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3화. 기공식 (2)
항상 집에서 보던 아버지를 미국에서, 그것도 일 때문에 보니 뭔가 색다른 느낌이다.
성공한 사업가 같은 아버지를 보니, 왠지 뿌듯하다랄까?
“회사는 잘되고 있죠?”
“그럼. 다 여기 있는 허 사장이 도와준 덕분이지.”
그러자 허민웅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에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 한 사장님께서 열심히 하신 덕분이죠. 전 거기에 그저 아주 약간의 도움만 드렸을 뿐입니다.”
아부 좀 그만해!
자꾸 이러면 우리 아버지 진짜인 줄 알겠네.
당연하게도 병진공업을 키운 것은 8할이 허민웅.
K-재벌이 마음만 먹으면 중소기업 하나 키우는 건 일도 아니다.
직접 발로 뛰며 은행도 소개해주고, 물량도 잔뜩 밀어줬다. 만약 혈연관계였다면 일감 몰아주기로 걸려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1.5할은 놀라울 정도의 사업수완을 발휘해 기업을 키운 박용진 부사장.
화안중공업 영업직 평사원으로 시작해 화안솔루션 전무까지 올라간 인물답다.
아버지가 혼자 이끌었다면 아무리 일감을 몰아줘도 제대로 소화를 못 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5푼 정도는 아버지가 열심히 한 덕분이겠지.
“여기가 디트로이트에서 가장 유명한 맛집입니다.”
“허허, 허 사장 덕분에 이런 곳도 와보고.”
“에이, 뭘요. 예약하느라 힘들긴 했습니다.”
은근슬쩍 자신이 고생했다는 것을 어필하고 있다.
우리는 식사를 하며 와인을 마셨다.
“이게 대체 얼마 만이냐?”
“글쎄요. 한 몇 달 됐죠.”
“아들 보기가 여기 허 사장보다 더 보기가 힘들어서야.”
“…….”
그건 허민웅을 너무 자주 보기 때문이 아닐까?
“허 사장에게 들으니 이번에 미국에 엄청 큰 회사를 인수했다며?”
“예. 선우가 만든 게임사랑 합병할 예정이에요.”
“선우는 잘 지내고?”
“예. 열심히 게임 만들고 있어요.”
선우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던 만큼, 부모님도 잘 알고 있다.
식사가 끝나자, 허민웅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피곤해서 먼저 쉬러 가보겠습니다. 계산은 제가 할 테니 편하게 드시다가 오세요.”
오랜만에 만난 가족끼리 좋은 시간을 보내라는 K-재벌의 따뜻한 배려가 느껴졌다.
둘만 남게 되자 아버지는 표정을 좀 더 풀고 편한 자세로 앉았다.
“컨티뉴 캐피탈에 대한 소식은 뉴스를 통해 보고 있다. 이거 참, 증권사 잘 다니던 애가 어느 날 그만두더니 그런 엄청난 회사를 만들 줄이야.”
“제가 투자에 소질이 좀 있었나 봐요.”
“힘들진 않고?”
“예. 어차피 실무는 록허트 대표가 하니까요.”
와인병이 비자 이번에는 위스키를 시켰다.
“이렇게 둘이 술 마시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그러게요. 어머니는 잘 지내고 계시죠?”
“항상 똑같지. 너 집에 좀 들어오라고 하는데.”
“바쁘다고 해주세요.”
“매일같이 너 결혼은 언제 하냐고도 걱정도 많고.”
“……천천히 하겠다고 전해주세요.”
“기왕 할 거 빨리하는 게 좋지 않겠니? 너도 얼른 가정을 꾸려야지. 지금 만나는 아가씨 없어?”
“…….”
혹시 안 한다는 선택지는 없나?
난 화제를 돌렸다.
“세나는 어떻게 지내요?”
“잘 지내지.”
“걔 공부는 좀 하나요?”
“으음…….”
수심이 깊은 아버지의 표정을 보니,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공부 좀 못하면 어떤가? 건강하기만 하면 되지.
“그나저나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까지 오게 될 줄이야.”
“앞으로는 여기저기 좀 다니세요. 회사에만 계시지 마시고.”
