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화. 게임스타트 (1)
내가 게임스타트 본사로 들어서자 미켈 코헨 CEO는 정중하게 나를 맞았다.
난 그와 인사를 나누고 마주 앉았다. 그는 살짝 기대감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 찾아온 것은 게임스타트를 인수하기 위함.
현재 주가보다 높은 가격에 인수하는 것인 만큼, 대주주 입장에서는 환영할 수밖에.
이미 협상과 구체적인 계약조건은 데이비드가 다 끝내놓았고, 법률적인 검토까지 거쳐 계약서를 완성했다.
이제 서로 사인만 하면 끝이다.
“인수 제안을 놓고 여러 의견이 많았습니다.”
컨티뉴 캐피탈은 유명 사모펀드.
투자한 기업마다 대박을 터트렸다. 대체 왜 이런 곳에서 자신들의 기업을 인수하겠다고 나서니 의문이 들겠지.
“처음에는 반대 의견도 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예.”
그러나 인수금액을 듣고는 반대 의견이 쏙 들어갔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은 더 많은 돈을 제시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
코헨 CEO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어째서 저희 회사를 인수하시려는 겁니까?”
난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게임 분야에 많은 투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컨티뉴 캐피탈은 레전드게임즈와 블록게임즈의 최대주주죠.”
“그리고 조만간 콘솔을 출시할 예정입니다.”
코헨 CEO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전드덱 말이군요.”
시장에는 이미 게임을 하기 위한 다양한 UMPC가 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제대로 된 콘솔이라 보기 힘들고, 게임 시장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러나 레전드덱은 다르다.
레전드게임즈가 모바일과 PC를 아우르는 휴대용 게임기를 개발한다는 소식은 출시 전부터 꽤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정말로 시장을 뒤흔들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을지 기대하는 분위기다.
“비록 게임 유통의 중심축이 ESD로 넘어갔지만, 오프라인 매장은 여전히 중요한 공간입니다. 저희는 게임스타트를 콘솔 판매의 거점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게임스타트 매장을 통해 레전드덱을 판매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용 굿즈 판매와 다양한 이벤트를 벌일 생각입니다.”
이렇게 우리 전략을 다 말해줘도 되나 싶지만, 어차피 이건 우리가 인수했을 때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게임스타트를 인수하면, 컨티뉴 캐피탈은 개발사, 엔진 개발사, 퍼블리셔, ESD에 더해 오프라인 판매처까지 갖게 되는 셈이다. 이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면, 게임스타트는 지금보다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동종 업종 기업을 인수해 시장 지배력을 늘리거나, 연관 업종 기업을 인수해 두 회사 가치를 끌어올리는 M&A 전략을 볼트온(Bolt-on)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규모의 경제를 통해 비용은 절감하고, 매출을 극대화시키는 전략이다.
처음 인수 얘기가 나왔을 당시 주가는 12달러 수준이었다. 그러나 최근 상승해 주가는 18달러에 머물고 있다.
덕분에 시총 역시 10억 달러에서 15억 달러로 증가했다.
이를 주당 23달러에 인수하기로 이미 얘기를 끝냈다.
현재 주가도 고평가된 상황에서, 더 비싸게 쳐준다고 하니 팔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미 다른 대주주들의 동의를 얻었다.
남은 건 그의 결정뿐이다.
코헨 CEO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지난번 말씀드렸듯 다른 주주들에게도 동일한 매도 기회를 보장해주시기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한국에서야 대주주 지분만 비싸게 매각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미국은 그렇지 않다.
이 과정에서 소액주주들에게 피해를 끼치게 될 경우 소송을 얻어맞을 수 있으니까.
“인수 시점에서 해당 가격에 공개매수에 나서겠습니다.”
한마디로 소액주주들에게도 대주주와 똑같은 가격에 팔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겠다는 것. 이렇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인수가 성사되면, 그는 막대한 돈을 받게 될 것이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코헨 CEO는 주저 없이 사인했다.
이로써 컨티뉴 캐피탈은 게임스타트 전체 주식의 38퍼센트를 보유한 최대주주가 됐다.
* * *
난 게임스타트 본사를 나오며 데이비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류 받으셨죠?”
[방금 확인했습니다. 좀 아쉽군요. 시간이 충분했다면 더 낮은 가격에 인수할 수 있었을 텐데요.]
“뭘요. 지금 가격도 충분히 괜찮아요.”
사실 이번 인수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지금 가격의 몇 배를 준다고 해도 팔지 않았을 테니까.
[보스의 지시를 받고 나서 게임스타트에 대해 좀 분석해봤습니다.]
“어떤가요?”
[매출과 이익률 모두 하향 중입니다. 온라인 판매망을 구축하면서 비용이 증가하였는데, 효과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대감으로 주가는 올라 고평가된 상태죠.]
옷이나 전자제품의 경우 오프라인으로 구매하나 온라인으로 구매하나 실물을 받는 것은 똑같았다.
그러나 게임은 음원이나 영상처럼 실물 없이 데이터만 판매하는 게 가능하다.
이미 게임 유통의 중심축이 ESD로 옮겨간 만큼, 디스크를 온라인으로 판매한다고 해서 큰 효과를 보기는 힘들다.
“그래도 기존 사업과 연계하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거예요. 레전드덱 판매에도 도움이 될 테고.”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요?”
[좀 더 알아보니, 개인투자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주식이더군요. 일각에서는 밈 주식으로도 불리는 것 같던데.]
벌써 눈치챈 건가?
난 속으로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재밌는 일이 벌어질 거예요.”
이번에는 내가 일을 벌이는 게 아니다. 그저 앞으로 벌어질 일에 숟가락을 얹을 뿐.
