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화. 아이스스톰 (2)
NS의 사티아 샤말란 CEO와 얘기를 끝낸 나는 데이비드에게 연락해 상황을 전달했다.
[정말로 NS가 맥스비전 스톰을 인수를 진행 중이었군요.]
“혹시 예상했나요?”
[어느 정도는요. 맥스비전 스톰이 심각한 내부 문제를 겪고 있는 만큼, 데이브 굿실 CEO가 회사를 매각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맥스비전 스톰은 최근 발표한 게임들의 성적이 별로 좋지 못했던 데다가 최악의 성추문 사건까지 터져 나왔다.
CEO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기존 구성원들과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이브 굿실 CEO는 회사를 매각한 뒤 자신은 떠날 계획이다. 그럼 NS에서 지명한 경영자가 와서 구조조정을 실시하는 것이다.
[이 정도 규모의 게임사를 인수할 만한 역량이 되는 곳은 몇 곳 안 되고, 그중에는 NS가 가장 유력하죠.]
자금력으로만 따지면 엔플, 구블, AMZ도 충분하다.
그러나 게임사는 다른 IT기업과는 다른 게임사만의 특수성이 있고, 그들은 이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개발사를 운영해본 경험이 없다.
반면, NS는 20년 넘게 게임 시장에 몸담으며 여러 노하우를 쌓아왔다.
[아무튼 NS 측에서 동의했다니 다행입니다.]
“전부 마이클 프레스턴 덕분이죠.”
그에게는 몇 번이나 감사의 인사를 전해도 부족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오코너 버거 세트 하나 사주든지 해야겠다.
호텔로 돌아온 나는 선우에게 말했다.
“NS랑 얘기 잘 끝났어.”
“그럼 이제는 어떡해?”
난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아이스스톰으로 가야지. 다시 짐 싸.”
* * *
아이스스톰 엔터테인먼트 본사가 있는 곳은 캘리포니아주 어바인.
우리는 전용기를 타고 시애틀에서 LA로 이동했다.
LA 국제공항에 도착해 밖으로 나오자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졌다. 역시나 호텔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먼저 JR블랙우드 호텔로 이동했다.
LA는 모두가 알다시피 할리우드가 있는 미국 영화산업의 중심지.
동시에 미국 게임산업의 중심지기도 하다.
LA를 중심으로 패서디나, 어바인, 산타모니카, 롱비치, 애너하임 등에는 유명 게임사들은 물론 수많은 인디 게임사들이 몰려있다.
세계 최대 게임쇼인 E3와 각종 게임 컨퍼런스 등도 이 지역에서 열린다.
한국으로 치면 판교쯤 되려나?
“LA에는 왜 이렇게 많은 게임사들이 있는 거야?”
내 물음에 선우는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에는 슬픈 사연이 있어.”
“무슨 사연?”
“게임 업계만큼 이직률이 높은 직종도 없거든. 하루아침에 스튜디오가 폐쇄되거나, 어딘가에 팔려가거나, 해고되는 일은 비일비재하지.”
“…….”
LD스튜디오는 개발팀이 해체되면, 사내면접이라는 걸 실시해서 직원들을 다른 팀에 배속시키고, 여기서 탈락한 인원은 퇴사를 권유한다.
사실상 강제 퇴사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LD스튜디오는 여론의 질타를 받았고, 고용노동부가 조사에 나섰다.
그런데 미국을 기준으로 보면 이것도 양호한 편이다. 왜냐하면 미국은 그딴 거 없이 그냥 잘라 버리니까.
“그나마 게임이 망해서 일자리를 잃는 거면 이해라도 하지. 반대로 게임이 대박난 뒤 개발팀이 해체되며 해고되는 경우도 많아.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모르는 만큼, 게임사가 많이 몰려있는 LA에 있는 편이 새로 일자리를 구하기가 수월하지. 반대로 게임사들은 인력 구하기가 쉽고.”
“아…….”
대형 게임사들의 경우 미국뿐 아니라, 영국, 유럽, 호주 등에도 스튜디오를 두고 있다.
때문에 게임 개발자들은 직장을 얻기 위해 호주나 유럽 등으로 이주하는 일도 흔하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짐 싸서 가족들 다 데리고 갔더니, 한 달도 안 돼 스튜디오가 폐쇄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이 얘기를 들으니, 게임 개발자로 산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다.
