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화. 기공식 (1)
도저히 아니라고 말할 분위기가 아닌지라, 난 대충 얼버무렸다.
“어, 뭐. 그렇지. 다들 오코너 버거 좋아하니까.”
[그랬구나. 역시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저 진짜 너무 감동 받은 거 알아요?]
“…….”
이 말을 들으니, 얘가 진세연 사촌여동생이라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다.
걔도 가끔 쓸데없는 착각을 하곤 했지. 둘 다 똑 부러지는 성격인데, 의외로 맹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궁금한 게 있는데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뭔데?”
[일하다 보면 막 유명한 CEO들도 만나고 그래요?]
“응. 이번에는 NS에서 샤말란 CEO를 만났어.”
[앗! 진짜요? 그리고 또 누구 만났어요?]
“음, 페이스노트 CEO 마이클 골든버그도 만났고, 엔플 CEO 탐 키튼도 만났고, 샤크 인베스트먼트 마이클 프레스턴 CEO도 만났고.”
이들 대부분이 나를 원수로 생각한다는 약간의 사소한 문제가 있긴 하다.
[와아!]
마치 유명 연예인을 만났다는 얘기를 들은 것처럼 신기해했다.
[아직도 잘 믿기지가 않아요.]
“뭐가?”
[선배가 컨티뉴 캐피탈을 만들었다는 게요.]
“미안. 진작 말해줬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그래도…… 저한테는 말해줬으니까.]
난 화제를 돌렸다.
“촬영 힘들지는 않았어?”
[힘들었지만 재밌었어요. 근데 좀 걱정이긴 해요.]
“어떤 점이?”
[장르가 좀 특이하잖아요. 잔인하기도 하고.]
세븐 라운드의 장르는 배틀로얄.
배틀로얄이란 한정된 공간 안에 다수의 참가자들을 몰아넣고 최후의 1인이 남을 때까지 서로 죽고 죽이게 하는 것.
장르 특성상 폭력적이고 잔인할 수밖에 없는 만큼, 탁동식 감독은 제작 단계부터 19금이라는 것을 못박았다.
아무래도 비주류에 극단적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장르인 만큼, 한국에서는 단 한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다.
이걸 영화도 아니고 드라마로 만들겠다고 하니, 많은 투자자들이 외면한 것이다.
이런 드라마가 대박을 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다들 열심히 했거든요. 그래서 잘됐으면 좋겠는데.]
“잘 될 거야. 혹시 알아?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대박을 치고, 에미상까지 탈지.”
에미상(Emmy Award)이란 어머니가 주는 상이 아니라, 미국 방송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시상식.
영화로 치면 아카데미상이랄까?
[에이, 설마요.]
지금이야 농담처럼 말하지만 진짜다.
그렇게 대박을 쳐서 시즌2와 3도 줄줄이 제작되고, 스핀오프도 나온다.
[그런데 선배님이 그렇게 말해주니 안심이 돼요.]
사실 세븐 라운드는 1회차 때와는 몇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
첫째로 원래는 넷플레이의 제작비 지원을 받은 독점작이었으나, 현재는 배급만 넷플레이에 맡기기로 했다.
둘째로 지유가 맡은 역할은 원래 주보경이라는 신인배우가 맡았었다.
뭐, 감독도 같고, 주연배우도 지유 빼고는 전부 같으니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지유가 연기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1회차 때와는 달리 로키와 써릴 스크린을 도입해 찍었다.
1회차 때 어색한 CG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 나아졌으면 나아졌지 못 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촬영 끝났으니 이제 뭐할 거야?”
[음, 사실은 조금 전까지 새로운 가사 쓰고 있었어요.]
“그래?”
[네. 왠지 좋은 노래가 나올 것 같아요.]
지유는 직접 작사 작곡을 하는 싱어송라이터. 그렇게 해서 만든 노래가 하나 같이 명곡이다.
이러니 걸그룹 천하에서도 당당하게 솔로 여가수로서 이름을 날리는 것이다.
지유가 최고다!
“아! 메기가 콘서트 언제 하냐고 궁금해하던데. 꼭 가보고 싶다고.”
[정말요? 메기는 잘 지내고 있어요?]
“응. 이제는 완전히 건강해져서 학교도 다니고 있어.”
[정말 다행이에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통화가 한 시간을 넘었다.
“피곤할 텐데 얼른 자.”
[네. 선배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여긴 낮인데.”
