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화. 개혁 (1)
재벌그룹 회장쯤 되면 각자의 일로 바빠 만나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유재호는 기업인 간담회가 끝난 뒤 친분이 있는 회장들과 따로 얘기하는 자리를 가졌다.
“식사를 잘한 덕분에 얘기가 아주 잘 풀렸군요.”
“설마 입맛 까다롭기로 유명한 부스코프스키 위원을 만족시킬 줄은 몰랐습니다.”
다른 회장들의 말에 유재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놀랐습니다.”
처음 닭한마리집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더할 나위 없이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취향을 정확하게 파악해 음식점을 선정한 사람은 바로 한미루.
당연하게도 재계 사람치고 한미루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동안 이름은 질리도록 들었지만, 직접 만나는 건 대부분 오늘이 처음이었다.
이전이었다면 누군가는 적개심을 나타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그만큼 한미루가 한국 재계에 끼치는 영향력은 지대했다.
그로 인해 DA금융그룹의 후계자가 바뀌었고, 한정그룹이 해체됐다. 놀랍게도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LD스튜디오, GL그룹, 모카뱅크…… 심지어는 치킨 프랜차이즈들마저 폭락시켰다.
반면 혜택을 본 곳도 많았다.
화안에너지는 세계 최대 수소에너지 기업으로 성장했고, S마트는 통통치킨 판매 덕분에 매출이 10퍼센트 넘게 늘었다.
‘민아름과는 협력해 MFW를 만들었고.’
‘이번에 DA금융그룹 성윤아와 핀테크 사업을 같이한다고 하던데.’
그와 손을 잡은 사람들은 전부 대박이 났다.
그중 가장 많은 혜택을 본 것은 유성그룹.
원래 재계 서열 1위였던 유성그룹은 시총이 두 배 가까이 오르며, 다른 9대 그룹의 시총을 합한 것보다도 덩치가 커졌다.
차태완 회장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유 회장님께서 보시기에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글쎄요.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힘들군요.”
유재호는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제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미래에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한미루는 스노우 크래시를 통해 미래 산업의 키를 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재호는 한미루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 자리에서 동우정밀 인수를 제안했다. 말이 좋아 인수지, 사실상 자신이 헐값에 산 BW를 유성전자가 제값에 사달라고 부탁한 거나 다름없었다.
만약 이를 거절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차태완 회장을 찾아갔을 것이다.
한국에서 동우정밀을 인수할 곳은 유성전자가 아니면 LK닉스뿐이니까.
‘그럼 지금의 인연도 없었겠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그를 만난 것이 회장이 되고 나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
덕분에 유성전자는 데이터센터라는 새로운 먹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단지 돈을 버는 것을 떠나, 함께 일을 하면 마치 모험을 떠나는 것 같은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DS그룹 진문동 회장이 슬쩍 물었다.
“재벌을 싫어한다는 얘기가 좀 있던데요.”
유재호 회장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딱히 적대시하는 건 아닙니다. 그랬다면 유성그룹과 협력하는 일도 없었겠죠.”
이제까지 무너뜨린 기업이 한둘이 아닌 만큼, 재벌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껄끄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사실 직접 공격을 당하지 않았다 해도 다들 알게 모르게 피해를 입었다.
물적분할 후 상장은 지배력은 유지할 수 있으면서 투자금을 모집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동안 재벌들이 선호해 왔다.
그러나 GL엔텍 사태 이후 분할상장은 사회적 문제가 됐고, 더 이상 계열사를 쪼개 상장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그나마도 상장을 준비 중이던 계열사들조차 모카뱅크 사태로 인해 공모주 시장이 얼어붙는 바람에 줄줄이 밀리거나 취소됐다.
때문에 몇몇은 속으로 불편한 심기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당사자 앞에 대고 말을 못 했을 뿐이지.
“그가 어떤 미래를 그리는지 아직 모르지만…….”
유재호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 미래에 함께하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 * *
집에 돌아오니 금발머리 여자애가 거실에 있었다.
마치 자기 집인 양 로마 귀족 식사 자세로 소파에 누워 TV를 보는 그녀의 이름은 한세나. 하루에도 열두 번쯤 숨기고 싶은 내 동생이다.