호텔에서 연락을 기다리는데, 바로 약속이 바로 잡혔다.
선우는 깜짝 놀랐다.
“벌써 약속이 잡혔다고?”
“응.”
돈 벌고 나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돈이 많으면 사람 만나기가 쉬워진다는 것.
“어떡하지? 나 아직 프레젠테이션 완성 못 했는데.”
잠시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하던 선우는 결국 노트북을 덮었다.
“역시 이런 걸로는 안 될 것 같아.”
“그럼?”
“직접 부딪쳐봐야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야.”
* * *
차가 멈춰 섰고, 우리는 건물 앞에 내렸다.
입구에는 청동으로 만든 거대한 월드 오브 워로드 캐릭터 조형물이 서있었다.
이곳이 바로 아이스스톰의 본사다. 직원 5천 명이 넘는 거대 게임사답게 건물 한 채를 통째로 쓰고 있다.
선우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나 지금 두근거려.”
“나도 그래.”
우리는 잠시 감격에 젖었다.
갑자기 아이스스톰에 왔다는 게 실감나기 시작했다.
다른 게임사도 아닌, 바로 그 아이스스톰!
학창 시절, 우리는 인생의 절반을 아이스스톰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타스페이스, 월드 오브 워로드, 그리고 메피스토까지.
용돈 모아 게임을 사는 것은 물론이고, 수업만 끝나면 PC방으로 달려가 나란히 앉아 게임을 했다.
선우는 회상을 하듯 말했다.
“그 PC방에서 먹었던 라면이 정말 맛있었는데.”
“아! 거기 라면 맛집이었지.”
나중에 집에서 몇 번이나 만들어보려고 도전했지만, 아무리 해도 그 맛이 안 났다.
PC방 망하기 전에 라면 레시피 좀 물어볼걸.
“우리 나중에 돈 모아서 스톰컨도 가기로 했었잖아.”
“그랬었지.”
결국 스케줄이 안 맞아서 못가긴 했지만.
애너하임에서는 매년 아이스스톰이 개최하는 컨벤션 행사가 열리는데, 이를 스톰컨이라고 한다.
E3, 게임스컴, 도쿄 게임쇼라면 모를까, 단일 게임사가 컨벤션을 개최하는 건 몇 안 된다.
이게 가능한 건 아이스스톰이 전세계 수억 명의 팬들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
이들은 단지 게임을 사는 소비자가 아닌, 아이스스톰의 열렬한 지지자들이다. 때문에 기꺼이 돈과 시간을 들여 스톰컨에 참가한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는 안 열렸구나.”
그 이유는 내부적으로 여러 문제가 터졌고, 신작도 지연됐기 때문. 이대로라면 스톰컨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는 중이다.
“님폰없도 거기서 나오지 않았나?”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나왔지.”
당시 스톰컨에서는 메피스토 신작이 발표될 거라는 소식에 메피스토 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아이스스톰은 모두의 예상대로 메피스토 신작을 발표했다.
그런데 메피스토4가 아닌, 메피스토 인피니티라는 모바일 게임이었다. 당시에도 PC와 콘솔 게이머들은 모바일 게임의 과금체계에 분노하고 있던 중.
그런데 믿었던 아이스스톰마저 모바일로 돌아선 것이다.
심지어는 아이스스톰이 직접 개발한 것도 아니고 중국 개발사 이지넷에 외주를 줬다!
이 발표가 나오자 발표회장은 순식간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여기에 대고 개발자가 분위기를 풀어보겠답시고 ‘여러분은 스마트폰도 없나요?(Do You Guys Not Have Phones?)’라는 농담을 던졌고, 분위기는 더욱 싸해졌다.
그리고 이 발언은 그해 게임업계 최대 망언으로 기록됐다.
얘기를 하다 보니 끝도 없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아이스스톰과 관련한 추억들이 많다.
PC방에서 함께 아이스스톰 게임을 하던 우리가 이제는 함께 아이스스톰 본사에 왔다. 관광하러 온 것도 아니고, 인수를 하러.
이런 날이 올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난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준비됐지?”