“안 그래도 이번 결혼기념일에 부부 동반으로 유럽 여행 한번 가볼 생각이다.”
“오! 좋네요. 블랙우드 인터내셔널에서 VIP들에게만 제공하는 전용기와 호화주택 패키지 있으니, 언제든 말씀하세요.”
아버지는 술을 마시며 말했다.
“미루 너한테는 항상 고맙구나. 부모로서 해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렇게 크게 성공하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다 아버지가 열심히 하셔서 저도 성공할 수 있었던 거죠.”
생각해보면 좋은 부모님 밑에서 자란 거야말로 최고의 행운이다.
그래서인지 성공한 사업가 같은 아버지의 모습이 더욱 반갑다.
아들이 벌어다 준 돈으로 호의호식했으면, 가장의 체면도 살지 않고 괜한 부담을 느꼈을 수 있다.
그러나 직접 벌어서 쓰는 거라면 얘기가 다르다.
아버지의 이름을 딴 병진공업은 쭉쭉 성장 중이다. 허민웅에게 들었는데, 기업가치를 따지면 5천억 원쯤 될 거라고 한다.
지금 성장세면 1조 원 돌파도 시간문제 아닐까?
“아무튼 고맙구나.”
왠지 쑥스러운 분위기다.
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농담처럼 말했다.
“이러다가 우리 집 재벌 되는 거 아니에요?”
내 말에 아버지는 손사래를 쳤다.
“에이, 재벌은 무슨.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
사장이 여기서 만족하면 어떡해?
어떻게든 매출을 늘리고, 한 푼이라도 더 벌 생각을 해야지.
내 아버지지만, 역시나 큰 사업 할 만한 양반은 못 된다.
회사 안에는 박용진 부사장이, 회사 밖에는 허민웅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아버지는 회상에 잠긴 듯 말했다.
“공장 하나짜리 작은 회사였던 병진공업이 이렇게 커질 줄이야.”
“뿌듯하시죠?”
“그럼.”
병진공업은 아버지의 청춘을 다 바친 곳이다.
자식과도 다름없는 회사가 쑥쑥 커가는 걸 보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것이다.
그래서인지 예전보다 혈색도 좋아 보였다. 오히려 몇 년 전보다 지금이 더 젊어 보이는 느낌이다.
그만큼 사람은 일에서의 성취감이 중요한 것이다.
“바쁘시더라도 운동 꾸준히 하세요. 건강이 최고입니다.”
아버지는 웃음을 지었다.
“알았다.”
난 아버지와 둘이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 * *
수소트럭은 이미 출시돼 도로를 달리는 중이지만, 그 숫자는 아직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디트로이트의 합작 공장이 완성되면, 이곳에서만 연 5만 대의 수소트럭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물류업계의 판도를 바꿀 수도 있는 만큼 세계적인 관심이 집중됐고, 취재 열기 역시 뜨거웠다.
수많은 기자들이 참석했고, 그중에는 WST의 유명 기자도 있었다.
트리시는 한쪽에 앉아 노트북으로 기사를 작성 중이었다. 난 살짝 떨어진 위치에서 코끝에 안경을 걸친 채 집중하며 타이핑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안경을 올려 쓰며 고개를 들었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 얼굴을 본 그녀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언제 왔어요? 안 오는 줄 알았는데.”
“NS가 협조해준 덕분에 저쪽 일이 일찍 끝나서요.”
트리시는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그럼 미리 얘기 좀 해주지 그랬어요?”
“미안해요.”
그녀는 노트북을 덮었다.
“기사 쓰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대충 초고 끝냈어요.”
“그럼 잠깐 저랑 같이 갈래요?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요.”
“누군데요?”
“따라와 보면 알아요.”
난 트리시를 아버지에게 데려갔다. 아버지와 함께 있던 허민웅은 트리시를 보며 반가워했다.
“왔어요?”
“반가워요.”
두 사람은 오코너 버거가 한국에 런칭할 때 본 적이 있다.
난 아버지에게 한국어로 트리시를 소개해주었다.
“이쪽은 WST 기자 트리시 오코너예요.”
“아, 예.”
이어서 영어로 트리시에게 말했다.
“이쪽은 병진공업 사장님이에요.”
“병진공업이요?”
