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화. 기공식 (3)
난 사라와 함께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왠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네요.”
“그러게요.”
이게 몇 달 만이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사라는 공주가 아닌, 그저 왕족의 핏줄을 이은 일반인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라시드가 왕세자가 된 지금은 다르다.
그녀의 직책은 사우디 PIF 해외투자본부장이자 러시펀드의 대표.
또한 왕세자를 보좌하는 최측근이기도 하다.
사우디 여성 중에서는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고, 남자까지 다 합쳐도 사우디 권력서열 10위 안에 들 것이다.
쿠데타라는 게 단지 자리만 뺏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 다른 왕족들의 충성을 받아내고, 군대와 돈줄을 확실하게 장악해야 한다.
나라를 지배하는 것은 무력과 돈이니.
때문에 라시드 왕세자는 사우디 국고를 틀어쥐었고, 다른 왕족들을 리치칼톤 호텔에 감금하고 재산 헌납을 강요했다.
그렇게 뜯어낸 자산을 국고로 귀속시키고, 왕가의 자산을 정리하는 일을 맡은 사람이 바로 사라다.
아마 그동안 나와는 비교도 안 되게 바빴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전보다 살짝 야윈 모습이었다.
“사우디에 있다가 온 거예요?”
“예.”
“왕세자님은 어떻게 지내세요?”
“잘 지내고 있어요. 미루 씨 보고 왕궁에 한번 놀러 오라고 하던데요.”
“전 무슬림이 아닌데 괜찮나요?”
“그럼요.”
리야드는 원래 무슬림이 아니면 비자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라시드가 왕세자가 된 이후 리야드를 관광도시로 만들기 위해 각종 규제를 풀었다. 비무슬림 입국은 물론이고, 여성 관광객에 대한 복장 규정도 완화했다.
나름 획기적인 조치라 할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라……. 진짜 한번 놀러 가 봐야겠다.
“왕세자님께서 러시펀드 수익률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계세요. 지난번 보고를 받고는 깜짝 놀라시던데요.”
러시펀드의 분기별 수익률은 평균 10퍼센트.
1년으로 치면 40퍼센트를 넘는다.
웬만한 헤지펀드도 엄두를 내지 못할 엄청난 수익을, 국부펀드가 투자한 펀드가 낸 것이다.
투자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안정성을 중시하는 국부펀드는 애초에 이런 방식의 투자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게 가능한 것은 역시나 사우디이기 때문.
국부펀드가 왕가의 자산이나 다름없으니, 날려먹어도 된다는 각오로 투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날려먹었다면 책임은 피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뭐, 안 날려 먹으면 된 거지.
1회차 때, PIF는 송 가즈키 회장의 소프트박스와 손잡고 인사이트 펀드에 투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컨티뉴 캐피탈과 손잡고 러시펀드를 만들었다.
총 투자금은 1천억 달러.
지분은 PIF가 절반, 컨티뉴 캐피탈이 절반이다. 투자금은 전부 PIF의 주머니에서 나오고, 컨티뉴 캐피탈은 빌리는 거지만.
“이번 공장 건설에 러시펀드가 2억 달러를 투자한다면서요?”
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합작사 공장 설립에 투자하는 금액은 3억 6천만 달러.
러시펀드가 2억 달러를 투자하고, 나머지는 GM과 화안에너지가 나눠서 부담한다.
“하버콘 주지사가 꽤 의욕적인 것 같던데요.”
“맞아요.”
러시펀드는 몇 차례 유상증자를 통해 넥스트로젠을 완전히 인수했다.
여러 후보지 중 미시간주를 택한 건 수소 인프라 구축에 대한 확답을 받았기 때문. 이번 기회에 미시간주는 수소에너지의 거점으로 거듭나겠다는 계획이다.
“보내주신 리포트는 확인했어요. 엠비디아 주식을 매수하라구요?”
“예.”
“그래픽카드 수요는 많이 줄지 않았나요?”