선우는 마찬가지로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안 된 것 같아. 다음에 다시 오자.”
“시끄럽고 어서 들어가자.”
난 몸을 돌려 돌아가려는 선우의 뒷덜미를 붙잡고 끌고 들어갔다.
“야야, 잠깐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니까!”
* * *
1층에는 안내 데스크와 아이스스톰 역사가 담긴 박물관, 그리고 굿즈 판매점이 있다.
“이따 돌아갈 때 좀 사갈까?”
내 물음에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달라고 해봐야지.”
좋은 생각이다.
이럴 때 돈 지랄 안 하면 언제 하겠는가?
구경과 쇼핑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안내 데스크로 다가가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전 한미루라고 합니다. 조나단 호퍼 대표님과 약속이 되어있습니다.”
직원은 정중하게 말했다.
“예. 저를 따라오시겠어요?”
직원은 바로 우리를 미팅실로 안내해주었다.
가는 길에 회사 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다양한 인종의 직원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열심히 게임을 개발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몇몇은 개방된 휴게실에서 게임을 하거나, 빈백에 누워 잠을 잤다.
확실히 게임회사답게 자유분방한 분위기다.
미팅실에서 잠시 기다리자 50대 초반 정도의 남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경을 끼고 멀대같은 느낌의 남자였다.
복장은 청바지에 셔츠.
그는 인사를 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얘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아이스스톰의 CEO 조나단 호퍼입니다.”
“반갑습니다, 한미루입니다.”
그가 아이스스톰 CEO가 된 건 몇 달 전의 일.
여기에는 몇 가지 사연이 있다.
원래 맥스비전 스톰의 CEO는 맥스비전 CEO인 데이브 굿실과 아이스스톰 CEO인 매튜 스트리블링이 공동으로 맡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스스톰 내에서 성추문 사건이 터지자 매튜 스트리블링이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고, 후임자로 그레이엄 아이거와 조나단 호퍼가 공동 CEO로 올라섰다.
그런데 그레이엄 아이거 역시 성추문에 연루되며 사임.
그래서 현재는 조나단 호퍼 혼자 CEO를 맡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사정들로 인해 세 기업 중 아이스스톰은 발언권이 크게 약화된 상태고, 사실상 맥스비전의 지휘를 받는 중이다.
우리가 악수를 끝낼 때까지도 선우는 가만히 서 있었다.
난 대신 소개해주었다.
“이쪽은 SW게임즈 대표 강선우입니다.”
난 어서 인사하라는 의미로 팔꿈치로 선우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그러자 선우는 두 손의 그의 손을 꼭 붙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존경합니다.”
“……예?”
“11살 때 처음 월드 오브 워로드를 해보고, 게임 개발자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한국에서는 15세 이상이었지만……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선우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낸 이유는 조나단 호퍼가 바로 월드 오브 워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기 때문.
그가 세계관을 기획했고, 개발 과정을 총괄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월드 오브 워로드는 세상에 나오지 못 했을 것이다.
호퍼 CEO는 기뻐하며 말했다.
“정말입니까?”
“예. 판타지아 테일즈도 월드 오브 워로드에 감명을 받아 만들었습니다. 만약 월드 오브 워로드가 없었다면, 판타지아 테일즈 역시 없었겠죠.”
“그렇군요. 저 역시 판타지아 테일즈R을 재밌게 해보고 있습니다.”
“예? 진짜요?”
“저뿐만이 아니라 직원들도 다 같이 해보는 중입니다. 보고 배울 게 많은 게임이니까요. 놀라울 정도로 잘 만든 MMORPG라고 생각합니다. 직원들 사이에서도 호평이 자자합니다.”
“아…….”
선우는 감동한 표정이었다.
하기야 어린 시절부터 존경하던 개발자가 자신의 만든 게임을 재밌게 하고 있다고 하니, 감동할 수밖에.
“안 그래도 만나게 되면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괜찮을까요?”
호퍼 CEO의 물음에 선우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얼마든지요.”
두 사람은 게임에 대해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눴다.
맵 디자인과 레벨 디자인에 대한 얘기까지 줄줄 나오는데, 왠지 쉽게 끼어들 분위기가 아니었다.
“…….”
이래서 대체 일 얘기는 언제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