[아, 맞다.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 *
게임스타트 사태부터 시작해 레전드덱 출시에 판타지아 테일즈R 출시. 그리고 아이스스톰 인수까지.
한동안 정신이 없었는데, 이제 좀 마음이 놓인다.
난 하루 동안 아무 생각하지 않고 호텔에서 푹 쉬었다.
혼자 넓은 호텔방에서 자고 일어나면, 내가 외노자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난다.
난 가볍게 조식을 먹은 다음 다시 실리콘밸리로 향했다. 그러고는 공항에서 내려 스노우크래시로 향했다.
시드는 옆에 좀비네이도3 영상을 틀어놓고 일하는 중이었다.
지금 영화관에 상영하는 영화의 파일을 어떻게 구했을까?
불법복제……는 아니고, 프리즈너에서 특별히 제공해주었다. 그것도 2시간짜리 극장판이 아니라, 3시간 20분짜리 확장판으로 따로 만들어서.
난 시드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시드는 쓰고 있던 헤드폰을 벗으며 고개를 돌렸다.
“형!”
난 오면서 사온 샌드위치를 들어 보였다.
“아직 점심 안 먹었지? 같이 먹자.”
자리를 옮기는 대신 그 자리에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었다.
“친구분은요?”
“먼저 한국으로 돌아갔어.”
“SW게임즈에서 만든 게임 엄청 재밌다고 난리던데요. 직원들 중에서도 플레이하는 사람들이 좀 있어요.”
“그래?”
“예. 아이스스톰과 합병하는 것에 대해서도 기대가 큰 모양이에요.”
“안 그래도 그거 얘기하려고. 보내준 자료는 봤지?”
“아이스스톰과 SW게임즈를 연결하는 가상 오피스 구축이요?”
“응.”
아이스스톰은 LA에, 그리고 SW게임즈는 서울에 있다.
두 회사의 시차만 해도 17시간이다. 서울에서 11시에 한창 업무 중이면, LA는 슬슬 퇴근할 시간이다.
시차야 어떻게 할 수 없다 쳐도 1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함께 업무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행히 이 부분에 대한 해결책은 이미 스노우크래시가 가지고 있다.
바로 판게아 오피스다.
단지 화상통화만이 아니라, 클라우드를 통해 작업 진행을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소통하는 종합 업무 솔루션.
예컨대 한국에서 작업해 놓고 퇴근하면, 이제 막 출근한 미국의 직원들이 이를 바로 받아서 작업하는 식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연결해 하나의 공간에서 일하는 것처럼 만들어주는 만큼, 업무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다.
스노우크래시와 계약을 맺은 업체들은 속속들이 판게아 오피스를 업무에 도입했고, 이는 중요한 수익원으로 자리 잡았다.
“이미 하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고마워.”
“고맙긴요. 형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는 잘 알고 있는데요.”
난 손사래를 쳤다.
“에이, 내가 고생은 무슨. 니가 고생이 많지.”
“아니에요. 형이 더 고생이죠.”
“아이 참.”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얘가 알아줘서 천만다행이다.
클라우드 사업은 돈 먹는 하마나 다름없다.
한번 들어가는 투자금액만 해도 수억 달러씩이다. 게다가 스노우크래시뿐 아니라, 링크랩스에도 계속 돈이 들어가고.
만약 일반 기업이었다면 진작 외부 투자를 모집하거나, 상장해서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끌어모았을 것이다.
하지만 스노우크래시는 둘 중 어느 쪽도 택하지 않았다. 이게 가능한 것은 전부 내가 번 돈을 쏟아붓고 있기 때문.
그나마 데이터센터에 유성전자가 투자하고 있으니 다행이지. 만약 그것까지 직접 투자해야 했다면, 진작 파산했을지 모른다.
사실 스노우크래시에 투자하고 싶어 하는 곳은 줄을 섰다.
그럼에도 외부 투자를 받지 않고, 이 고생을 하는 이유는 그래야 다 내가 먹을 수 있기 때문.
정확히는 나랑 시드 둘이서 7대 3으로 나눠먹는 거지만.
“지금 미미르를 활용해 만들고 있는 게 하나 있거든요.”
“뭔데?”
“아직 말할 단계는 아닌데…… 나중에 완성된 거 보시면 아마 깜짝 놀랄 거예요.”
왠지 뭘 말하려는지 알 것 같다.
“혹시 AI 관련이야?”
