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화. 아이스스톰 (1)
전용기는 시애틀 공항에 착륙했다.
보통 미국의 IT 본산이라고 하면 실리콘밸리를 떠올리기 쉽지만, 시애틀 역시 양대 산맥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미국 빅테크 기업 두 곳이 이곳에 본사를 두고 있다.
하나는 AMZ, 그리고 다른 하나는 NS다. 때문에 이들과 거래하는 IT업체들도 이곳에 본사를 뒀고, 스타트업 창업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덕분에 시애틀은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제치고 미국에서 가장 소득이 높고 집값이 높은 도시가 됐다.
난 일전에 왔던 JR블랙우드 호텔에 숙소를 잡고 짐을 풀었다.
“다녀올게.”
선우는 전용기에서부터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 잘 다녀와.”
난 선우를 호텔에 남겨두고, 호텔에서 준비해놓은 차에 올라탔다.
“NS 본사로 가주세요.”
* * *
회귀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TV에서나 보던 유명인을 실제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사티아 샤말란입니다.”
난 정중하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미루라고 합니다.”
키는 약 175센티 정도.
체구는 그리 크지 않았고, 머리는 완전히 벗겨져 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둥근 안경을 썼다.
마치 마하트마 간디를 연상케 하는 외모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인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도인이다. 지금은 귀화해 미국인이 되었지만.
이게 미국의 대단한 점 중 하나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국적과 인종을 가리지 않으니까.
한국으로 치면 베트남 직원이 유성전자 회장직에 오르는 셈이다. 언젠가는 정말 그런 일이 생기려나?
어쨌거나 샤말란이 CEO가 된 건 신의 한 수였다.
그는 무너져가는 NS를 다시 정상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NS는 엔플과 AMZ의 뒤를 이어 시총 1조 달러를 달성했고, 현재는 엔플과 시총 1위 자리를 놓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눈 다음 자리에 앉았다.
난 상대를 보며 말했다.
“오래전부터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쓰신 책도 매우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내 말에 그는 기꺼워했다.
“정말인가요?”
“예. 어렸을 때는 크리켓 선수가 되고 싶으셨다고.”
자서전에서 그는 어린 시절 전혀 특별하지 않았고, 그저 크리켓을 좋아하는 지극히 평범한 소년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거기서 몇 페이지만 넘기면, 아버지가 사준 컴퓨터를 만지더니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NP-완전 문제, 관계 대수, SQL프로그래밍 등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
대체 뭔 평범한 소년이 그런 걸 연구하나?
샤말란 CEO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듯 말했다.
“맞습니다. 한때는 크리켓이야말로 제 인생의 전부였죠.”
크리켓은 야구와 비슷한 스포츠.
한국에서야 이름조차 생소한 스포츠지만, 세계적으로 크리켓의 인기는 상당하다.
이 편지는…… 아니, 이 스포츠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식민지에 전파됐고, 영연방 국가들 사이에 인기 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
하는 나라가 얼마 없지 않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따지면 그건 야구도 마찬가지.
일단 인도가 하는 것만으로도 세계 인구 5분의 1은 한다고 봐도 좋다.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는 국민 스포츠나 다름없으며, 두 나라가 크리켓 경기를 벌일 때면 월드컵 결승전 수준의 응원이 펼쳐진다.
크리켓 선수들 역시 스포츠 스타 같은 대접을 받고 있고.
“어째서 그만두신 건가요?”
“재능이 없었으니까요. 만약 재능이 있었다면 정말로 크리켓 선수가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랬으면 어땠을지 상상을 해보곤 합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지 않은 길이군요.”
샤말란 CEO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한 대표는 만약 컨티뉴 캐피탈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했을 것 같습니까?”
난 농담처럼 말했다.
“글쎄요. 아마 치킨가게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하! 치킨을 매우 좋아하시나 보군요.”
“예. 먹는 것도 좋아하고 만드는 것도 좋아합니다.”
나름 재밌었다. 장사도 잘됐고.
나중에 은퇴해서 할 거 없으면, 치킨가게나 하나 차려볼까?
“컨티뉴 캐피탈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좋은 얘기였으면 좋겠네요.”
그는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클라우드 부문에서 스노우크래시의 성장세가 무섭더군요.”
클라우드 시장은 원래 2강 1중 체제였다. 그런데 스노우크래시가 치고 올라오며, 현재는 2강 2중 체제로 바뀌었다.
뭐, 나중에 1강 3중 체제로 바뀌지만. 여기서 1강은 당연히 스노우크래시.
샤말란 CEO는 농담처럼 말했다.
“이번에 게임스타트를 인수했으니, 이제 NS와도 파트너가 된 셈이로군요.”
NS는 소뉴와 린텐도와 함께 콘솔 3대장으로 게임스타트의 주요 거래처다.
“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클라우드 부문에서 경쟁자긴 해도 그 외에는 딱히 부딪힐 일이 없다. 인앱결제 수수료를 두고 벌어진 소송에서 NS가 레전드게임즈의 편을 들어주기도 했고.
“게임퍼스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매우 신선한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게임퍼스트는 매달 10~15달러를 내면, 입점해있는 게임들을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는 게임 구독형 서비스.
비슷한 서비스를 하던 스테피아는 망했고, 엔플의 바자르도 큰 재미를 못 보고 있지만, NS는 게임퍼스트를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
현재 가입자 수는 약 2천만 명으로, Z박스 콘텐츠 매출 전체의 15퍼센트를 차지한다.
“그래서 NS에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대표님께 제안 드릴 게 한 가지 있어서요.”
“제안이라……. 어떤 내용일지 기대가 되는군요.”