“화안에너지 1차 벤더예요.”
“아하! 미루랑은 무슨 사이예요? 친해 보이는데.”
“저희 아버지예요.”
내 말에 트리시는 깜짝 놀랐다.
“아, 아버님이요?”
“예.”
트리시는 잠시 나랑 아버지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살짝 돌렸다. 이어서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어떡해. 왜 진작 말 안 해줬어요?”
“미리 말해줬어야 하는 거예요?”
“그럼요. 화장도 제대로 안 하고, 옷도 대충 입었는데.”
“…….”
그럼 평소랑 똑같지 않나?
트리시 원래 화장을 잘 안 하고, 옷도 대충 입는다. 키가 크고 늘씬해서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어도 잘 어울리지만.
트리시는 두 손을 모으고 다소곳하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전 트리시 오코너라고 합니다.”
“예. 안녕하십니까. 병진공업 사장 한병진입니다.”
아버지가 영어를 할 줄 모르시는 관계로 내가 옆에서 통역하며 설명해주었다.
“유명한 기자님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아, 아니에요.”
“책도 하나 쓰셨다고.”
“네.”
인사가 끝나자 왠지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아버지는 나를 붙잡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알게 된 사이니?”
“그냥 우연히요.”
정확히는 카페에서 만났다.
“너랑은 무슨 사이니?”
“뭐…….”
굳이 설명하자면 친한 사이라 할 수 있지.
아버지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는 외국인도 괜찮다.”
“……예?”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간곡한 표정으로 트리시에게 말했다.
“우리 미루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트리시는 두 손을 불끈 쥐었다.
“그럼요! 맡겨주세요.”
“…….”
아니, 한국어로 말했는데 어떻게 알아들은 거야?
* * *
화창한 날씨에 기공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넥스트로젠 창업자 톰슨 데일리 대표, 그리고 GM 제인 카니터 CEO, 그리고 미시간주 주지사 루시언 하버콘과 빌리 카메츠 디트로이트 시장도 참석했다.
그뿐만 아니라 상원의원과 하원의원 등도 우르르 몰려왔다.
정치인들이 이런 행사에는 빠질 수 없지.
그들은 영업이라도 하듯 기업인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했다.
지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자리.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야 유권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의 각 주들은 기업과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중이다.
이번에 수소트럭 공장을 디트로이트에 낙점한 것도 미시간주와 디트로이트시 당국이 강력한 세제 혜택을 약속했기 때문.
난 50대의 백인 남성을 마주했다.
그는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디트로이트 시장 빌리 카메츠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미루입니다.”
난 명함을 받아들었다.
“컨티뉴 캐피탈은 클라우드를 비롯한 다수의 IT기업들에 투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디트로이트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언제든 연락 주시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모터시티라는 별칭답게 디트로이트라고 하면 자동차 공장을 비롯한 제조업이 생각나지만, 최근에는 제2의 실리콘밸리라 불릴 정도로 IT기업들이 우후죽순 들어서고 있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최근 자동차는 전자기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온갖 최첨단 기술이 들어간다.
때문에 디트로이트시 당국 역시 자동차와 연계한 스타트업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지원하는 중.
“예.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카메츠 시장은 영업이라도 하듯 말했다.
“꼭 부탁드립니다.”
행사가 시작되자 하버콘 주지사는 단상에 올라서서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이제 디트로이트는 다시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로 도약했습니다. 수소트럭은 디트로이트에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것입니다. 모터시티라는 별칭답게 앞으로도 세계 자동차 시장을 선도해 나가며…….”
거의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수준의 감명 깊은 연설이 이어졌다.
그 외에 넥스트로젠 CEO, GM CEO, 그리고 허민웅도 한마디씩 했고, 다 같이 첫 삽을 뜨는 삽질 퍼포먼스를 하고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 * *
기공식이 끝난 뒤.
다과를 겸한 파티가 열렸다.
난 이리저리 참석자들을 둘러보았다.
허민웅이 물었다.
“누구 찾아?”
“아니에요.”
역시 안 온 모양이다. 지금도 사우디에 있으려나?
그 순간 한 여성이 파티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미녀였다.
그녀를 본 나는 반가워하며 말했다.
“사라!”
사라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