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화. 아이스스톰 (3)
조나단 호퍼 CEO와 선우는 한참 동안 게임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 보니 최근 아이스스톰이 출시 준비 중인 메피스토 인피니티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호퍼 CEO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이 정도로 부정적인 여론이 클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래도 실망스러운 일이니까요.”
선우의 말에 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이스스톰은 모바일 게임을 내놓으면 안 된다는 겁니까?”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좀 억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이스스톰은 다른 게임사들에 비해 모바일과 소액과금 비중이 압도적으로 적으니까.
스타스페이스, 월드 오브 워로드, 메피스토,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나온 오버클락까지.
하나하나가 우주명작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게임들과 브라더후드M을 비교하면 매출이 어떨까?
참고로 이 게임들이 전부 글로벌 히트를 친 반면, 브라더후드M은 한국에서만 흥행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브라더후드M의 매출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만큼 모바일과 소액과금은 게임사 입장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것이다.
아이스스톰은 그동안 숱한 명작 게임을 만들어냈지만, 그만큼 돈을 벌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제 모바일과 소액과금 시장으로 진출해 돈을 좀 벌어보려 하는데, 비난이 쏟아지는 거고.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 모바일 게임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외주가 아니라, 직접 개발했으면 더 좋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이스스톰이 30년 동안 쌓아온 IP에는 무한한 가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타스페이스는 우주 대서사를 담고 있고, 월드 오브 워로드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전쟁 역사가 있고, 오버클락의 히어로들에게는 각자의 스토리가 있죠. 이를 활용해 얼마든지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다른 회사에 맡기는 건 아까운 일입니다.”
그 말에 호퍼 CEO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얘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아이스스톰만 분할해 인수하고 싶으시다구요.”
“그렇습니다.”
최근 산업 전반에 걸쳐 빠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는 게임 산업 역시 마찬가지. 오히려 가장 큰 변화를 겪고 있다고 봐도 좋다.
소득이 오르고 여가시간이 늘어나며, 게임 인구는 매년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덕분에 게임사들 시총 역시 치솟았다.
그런데 업계 내부 사정을 보면 좋지만은 않다.
하드웨어의 사양이 올라가며, 게임의 개발기간은 더 길어지고 있고, 개발비용 역시 어느 때보다 올라가는 중이다.
그렇게 수년의 시간과 수억 달러를 들여 만든 게임이 실패하면, 회사 전체가 휘청거린다.
이러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업계에서는 인수합병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중이다.
“얘기를 듣고 좀 당황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NS에 인수될 줄 알았으니까요. 그런데 컨티뉴 캐피탈이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난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저보다는 강선우 대표가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인수를 하게 된다면, SW게임즈와 합병하는 방식이 될 겁니다.”
“흐음, 그렇군요. SW게임즈랑 아이스스톰이 말이죠.”
두 기업은 매출과 역사 모두 비교가 되지 않는다.
SW게임즈는 신생 게임사인 반면, 아이스스톰은 30년 넘는 역사를 지닌 거대 게임사니까.
“합병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아이스스톰을 운영하게 될지 궁금하군요.”
선우가 말했다.
“짧지만 오랫동안 게임업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깨달은 게 있습니다.”
“뭔가요?”
“게임 개발 과정이 극도로 비효율적이라는 겁니다.”
호퍼 CEO는 흥미를 나타냈다.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처음 게임을 디자인할 때 기획자와 그래픽 다자이너는 부지런하게 움직이지만, 그사이 개발팀은 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막상 개발이 시작되면 반대 상황이 펼쳐지죠. 게다가 개발 과정에서 프로젝트의 방향성은 수시로 변경됩니다.”
1인칭이 3인칭으로 바뀌고, 쿼터뷰가 숄더뷰로 바뀌고, 캐릭터와 스토리가 달라지고, 심지어는 아예 장르가 바뀌는 일도 있다.
이렇게 중간에 계속 계획이 변경되다 보면, 개발자들도 나중에는 자신들이 뭘 만드는지 모르게 된다.
때문에 작업 전체를 보고 지휘할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역할이 중요한 거고.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을 보내다가 출시일이 점점 다가오면 하루에 16시간씩 주 7일을 일하는 크런치가 펼쳐집니다. 이는 누구도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크런치가 한두 달 안에 끝나면 다행이지만, 1년 넘게 지속되는 일도 흔하다. 이 경우 개발자가 일과 가정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실력 있는 개발자들을 업계에서 떠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게임업계가 계속 성장하고, 좋은 게임을 지속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러한 비효율성을 최대한 없애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게임을 개발할 수 있습니까?”
문제를 지적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중요한 건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느냐다.
다행히 선우에게는 해결책이 있다.
“개발에 있어서 외주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그러자 호퍼 CEO는 황당해했다.
“아까는 외주를 주지 않고 직접 개발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IP를 넘겨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게임 개발은 당연히 개발사가 해야죠. 다만 개발 과정에서 일부 작업은 외주를 주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겁니다. 저희는 이미 산하 스튜디오를 그런 방식으로 개편하고 있습니다.”
SW게임즈는 구블의 스테피아 폐쇄 이후 시장에 나온 개발 스튜디오를 인수했다. 그리고 선우는 이 개발사들 중 일부를 외주 제작사로 바꿨다.
“호주에 있는 오픈워터 게임즈의 경우 현재 3D 모델링 제작사로, 벤쿠버에 있는 오션즈81은 레벨 디자인 전문 제작사로 변모 중입니다.”
그 외에 리메이크나 리마스터를 전문으로 하는 제작사와 시네마틱과 일러스트 제작사, 타 플랫폼 이식 제작사도 있다.