그동안 그래픽카드 수요를 견인한 건 바로 암호화폐 채굴 열풍.
몇 년 동안 그래픽카드가 출시와 동시에 채굴장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정작 게이머들은 게임에 필요한 그래픽카드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그런데 페더 사태 이후 암호화폐 가치가 폭락하며, 채굴 붐이 사그라들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큰 이유가 있는데, 바로 암호화폐 시총 2위인 엘더리움의 채굴 방식이 작업증명(PoW) 방식에서 지분증명(PoS) 방식으로 변경된 것이다.
때문에 채굴 수요는 더욱 감소했고, 이는 그래픽카드 판매량 감소로 이어지며 엠비디아 주가는 50퍼센트 넘게 폭락했다.
“잘된 거죠. 덕분에 싸게 살 수 있으니까요.”
스노우크래시로 인해 조만간 그래픽카드 수요는 다시 폭증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 콘솔도 새로 출시하고, 거대 게임사도 인수했던데요.”
“예. 게임은 메타버스의 가장 중요한 콘텐츠니까요.”
아무리 인터넷 세상을 연결해 메타버스를 구축하면 뭐하나? 그 안에서 할 게 있어야지.
영화나 음악 등은 소비자가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것에 비해 게임은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한국 게임사들에 대한 투자는 어떤가요?”
“하지 않는 편이 좋아요.”
여러 차례 말했지만, K-게임사들의 주된 수익원은 모바일과 과금.
단지 감정적으로 좋다 싫다를 떠나 이러한 비즈니스 모델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랜덤박스와 소액과금은 이미 세계적으로 규제가 강화되는 추세고, 일부 국가에서는 아예 서비스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다.
그래서 K-게임사들 역시 최근에는 배틀패스를 도입하거나, 콘솔 게임 제작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중.
애초에 모바일 게임 외에는 개발할 만한 노하우도 인력도 없을 테니까.
“유성전자는 얼마나 더 오를 것 같나요?”
현재 러시펀드가 가장 많은 금액을 투자한 종목은 뭘까?
바로 유성전자다.
러시펀드는 현재까지 무려 유성전자 지분 9.2퍼센트를 매입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매입하면 국민연금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설 수도 있다.
참고로 둘째는 블랙우드 인터내셔널, 그리고 셋째는 넥스트로젠이다.
코스피가 오르내리고, 다른 종목들이 휘청거릴 때도 유성전자 주가는 안정적으로 상승 중이다.
현재 유성전자 시총은 700조 원 수준.
“아마 1조 달러는 넘지 않겠어요?”
빅테크 기업이나 아람코만 1조 달러 넘으라는 법 있나?
K-대기업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다.
시스템 반도체도 설계해야 하고, 파운드리도 잘해야 하고, 스마트폰도 잘 만들어야 한다.
현재 전세계에서 7나노 이하의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곳은 대만의 PSMC와 한국의 유성전자뿐.
1회차 때 유성전자 파운드리는 PSMC에 밀려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다르다.
일찌감치 ADM에 투자한 덕분에 안정적인 물량을 확보했고, 동우정밀의 특허를 확보하며 기술개발 역시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러시펀드는 유성전자 파운드리와 협력을 맺고 있는 반도체 디자인하우스 회사들에도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디자인하우스는 팹리스가 설계한 반도체를 파운드리 공정에 맞게 최적화하는 역할을 한다.
여전히 파운드리 전문인 PSMC에 비하면 아직 기술력이 부족하지만, 1회차 때에 비하면 해볼 만한 수준까지 올라섰다.
이게 다 내가 그동안 신경 써준 덕분.
이렇게까지 유성전자에 투자하는 것은 K-재벌을 사랑하기 때문……은 아니고, 유성전자의 성장이 스노우크래시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일 얘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난 그녀에게 물었다.
“사우디는 요즘 어떤가요?”
“어떤 게 궁금해요?”
“사회 분위기요. 여성들의 생활이나.”
“많은 부분이 변하고 있어요. 이제는 여성이 혼자 영화와 축구를 관람할 수 있고, 운전도 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던 일이죠.”