“맞아요. 어쩌면 시장 전체를 크게 바꿔놓을 수 있을 거예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하고 있을게.”
* * *
스노우크래시를 나온 다음.
이번에는 미시간주의 디트로이트로 향했다.
그곳에서 GM, 넥스트로젠이 공동 투자한 수소차 공장의 기공식이 열리기 때문이다.
수소트럭 플랫폼을 만드는 회사인 넥스트로젠은 러시 펀드와 PIF가 완전히 인수했다.
넥스트로젠의 플랫폼으로 만든 수소트럭은 이미 도로를 달리는 중.
여기서 더 나아가 수소버스, 수소픽업트럭 등의 플랫폼도 출시할 예정이다.
승용차 분야는 이미 전기차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이 시장에서 당장 경쟁해봐야 실익이 없다.
반면 상용차 분야는 좀 다르다.
전기차의 차값에서 가장 많은 비용을 차지하는 것은 배터리. 대형차나 상용차의 경우에는 더 많은 배터리가 들어가야 하고, 이는 가격 상승의 요인이 된다.
따라서 차체가 크면 클수록 수소차가 경제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이미 상용화된 전기차에 비해 수소차는 이제 걸음마 단계다. 더 많은 회사들이 이 시장에 뛰어들어야 규모의 경제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사우디의 막대한 투자금을 바탕으로 여러 자동차회사들과 기술제휴를 맺고 공장을 세우는 중.
이번에 디트로이트에 만들어지는 공장 역시 그중 하나다.
GM과 합작해 공장을 짓고, 화안에너지는 그 옆에 그린수소 공장을 만들기로 했다. 규모는 미국 최대가 아닌, 세계 최대.
공항에서 내리자 반가운 얼굴……까지는 아니고, 그냥 아는 얼굴이 나를 맞이했다.
“헤이, 브라더. 오랜만이야.”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고 있지? 건강은 좀 어때? 식사는 잘 챙겨먹고 있지? 형이 항상 걱정이 많아.”
“쓸데없는 걱정 그만해요.”
“하긴, 재벌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더라.”
“…….”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내가 재벌인 줄 알겠는데.
난 허민웅이 가지고 온 차에 올라탔다.
“못 오는 줄 알았어.”
“다행히 일이 일찍 끝나서요.”
“이번 공장 설립에 우리도 투자 엄청 한 거 알지?”
“알아요.”
“GM과 넥스트로젠의 합작 공장이라니. 토머스 모터스와 제휴를 맺으려 했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화안에너지는 정말로 토머스 모터스와 제휴를 맺었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 폭망했겠지.
“지난번에는 번지수를 잘못 찾았는데, 이번에는 맞게 찾아서 다행이네요.”
“다 누구 덕분이지.”
그렇다면 토머스 모터스는 어떻게 됐을까?
브레드 버튼 CEO는 사임 후 재판을 받는 중. 그리고 토머스 모터스는 놀랍게도 아직까지 상폐되지 않고 살아있다.
여전히 수소트럭을 출시할 거라고 한다. 이젠 아무도 믿지 않지만.
“저녁 아직이지?”
“네.”
“내가 좋은 곳으로 예약해 놨어. 가보면 반가운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누군데요?”
“보면 알아.”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일행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머리가 회색빛인 50대 후반의 남성.
난 깜짝 놀라 말했다.
“아버지!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나를 본 아버지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안 오려고 했는데, 여기 허 사장이 자꾸 같이 오자고 해서.”
그러자 허민웅이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병진공업이 없으면 화안에너지도 안 돌아가는데, 이런 중요한 자리에는 당연히 참석하셔야죠.”
“…….”
대기업 사장이 하청업체 사장에게 아부를 하다니!
그래도 그냥 한 말은 아닌 게, 그사이 병진공업은 쭉쭉 성장해 화안에너지 1차 벤더 위치로 올라섰다.
“정장 잘 어울리시네요.”
“그러니?”
내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거의 항상 작업복을 입고 계셨다. 그런데 지금은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고 계셨다.
“일은 재밌으세요?”
“그럼.”
원래 일이라는 게 지시를 내리는 쪽은 엄청 재밌다. 지시를 받아 일을 하는 직원들은 죽을 맛이겠지만.
어차피 실무는 전부 박용진 부사장이 하고 있을 테니, 아버지는 이렇게 행사 같은 데 참석하며 악수하고 사진을 찍으면 되는 것이다.
기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 오신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제대로 효도한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