“외주를 맡길 경우 시간과 비용이 오히려 절약됩니다. 직원들은 안정적인 환경에서 일할 수 있고, 개발 과정의 비효율성을 최대한 없앨 수 있죠.”
사실 이러한 시도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레드포인트 게임즈가 대표적이다.
이곳은 리메이크와 리마스터를 전문으로 하는 게임사.
덕분에 게이머들은 오래된 게임을 최신 그래픽으로 즐길 수 있고, 원작을 개발한 개발사는 다음 시리즈 제작에 전념할 수 있었다.
난 선우의 말을 거들었다.
“컨티뉴 캐피탈은 기술적으로 이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영상제작 AI프로그램인 로키를 시네마틱 제작에 활용하거나, 클라우드 가상 오피스를 통해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는 기업끼리 원활하게 업무를 하거나 등등.
“NS도 분명 괜찮은 선택입니다. 거대 기업의 산하로 들어가면 안정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NS 역시 상장기업이고, 상장기업인 이상 매분기 실적 압박은 피할 수 없겠죠.”
내가 개발자는 아니지만, 게임업계의 사정에 대해서는 선우에게 질리도록 들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작년에 100만 카피를 팔고, 올해도 100만 카피를 파는 게임사가 좋은 게임사일까?
천만에.
상장기업인 이상 매년 그 이상의 매출을 내야 한다. 투자한 것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하면 아무리 유명한 게임 시리즈라 해도 가차 없이 개발을 중단시키기도 한다.
참고로 이 바닥에서 그런 쪽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건 AE.
이곳에서 중단시킨 유명 게임 프랜차이즈가 한둘이 아니다.
상장사는 회계를 위해 출시 일정을 급하게 앞당기기도 하고, 뒤로 미루기도 한다. 그나마 뒤로 미루면 다행이지만 앞당겨질 경우 완성도 안 된 엉망인 게임이 출시되는 것이다.
또한 매출 손실을 감추기 위해 망작과 대작을 같은 회계연도에 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SW게임즈는 비상장기업입니다. 분기별 매출 같은 건 신경 쓸 필요가 없죠. 컨티뉴 캐피탈은 아이스스톰이 새로운 게임을 성공시킬 수 있도록 여러 지원을 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레전드스토어도 있고, 레전드덱도 있죠. 또한 대규모 멀티 플레이를 위한 클라우드 환경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직원들은 사모펀드 밑으로 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겁니다.”
아이스스톰은 그 엄청난 명성과는 별개로 이곳저곳 팔려 다녔다. 지금도 맥스비전 산하에 있는 거나 다름없고.
일반적으로 사모펀드는 기업의 가치를 올려서 되파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컨티뉴 캐피탈은 좀 다르다.
우리는 한번 인수한 기업은 매각하지 않으니까. 스노우크래시, 블록게임즈와 레전드게임즈 등 다양한 사례가 있다.
난 그를 안심시켜주었다.
“컨티뉴 캐피탈이 SW게임즈에 투자하긴 하지만, SW게임즈는 강선우 대표의 소유입니다. 따라서 저희가 경영에 관여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여기서 잠깐 SW게임즈의 지배구조를 살펴보면, 표면상으로는 컨티뉴 캐피탈 산하에 있지만, 실제론 SPC 같은 별도 법인이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법인의 소유자는 100퍼센트 강선우.
“저희는 아이스스톰의 의사를 존중합니다. NS에 인수될지, 아니면 SW게임즈와 합병할지는 직접 결정하시면 됩니다.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약속드릴 수 있는 건, SW게임즈와 합병시 아이스스톰을 다른 곳에 매각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는 겁니다.”
내 말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한참 후, 그는 우리를 보며 물었다.
“어째서 아이스스톰입니까?”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으려나?
내가 고민하는 사이, 선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 이 게임사를 사랑하니까요. 게이머들이 아이스스톰에 느끼는 느낌은 감정은 남다릅니다.”
아이스스톰은 게임계에 한 획을…… 아니, 여러 획을 그은 게임사다.
스타스페이스는 RTS 장르를 흥행시키며 e스포츠의 가능성을 열었다.
월드 오브 워로드는 MMORPG의 교본이나 다름없고, 지금 나오고 있는 새로운 MMORPG는 모두 월드 오브 워로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히어로즈 오브 썬더는 AOS를, 메피스토는 액션 RPG를 대중들에게 각인시켰고, 오버클락은 FPS라는 장르를 완성시켰다.
또한 스타스페이스와 월드 오브 워로드의 유즈맵은 게임 속에서 유저들이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를 열었고, 수많은 게임들이 파생됐다.
그야말로 게임계의 전설과도 같은 기업이고, 수억 명의 팬들…… 일명 ‘스톰빠’들을 양산했다.
“만약 아이스스톰이 없었다면, 지금의 게임산업의 모습은 크게 달랐을 겁니다. 아이스스톰은 게임업계를 그리고 게이머들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전 앞으로도 그 역사를 함께하고 싶습니다.”
호퍼 CEO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저 혼자 결정해서 답변하기는 힘든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니까요.”
그는 전임 CEO의 사임으로 인해 등 떠밀리듯 CEO 자리에 올랐다. 직함은 CEO지만, 사실상 대행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니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겠지.
결국 다른 주요 개발자들에게도 일일이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
난 선우와 시선을 교환했다.
선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지금부터는 개발자들의 시간이다.
돈 가방 들고 다니는 양복쟁이는 빠져주는 게 좋겠지. 설득을 할 수 있을지 아닐지는 선우의 몫이다.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난 뒷일은 선우에게 맡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