내가 다가서자 세나는 그 자세에서 손을 흔들었다.
“아! 오빠 왔어?”
예고도 없이 집에 쳐들어온 게 한두 번이 아닌지라,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
그보다 신경이 쓰이는 것은 복장.
위는 펑퍼짐한 후드티지만, 아래는 레깅스다. 엉덩이와 다리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그 복장은 뭐지?”
“레깅스 처음 봐?”
“그러니까 그걸 왜 입었어?”
“나 요즘 소진이랑 필라테스하거든.”
“갑자기?”
“응. 몸매 관리 좀 하려구.”
몸매 관리보다 두뇌 관리를 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만.
“그럼 운동 끝났으면 갈아입어야지. 설마 그거 입고 밖에 돌아다닌 건 아니지?”
“어차피 차 타고 왔는데. 그리고 요즘 애들 레깅스 잘만 입고 다니거든.”
이게 틀린 말은 아니다.
레깅스는 이제 피트니스 의류가 아닌, 패션 아이템이자 일상복. 미국에 가보면 여자애들이 무슨 교복처럼 입고 다닌다.
한국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길에서 레깅스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보는 게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내 여동생은 안 된다.
“레깅스는 운동할 때만 입도록.”
그러자 세나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혹시 조선시대 사람이세요?”
“음…….”
아무래도 회귀하기 전의 나이가 있다 보니, 약간의 꼰대 마인드가 탑재됐을 수는 있다.
“그런데 여기는 왜 왔어?”
“엄마가 밑반찬 좀 가져다 놓으라고 해서. 냉장고에 넣어놨으니 꺼내 먹어.”
“집에서 잘 안 먹는다니까.”
“몰라. 엄마가 무조건 가져다 놓으래.”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운전해서 왔더니 배고파.”
“어쩌라고?”
“치킨 좀 만들어주면 안 돼?”
“……시켜 먹어.”
여기가 무슨 치킨집인 줄 아나?
세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칫! 오빠가 해주는 게 더 맛있는데.”
그래도 이 얘기를 들으니 왠지 어깨가 으쓱한다.
한때 치킨 프랜차이즈 가맹점주로서 맛없는 치킨을 만드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지금도 평행세계 어딘가의 나는 계속 치킨을 튀기고 있지 않았을까?
“치킨 해줘.”
“그게 무슨 라면 끓이는 것처럼 간단한 줄 알아?”
나름 손이 많이 가는 요리다.
일단 닭을 사서 염지를 하고 재워놔야 하는데, 지금은 생닭도 없다.
“그럼 어쩔 수 없네. 시켜 먹자.”
“몸매 관리한다고 필라테스한다며?”
“그래서?”
“그럼 샐러드를 먹어야 하는 게 아닐까?”
“뭔 소리야? 근육 생기게 고기 먹어야지.”
“…….”
으음, 나름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 반박하기 힘들군.
나도 아직 저녁 먹기 전이라 두 마리 시켰다. 옛정을 생각해서 특별히 한정치킨으로 주문했다.
치킨이 도착하자 우리는 TV를 보며 먹기 시작했다.
이러고 있으니 어렸을 때가 생각난다.
집에 둘만 있을 때 무슨 이유 때문인지 동생이랑 크게 싸웠다. 울린 게 미안해서 용돈 털어서 치킨을 사주자, 세나는 펑펑 울면서도 잘만 먹었다.
그때는 귀여웠었는데.
“부모님은 잘 계시지?”
“그럼. 엄마가 오빠 집에 좀 오래.”
“바빠서 못 간다고 전해드려.”
“뭐 하는데?”
“인터내셔널 캐피탈 다이렉트 인베스트먼트.”
“아아, 그렇구나.”
표정을 보니 못 알아들은 게 분명하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있고?”
“물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고?”
“당연.”
“영어 스터디도 계속하고 있고?”
“오브 코오스.”
치킨을 뜯어 먹으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눈곱만큼의 신뢰도 느껴지지 않는다.
“역시 치킨은 오빠가 해준 게 더 맛있네.”
이 얘기를 들으니, 왠지 치킨부심이 샘솟는다.
