한국 드라마가 이슈가 되거나 인기를 끈 적은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반짝 인기나 일부 마니아층의 지지를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미국 대중문화의 메인스트림에 올라탄 모습이다.
“세븐 라운드가 그렇게 재밌어요?”
“엄청 재밌죠.”
세븐 라운드는 그야말로 문화 현상이라 불릴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외국에서 한국 드라마의 인지도는 세븐 라운드 전과 후로 나뉠 정도다.
여기에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원래 드라마는 대체로 자국에서 생산돼 자국에서 소비되는 형태였다. 외국 수출은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수익이었다.
그러나 넷플레이나 다즈니 플러스 같은 OTT의 등장은 이런 흐름을 바꿔놓았다. 잘 만든 드라마를 전세계 시청자들이 동시에 소비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경제력 상승과 에이튜브와 톡틱 등 동영상 플랫폼을 통해 K-팝 등 한국 문화를 접할 길이 많아지며, 관심이 커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유를 떠나 세븐 라운드의 글로벌 흥행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재미.
아예 안 본 사람은 있어도, 1화만 본 사람은 없다.
보기 시작했다면 끝까지 달릴 수밖에 없을 정도도 강력한 흡인력이 있다.
“미루는 봤어요?”
“글쎄요.”
트리시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봤으면 본 거고, 안 봤으면 안 본 거지, ‘글쎄요’는 뭐예요?”
“음…….”
1회차 때 본 거라, 이걸 봤다고 할지 안 봤다고 할지 나도 좀 헷갈린다.
왜냐하면 1회차 때와는 달라진 점이 몇 가지 있기 때문.
첫째는 써릴 스크린을 활용해서 찍었다는 것. 덕분에 제작 기간은 크게 단축됐고, CG 퀄리티는 크게 올라갔다.
둘째는 배우가 바뀌었다. 주연 박한수 역을 맡은 허지훈과 다른 조연들은 대부분은 그대로지만, 주인공 다음으로 비중이 큰 연희 캐릭터는 원래 주보경이라는 신인배우가 맡았으나 이번에는 지유에게로 넘어갔다.
셋째는 원래 넷플레이의 투자를 받은 넷플레이 오리지널 작품이었으나, 컨티뉴 캐피탈의 투자를 받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바람에 그냥 계약 작품이 됐다는 것.
이 외에도 찾아보면 많은 부분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렇게 달라진 가장 큰 원인은 당연하게도 나.
“그럼 같이 볼까요?”
내 물음에 트리시는 반색했다.
“네. 둘이서요?”
“아니요. 다 같이.”
“네? 다 같이요? 또 누구 있어요?”
“일단 한번 물어볼게요.”
어쨌거나 이전과는 많은 것이 달라진 만큼, 난 이를 직접 확인도 하고, 드라마 홍보도 할 겸 다리안에게 연락했다.
[같이 세븐 라운드를 보자고?]
“예. 컨티뉴 캐피탈이 투자한 드라마서요.”
[안 그래도 그 드라마 요즘 엄청 이슈던데. 한번 보고 싶었어.]
“시간 괜찮아요?”
그는 흔쾌히 말했다.
[마침 내일 시간이 비어. 다음 주부터는 해외 홍보차 벤자민과 함께 돌아다녀야 하거든.]
“잘됐네요.”
[친구들을 몇 명 불러도 될까? 다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어, 그럼 더 좋죠.”
사람이 많으면 홍보도 더 되겠지?
* * *
드라마는 다리안의 집에 모여서 보기로 했다.
난 트리시와 함께 그의 저택을 다시 방문했다.
“어서 와.”
“디아민디 감독님은요?”
“안타깝게도 오늘 스케줄이 있어서 못 온대.”
“그래요?”
“본인도 아쉬워하더라. 혼자서라도 꼭 챙겨보겠대. 대신 다른 사람들 많이 불렀어.”
마치 홈파티처럼 거실에는 음료와 핑거 푸드들이 준비되어 있고, 한쪽에는 팝콘 기계랑 콜라 디스펜서까지 가져다 놓았다.
이어서 그가 부른 친구들이 한두 명씩 도착했다.
“어이, 나 왔어.”
처음 온 사람은 로저 스미스.
통통한 몸과 유쾌한 성격을 지닌 백인 남성으로 할리우드의 유명 코미디 배우다.
난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미루라고 합니다.”
“반가워. 어디서 왔나?”
“한국에서 왔습니다.”
“오! 한국. 나 예전에 한국 예능에 출연한 적 있었는데.”
“그 프로그램 봤습니다.”
“어, 진짜?”
“네. 출연하신 영화들도 재밌게 보고 있어요.”
주로 웃긴 역할로 출연하지만, 정극 연기 역시 뛰어나다.
이어서 줄줄이 온 사람들 역시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만한 유명 배우들이었다.
트리시는 놀라 어쩔 줄 몰랐다.
“어머! 에덴 크레이그예요. 너무 잘생겼네요.”
그는 하이틴 무비스타.
나이는 이제 스물넷인가?
178센티 정도의 키에 작은 얼굴, 갈색 곱슬머리. 우수에 젖은 듯한 터키색 눈동자.
남자인 내가 봐도 잘생겼다.
이러니 가는 곳마다 여자 팬들이 난리가 나지.
현재 애인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난 뒤따라 들어온 사람을 보고 놀라며 말했다.
“어! 제인 실버스틴이네요.”
나이는 스물둘.
170센티 정도의 키, 새하얀 피부에 금발. 쭉 뻗은 팔다리와 볼륨 넘치는 몸매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몽환적인 목소리와 아름답고 매력적인 얼굴, 그리고 환상적인 비율.