난 돌리지 않고 바로 말했다.
“맥스비전 스톰과 관련한 제안입니다.”
샤말란 CEO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맥스비전 스톰이요? 게임사 말인가요?”
“맞습니다.”
“그게 NS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모른 척하겠다는 건가?
“관련이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NS는 맥스비전 스톰을 인수할 계획이 있지 않습니까?”
“흐음,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 모르겠군요.”
NS의 맥스비전 스톰 인수는 컨티뉴 캐피탈이 게임스타트를 인수한 것만큼이나 비밀리에 진행 중인 사안이다.
나야 회귀했으니까 그렇다 쳐도, 이걸 알아낸 걸 보면 확실히 마이클 프레스턴도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사실이냐 아니냐 아니겠습니까?”
“사실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그는 CEO가 된 뒤 ‘게임에 올인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고래처럼 개발사들을 집어삼켰다.
맥스비전은 세계 최대의 독립 개발사.
웬만한 기업이 인수할 만한 규모가 아니다. 그러나 NS라면 얘기가 다르다.
샤말란 CEO는 잠시 뜸을 들인 다음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NS가 맥스비전 스톰을 인수한다 치죠. 그럼 컨티뉴 캐피탈의 목적은 뭡니까? 맥스비전 스톰 주식을 최대한 비싸게 파는 겁니까?”
뭐, 이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겠지.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아니요. 저희는 맥스비전 스톰 주식을 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요?”
“저희가 원하는 건 아이스스톰입니다.”
샤말란 CEO는 잠시 멈칫했다.
“아이스스톰이요?”
“예.”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맥스비전 스톰이 아닌, 아이스스톰만을 원한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맥스비전과 퀸닷컴은 NS가 인수하고, 아이스스톰만 저희에게 매각했으면 합니다.”
아이스스톰은 따로 물적분할을 할 필요도 없다. 지금도 자회사 형태로 존재하니까. 그걸 그냥 매각하면 되면 되는 것이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당황한 듯 보였다.
설마 이런 제안을 받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
“이유가 뭡니까?”
그야 내 친구가 갖고 싶어 하니까. 얘가 갖고 싶어 하면, 사줘야지 어쩌겠나?
“저희한테 필요한 기업이라서요.”
“그건 NS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난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냉정하게 말씀드리면, 어차피 NS가 혼자서 맥스비전 스톰을 인수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어째서 무리라는 겁니까?”
“FTC의 승인을 받기 쉽지 않을 테니까요.”
FTC는 연방거래위원회.
스타트업이라면 모를까, 상장기업은 돈만 있다고 인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합병이 독과점에 해당되지는 않는지 규제 기관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NS와 맥스비전 스톰 모두 전세계에 영업하는 글로벌 기업.
미국뿐 아니라, 각 나라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데, 이 과정이 쉬운 게 아니다.
“소뉴가 기를 쓰고 반대할 겁니다.”
게임 업계에서 NS 영향력 확대를 가장 두려워하는 곳이 어딜까?
바로 소뉴다.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린텐도와는 달리, 소뉴는 콘솔 시장에서 직접적인 경쟁자다. 그런 만큼 NS가 시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인수합병에 대해 드러눕고 반대할 것이다.
“그 점은 이미 예상하고 있습니다.”
설마 이 사실을 모르고 인수하려 했을까?
소뉴의 반대쯤이야 충분히 극복할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난 그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저희도 반대할 거라서요.”
“…….”
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러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아이스스톰을 넘기지 않는다면, NS도 인수를 못 하게 하겠다는 거군요.”
컨티뉴 캐피탈은 맥스비전 스톰의 3대 주주.
우리가 반대하고 나서면 NS 입장에서도 골치가 아파진다.
만약 우리가 인수전에 뛰어들기라도 하면 주가는 지금보다 치솟을 테고, 그럼 인수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다.
셋 중 하나를 넘겨주고 둘을 갖느냐, 아니면 셋 다 못 갖느냐, 라면 답은 정해져 있다.
난 생각에 잠겨 있는 샤말란 CEO에게 말했다.
“컨티뉴 캐피탈은 NS의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저희는 개발한 게임을 독점할 생각이 없습니다. 따라서 저희가 개발한 게임은 얼마든지 Z박스에 들여놓을 수 있겠죠. 반대로 레전드스토어에 게임퍼스트를 들여놓을 수도 있을 겁니다. 저희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레전드덱에는 레전드스토어만이 아니라, 다른 ESD를 설치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이를 깔기 위해서는 다른 운영체제를 설치해야 하는 만큼, 웬만큼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런데 레전드스토어에서 게임퍼스트를 실행시킬 수 있다면?
그럼 레전드덱 이용자들도 간편하게 게임퍼스트의 게임들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샤말란 CEO는 한참을 생각하는 듯했다.
“이건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듯하군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합니다.”
맥스비전 스톰은 아직 NS의 소유가 아니다. 그러니 맥스비전 스톰의 생각을 들어봐야겠지.
“오늘 찾아온 건 NS의 양해를 구하는 게 순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쪽에서 거절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럼 깔끔하게 포기하겠습니다.”
싫다는데 강제로 인수해봐야 효율이 나올 리 없다. 차라리 그 돈으로 다른 걸 하는 게 낫지.
설득을 하느냐 못 하느냐는 선우의 몫이다.
샤말란 CEO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짐 스펜서 사장이 전해달라고 한 말이 있었습니다.”
“어떤 건가요?”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Z박스에 판타지아 테일즈R이 들어오길 바란다고 하더군요.”
“저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샤말란 CEO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오늘 만남은 매우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있으면 좋겠군요.”
난 그 손을 맞잡았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