그 모습을 지켜보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이다.
[알겠습니다. 뉴욕에는 언제 오십니까?]
“일단 캘리포니아에 들렀다 갈게요.”
* * *
월스트리트 타임즈의 기자 트리시 오코너.
그녀는 그동안 토머스 모터스 사태, 페이스노트 사태 등 여러 특종을 제일 먼저 보도한 것으로 알려진 유명 기자였다.
그녀가 쓴 기사 중에는 자신을 프랑스 상속녀라고 속이며, 뉴욕 상류층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다녔던 에밀리 클로에에 관한 얘기도 있었다.
트리시는 취재를 하며 알게 된 사실과 에밀리 클로에를 직접 인터뷰해 들은 이야기 등을 바탕으로 책을 집필했다.
제목은 <상속녀(The Heiress)>.
저자인 트리시 오코너는 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미국 주요 도시에서 사인회를 개최했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대형서점.
이곳에서 사인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서점 안은 물론, 밖까지 줄이 길게 늘어서는 바람에 직원들이 정리에 나섰을 정도다.
트리시는 자리에 앉아 인사를 나누고 책에 사인을 해주었다. 벌써 몇 시간째 사인을 했지만, 줄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슬슬 손목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대체 연예인들은 어떻게 그 많은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거지?’
진작 예정된 시간을 넘겼지만, 찾아와준 사람들에게는 전부 해주고 싶은 마음에 그녀는 힘을 내서 계속 사인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한미루라고 적어주세요.”
그 말에 트리시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았다.
그녀의 앞에는 익숙한 얼굴의 동양인 청년이 서있었다.
“아…….”
트리시는 놀라 소리를 지를 뻔하다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고 사인을 해주었다.
그는 사인을 끝마친 책을 받아가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 책 재밌게 읽었어요.”
그 말에 트리시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 *
사인회가 끝난 뒤.
난 JR블랙우드 호텔 바에서 트리시를 만났다.
그녀는 핀잔을 주듯 말했다.
“뭐예요? 올 거면 미리 좀 얘기해주지.”
“놀래켜주려구요.”
원래는 LA를 먼저 들르려고 했는데, 사인회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샌프란시스코로 왔다.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미안해요. 사과의 의미로 오늘 술은 제가 살게요.”
“흐응, 그럼 뭐…….”
우리는 잔을 부딪쳤다.
“뉴욕에는 언제 돌아가요?”
“취재차 온 거라서 며칠 더 머물다가 갈 예정이에요.”
“잘됐네요.”
“그런데 진짜로 제 책 읽었어요?”
“그럼요. 오면서 비행기 안에서도 계속 봤어요. 엄청 재밌던데요.”
“에이, 그 정도는 아닌데.”
내 말에 트리시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런 걸 보면 칭찬에 약한 타입이란 말이지.
“그러고 보니 에밀리 클로에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재판은 아직 진행 중이지만, 보석으로 풀려났어요.”
“정말요?”
“예. 방송 출연이랑 의상 협찬 관련해서 계약금이 들어온 덕분에 그동안 사기 친 돈을 전부 갚았거든요.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일단 유명해지면 돈이 되는 모양이에요.”
“…….”
대체 관종이란 무엇일까?
알다가도 모르겠다……가 아니라, 그냥 모르겠다.
“아! 지난번 얘기해 보니, 미루를 만나고 싶다고 하던데요.”
“저를요?”
“예.”
“왜요?”
“저도 모르죠.”
책이나 기사에는 가명으로 적었지만, 에밀리 클로에의 사기 행각을 밝혀낸 사람은 다름 아닌 나.
괜히 만났다가 뺨 맞는 거 아니야?
“책 엄청 잘 팔리는 것 같던데요.”
사인회 할 때 보니 매대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책이 순식간에 다 팔려나갔다.
트리시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출판사에서 들으니, 초판은 이미 매진돼서 재판에 들어갔대요.”
워낙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사건인 데다가 트리시도 유명 기자인 만큼, 출간 전부터 흥행이 예상됐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인기는 그 이상이었다.
‘상속녀’는 15개국에서 동시 출간됐고, 출간 직후 바로 AMZ 라이브러리 1위에 올랐다.
“돈 많이 벌었겠네요.”
트리시는 짐짓 턱을 치켜들었다.
“그럼요. 이제 저 부자예요.”
말은 이렇게 해도 트리시는 돈에 별로 구애받는 성격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생각하고, 평생 이를 쫓아다닌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로 자신의 일을 좋아하고 즐겼다.
이번에 책을 쓴 것도 돈 때문이 아닌, 쓰고 싶었던 이야기였기 때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걸 축하해요.”
잘나가는 기자에 잘나가는 작가라니.
그녀가 성공한 모습을 보니 내가 다 뿌듯하다.
“고마워요. 그래서 미국에는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일하러 왔죠.”
그러자 트리시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무슨 일을 할 건데요?”
벌써부터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다.
“게임스타트라는 기업 알아요?”
내 물음에 트리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숍 아니에요? 쇼핑몰이나 엘마트 같은 곳에 입점해 있는.”
“알고 있네요. 가봤어요?”
“어렸을 때 숀 따라서 두세 번 정도요. 학교 다닐 때 보니, 남자애들은 많이 가는 것 같던데. 그런데 거기는 왜요?”
“아직은 오프 더 레코드인데, 컨티뉴 캐피탈이 이번에 그곳을 인수했거든요.”
“정말요? 어째서요?”
그냥 알려줘도 되겠지만, 그럼 재미없겠지?
난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지금부터 한번 열심히 취재해봐요. 특종을 건질 수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