이 당연한 일이 이전에는 당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나요?”
“예. 법이 바뀌어도 인식이 바로 바뀌는 건 아니니까요. 사회가 변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먼저 변해야 해요. 그래서 여성 교육에 투자할 계획이에요. 교육은 모든 것의 시작이니까요.”
왜 남성 교육에는 안 쓰고 여성 교육에만 투자하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우디의 경우 남성은 교육비 전액 무료에, 원하면 유학까지 보내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와하비즘 사상에 근거해 여성 교육을 불필요한 일로 여기고 있고, 여기에 돈을 쓰는 것을 아까워한다.
아무리 좋은 개혁이라 해도 반대하는 세력은 있기 마련.
하지만 그냥 국고를 쓰는 게 아니라, 공주가 벌어온 돈으로 투자한다고 하면 반대가 좀 약해지겠지.
“사우디는 앞으로 더 크게 나아질 거예요.”
난 사라를 보았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카락에 또렷한 이목구비. 커다랗고 짙은 눈에 연한 커피색 피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미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이상의 매력이 느껴졌다.
꿈을 좇는 사람은 이렇게 빛날 수 있구나.
“멋지네요.”
그녀에게 돈은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 사우디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지니고 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바뀌어 가는 거겠지.
사라는 살포시 웃음을 지었다.
“미루 씨가 도와준 덕분이에요.”
* * *
[세계 최대 수소트럭 공장, 디트로이트에 건설!]
[하버콘 주지사, 주 정부 차원에서 수소 인프라 구축 지원할 것]
[넥스트로젠 데일리 CEO, 수소트럭은 경제성을 이미 입증]
[엘마트, 피덱스에서 3000대 선주문]
승용차 시장에서 전기차 판매 비중이 점점 커지는 것과는 달리, 상용차는 여전히 내연기관의 독무대였다.
그러나 언젠가는 친환경차로 대체될 것은 분명한 사실.
때문에 이 거대한 시장을 놓고 전기차와 수소차가 대결을 벌였다.
양쪽 다 각자의 장단점이 있는 만큼, 결국 어느 쪽이 더 경제성을 갖출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시장 전망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다.
인프라만 갖춰지면 수소트럭이 유리하다는 쪽도 있고, 배터리 기술력이 점점 좋아지는 만큼 전기트럭이 유리하다는 쪽도 있다.
그런데 그중 가장 앞장서서 수소트럭을 비난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티슬라의 CEO 알렌 에버하트.
그도 그럴 것이 티슬라는 세계 최대의 전기차 회사. 그리고 현재 전기트럭 콜론의 출시를 앞두고 있다.
알렌 에버하트는 뉴욕타임즈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맹비난을 퍼부었다.
“에너지 저장 수단 중에서 수소는 가장 비효율적이다. 수소를 액화 상태로 만드는 것에도 에너지가 들고, 액체 형태의 수소를 저장하기 위해서는 매우 커다란 탱크가 필요하다. 대체 이런 멍청한 생각을 누가 했는지 궁금하다. 그동안 수소차에 대해 9천 번 정도 질문을 받았는데, 내 대답은 항상 똑같다. 한마디로 말하면 엄청난 바보짓(Staggeringly Dumb)이다.”
인터뷰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그는 하루에도 몇 개의 투윗을 올려 수소트럭을 저격했다.
[우리는 이미 전기차라는 완벽한 친환경차를 가지고 있어. 그런데 수소차 같은 게 왜 필요하지?]
[수소차 시대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
[하하! 수소차에 대한 헛소리는 언제나 나를 웃게 만들어]
[티슬라의 전기트럭 콜론이 나오면, 지금 출시된 수소트럭은 전부 폐차장으로 향하게 될걸]
[연료전지(Fuel Cell)? 바보가 판다(Fool Sells)는 뜻인가?]
난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투윗을 보며 피식 웃었다.
“역시 재밌는 사람이란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