언제 날 잡아서 한번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맛있었어?”
“응. 내가 애들한테도 엄청 자랑했어. 소진이도 또 먹고 싶다고 하고. 아! 지유 언니도 먹고 싶대.”
“……응?”
여기서 지유가 왜 나와?
“너 지유랑 연락해?”
“응. 지난번 만났을 때 연락처 받았잖아.”
“아니, 그거야 그냥 예의상 가르쳐준 거지. 눈치 없이 바쁜 애를 왜 귀찮게 해?”
“뭐래? 지유 언니가 먼저 연락했거든. 오빤 알지도 못하면서.”
“진짜?”
“봐봐.”
세나는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보니까 정말로 지유가 먼저 연락했다.
안부를 묻거나 잡담을 하고, 촬영장 사진이나, 다른 출연자와 찍은 사진 등을 보내줬다.
“헐, 진짜네.”
“언니가 연예인들 사인도 받아줬어. 촬영 끝나고 나면 애들이랑 다 같이 지유 언니 보기로 했어. 밥 사준대.”
“…….”
누가 들으면 친언니인 줄 알겠는데.
겨우 한 번 봤을 뿐인데 이렇게 친해지다니. 이쯤 되면 친화력이 무슨 쿼카 수준이다.
세나는 괜히 턱을 치켜들었다.
“봤지? 내 인기가 이 정도야.”
“으음.”
그러고 보면, 민아름, 성윤아, 트리시 역시 세나를 챙겨주는 듯하다.
혹시 얘가 언니에게 인기가 많은 타입인가?
뉴스를 보는데, 세나가 말했다.
“뉴스 재미없는데, 다른 거 보면 안 돼?”
“응. 안 돼.”
“칫.”
나도 어렸을 땐 어른들이 왜 매일 뉴스를 챙겨보나 이해를 못 했는데, 이 나이 돼보니 뉴스가 제일 재밌다.
이 좁은 땅에서 매일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뉴스에서는 남궁석 대통령 지지율 관련 기사가 나왔다.
현재 지지율은 30퍼센트 수준.
허니문 기간인 점을 감안하면 낮은 편이다.
그 이유는 야당인 새한국당은 물론이고 여당인 우리국민당까지도 비협조적이라 내각 구성에 난항을 겪고 있기 때문.
우리국민당의 주류라 할 수 있는 임창식 계파가 대통령과 각을 세우며, 여당은 현재 분당 얘기까지 거론되는 상황.
세나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정치인들은 왜 맨날 싸우는 거야?”
“그게 본인들의 역할이니까.”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정치란 서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맞춰가는 과정. 그러다 보면 싸움도 하고 협상도 하고 하는 거지.
원래 정치인들은 싸우면서 크는 법.
반면 한 사람의 생각이 모두의 생각인 독재국가는 싸울 일도 없다.
“아하! 그렇구나.”
“맨날 드라마랑 연예 기사만 보지 말고, 정치 뉴스 좀 보고 그래.”
“와! 오빠 되게 꼰대 같아.”
“…….”
나 정도면 아직 MZ 아닌가?
“그리고 나도 정치 뉴스 보거든.”
“그래? 최근에 본 뉴스가 뭔데?”
“으음.”
세나는 한참 고민하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대통령이 치매라는 기사 봤어.”
“……응?”
“그리고 대선은 부정선거라는 기사도. 투표함을 바꿔치기했다나 뭐라나?”
“…….”
이게 대체 뭔 소리야?
난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 그런 건 어디서 봤는데?”
“아까 보니까 에이튜브 인기 동영상에 있던데. 섬네일에 막 ‘충격!’, ‘경악!’, ‘끝났다’ 이런 거 적혀 있고.”
세나는 스마트폰으로 에이튜브를 켜서 보여주었다.
[충격! 남궁석 대통령, 말을 더듬는 건 치매 초기 증상!]
[경악! 남궁은 중국식 성. 남궁석 아버지 조선족!]
[대선, 부정선거 증거 나왔다! 끝났다!]
[남궁석 게 섰거라! 대통령 탄핵 임박!]
“…….”
섬네일만 봐도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이쯤 되면 에이튜브가 세상을 망치고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