실제로 보니 스크린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미인이다.
트리시는 나에게 물었다.
“누군데 이름까지 알아요?”
“어! 설마 몰라요?”
“네.”
“아니, 어떻게 제인 실버스틴을 모를 수가…… 아!”
생각해보니, 지금은 모를 수 있겠구나.
몇 년 후 최고의 스타가 되지만, 현재는 라이징 스타. 아직 주연을 맡은 작품도 없고, 아마 조연이나 단역 정도로 스크린이 얼굴을 내밀고 있을 것이다.
트리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안경 너머로 나를 보았다.
“흐음, 어지간히 팬인 모양이네요.”
“……순수한 마음으로 응원 중이에요.”
이어서 들어오는 사람들도 얼굴을 보면 모두가 알 만한 유명 배우와 감독들.
트리시는 열심히 명함을 돌리며 인사했다.
“WST의 트리시 오코너 기자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놀랍게도 다들 트리시에 대해 알고 있었다.
“쓰신 기사 잘 봤어요.”
“대체 어떻게 그렇게 많은 특종을 잡을 수 있었던 거예요?”
“책도 재밌게 읽었어요.”
“그거 영화화될 거라는 얘기도 있던데.”
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트리시, 꽤 유명인이었네요.”
하기야 그동안 수많은 특종을 낸 데다가 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으니.
아마 기자 중에는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헤헷.”
역시 칭찬에 약하다니까.
어느 정도 사람이 모이자, 다리안은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해주었다.
“이쪽은 내 은인이나 다름없는 친구. 현재 컨티뉴 캐피탈에서 일하고 있어.”
컨티뉴 캐피탈 CEO라고 하면 괜한 부담가질까 봐 그냥 직원으로 소개해달라고 했다.
다들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 소개를 들은 제인 실버스틴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컨티뉴 캐피탈에서 일한다구요? 정말요?”
다른 사람들 역시 큰 관심을 나타냈다.
“컨티뉴 캐피탈이라니.”
“그 사모펀드 말하는 거지?”
당연하게도 컨티뉴 캐피탈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로저는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그럼 혹시 록허트 대표도 봤어?”
“네. 출근할 때마다요.”
내가 출근을 잘 안 해서 그렇지, 데이비드는 열심히 출근한다.
“안 그래도 나 요즘 어디에 투자할지 고민 중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할리우드 배우들이 벌어들이는 돈은 상상을 초월한다.
출연료만 1천만 달러를 넘는 경우가 수두룩하고.
보통 돈 잘 버는 연예인들을 ‘걸어 다니는 중소기업’이라고 표현하는데, 할리우드 톱스타들의 수익은 웬만한 대기업과 비교를 해야 하는 수준이다.
버는 돈이 큰 만큼, 당연히 재테크에 관심이 클 수밖에.
에덴 크레이그가 물었다.
“혹시 컨티뉴 캐피탈은 펀드 출시 안 하나요?”
이건 아마 직원들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아닐까 싶다.
컨티뉴 캐피탈은 이제까지 모든 투자에서 성공을 거뒀고, 매년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다.
만약 펀드를 열어 자금을 모집했다면, 모두가 돈을 싸서 짊어지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 외부 투자는 받지 않습니다.”
원래 사모펀드는 펀드를 출시해 자금을 모집하거나, 아예 ETF를 출시해 증시에 상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컨티뉴 캐피탈은 완벽한 패밀리 오피스.
내 돈 굴리기도 바쁘다.
“아쉽네요.”
“나중에라도 펀드를 출시하면 꼭 말씀해주세요.”
제인 실버스틴은 나에게 연락처를 물어보았다.
“나중에 궁금한 게 있으면 연락해도 될까요?”
헐리우드 스타가 먼저 내 연락처를 물어보다니!
이게 컨티뉴 캐피탈의 위엄인가?
“크흠.”
연락처를 교환하는데 트리시가 옆에서 계속 헛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오늘 목이 안 좋은 모양이다.
“물론이죠.”
그녀를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 역시 일제히 나에게 연락처를 물어보았다.
트리시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
“좋겠네요. 미녀 여배우 연락처도 얻고.”
“트리시도 에덴 크레이그랑 연락처 교환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그녀는 살짝 당황했다.
“저, 저야 일 때문이구요.”
“일이요?”
“네. 지금 준비 중인 영화에서 기자 역할이라서 궁금한 게 많대요.”
“…….”
주위에 기자가 한둘이 아닐 텐데, 굳이?
혹시 저놈에게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닐까?
뭐, 그건 그렇고…….
“봤으면 알겠지만, 저도 일 때문입니다. 투자 상담.”
“칫!”
트리시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미루를 따라오길 잘했네요. 유명 배우들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게 될 줄이야.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에요.”
“사실 저도 그래요.”
스크린에서나 보던 배우들이 눈앞에서 같이 웃고 떠들고 있다니.
빅테크 기업들 CEO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신기한 경험이다.
“그러고 보니, 이게 영화라면 갑자기 살인사건 같은 게 일어나지 않을까요?”
이게 뭔 뜬금없는 소리야?
“설마 추리 영화 마니아예요?”
트리시는 웃으며 말했다.
“네. 어렸을 때는 탐정이 꿈이었어요.”
“성공했으면 지금쯤 ‘명탐정 트리시’가 됐겠네요.”
“그래도 지금 기자가 더 마음에 들어요. 덕분에 미루도 만났고,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난 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탐정이나 기자나 진실을 파헤치는 직업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한 것 같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