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화. 소울푸드 (5)
부스코프스키 위원과 간담회가 끝난 뒤.
자리에 모인 기업인들은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말단 실무자도 아니고, EU의 차기 수장을 직접 만나 얘기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이번에 각 그룹의 의견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다.
유성그룹은 린카스픽의 판매 허가와 바이오와 반도체 투자에 대해, LK그룹은 반도체와 배터리에 대해, GL그룹은 전자와 배터리, 화안그룹은 수소 에너지, 대연차는 전기차와 수소차 등등.
유재호 회장은 나에게 말했다.
“덕분에 간담회가 잘 끝났네요. 감사합니다.”
난 겸손하게 말했다.
“제가 한 일이 뭐 있나요?”
그저 음식점을 소개했을 뿐이다.
뭐, 그게 가장 큰 역할이긴 하다만.
간담회가 예정 시간을 훌쩍 넘어 세 시간이나 진행된 건 부스코프스키 위원이 배가 불렀기 때문.
만약 중간에 배가 고팠다면, 일찌감치 자리가 마무리됐겠지.
또한 배가 부른 상태에서 들은 얘기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기 마련. 맛있는 밥을 먹고 난 직후에 싫은 소리 하기는 힘드니까.
이래서 사회생활에 있어서 접대와 만찬이 중요한 거다.
차태완 회장과 민기진 전무 등 다른 사람들도 나에게 말했다.
“이번에 큰 도움을 받았네요.”
“이번 간담회를 위해 애써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허민웅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이제 뭐 할 거야?”
“글쎄요.”
“저녁 먹으며 술 한잔하자. 형이 좋은 곳 하나 알아놨어.”
“일정 없어요?”
“에이, 너 만나는 날인데 싹 비워놨지.”
어차피 돌아가도 할 일이 없다.
내가 없어도 우리 회사는 잘 굴러가니.
우리 대화를 듣던 한 사람이 슬쩍 다가와 말했다.
“혹시 식사하러 가실 거면, 저도 좀 껴도 되겠습니까?”
이렇게 말한 사람의 이름은 장유식.
대연차그룹 장희수 회장의 장남이자 후계자다. 현재는 부회장으로 있다. 참고로 그의 동생인 장유선은 일전에 파티장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허민웅은 농담처럼 말했다.
“부회장님께서 쏘시는 겁니까?”
그러자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혹시 몰라 법인카드를 들고 오길 잘했네요.”
그러자 나이가 젊은 편에 속하는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다가왔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희도 같이 가도 될까요?”
“괜찮으시면 저도…….”
“제가 사고 싶습니다.”
“…….”
왠지 다들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느낌인데.
흠, 재벌들 사이에서 내 인기가 이 정도였나?
위기감(?)을 느꼈는지 허민웅은 괜히 내 옆에 바짝 붙었다. 마치 다른 사람들에게 나랑 가장 친한 건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모습이다.
난 동호 선배에게 물었다.
“선배는 어쩔 거예요?”
그러자 동호 선배는 민기진 전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난 형님이랑 따로 식사하기로 해서.”
“…….”
언제 봤다고 벌써 형님이야?
뭐, 처가에 잘하는 건 중요하지.
동호 선배는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엔플을 그렇게 까도 되는 거야? 걔들 귀에 들어가면 가만히 안 있을 것 같은데.”
“알면 좀 말리지 그랬어요?”
“……응?”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신경 안 써도 돼요.”
그 이유는 내가 엔플의 눈치따위는 보지 않는 상남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사이가 안 좋기 때문.
어차피 친하게 지내기는 글렀다.
그러니 때릴 수 있을 때 최대한 때려놔야겠지.
* * *
‘원조 정통 닭한마리집’의 주인 김숙자.
그녀는 며칠 전 일이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단체예약을 받았더니 뉴스에서나 보던 재벌 회장들이 우르르 몰려올 줄이야.
게다가 같이 온 외국인은 차기 EU 집행위원장.
뭔지는 잘 몰라도 대충 유럽 대통령 비슷한 거라고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부스코프스키 위원은 공항으로 가기 전 수행원들을 데리고 일찍 와서 닭한마리를 먹었고, 레시피를 받아 갔다.
또다시 2인분인 닭한마리를 혼자서 해치운 그는 김숙자에게 말했다.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다음에 한국에 오면 꼭 다시 들리겠습니다. 레시피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통역을 통해 전해 들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말로 감사하죠. 언제든 다시 와주세요.”
그녀는 함께 사진을 찍고, 사인도 받아두었다.
이 얘기를 주위 사람들에게 하니, 다들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하기야 나도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
이때까지만 해도 그저 신기한 경험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놀랄 일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부스코프스키 차기 EU 집행위원장, 한국 기업인들과 만찬]
[만찬 장소는 광화문 닭한마리 집으로 알려져]
[간담회 예정보다 긴 세 시간 동안 진행……]
부스코프스키 위원은 미식가로 유명했다.
때문에 기자들은 그가 닭한마리를 맛있게 먹었다는 것에 주목해 기사를 썼고, 이는 외신에도 보도됐다.
국뽕 에이튜버들이 이런 좋은 기사를 놓칠 리 없었다.
에이튜브에는 관련 영상들이 주르륵 올라왔다.
[차기 EU 집행위원장, 한식은 세계 최고의 요리!]
[경악! K-푸드에 중국이 무릎을 꿇고, 일본이 오열하다!]
[독일 정치인의 충격 선언! 오늘부터 나는 한국인이다!]
[충격! 유럽 시민들, 우리도 K-푸드를 먹게 해달라며 시위!]
[독일 전 장관이 K-푸드를 먹고 감동의 눈물을 흘린 사연은?]
영상과 기사에는 댓글이 주르륵 달렸다.
-아니, 뭔 독일인이 닭한마리를 먹고 눈물을 글썽거려? 국뽕도 정도껏 해야지.
-놀랍게도 진짜라는 얘기가 있음 ㅋㅋ
-직원이 우는 거 봤대.
-허얼? 레알?
-아니, 차기 EU 집행위원장이라며? 그런 사람을 저런 곳에 데려가도 되는 거야?
-근데 존나 맛있게 먹음. ㅋㅋㅋ
-레시피 받아 갔다는 얘기가 있음. 나중에 퇴임하면 고향에 닭한마리집 차리려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차기 EU 집행위원장이 누군지 별 관심이 없다. 그가 뭘 맛있게 먹었는지도 역시 관심 밖의 일.
하지만 재벌 회장에게는 매우 관심이 많다.
유재호 회장과 차태완 회장 등이 맛있게 먹었다는 얘기에 모두가 놀랐다.
-저기가 그렇게 맛있나?
-대체 얼마나 맛있기에 그러지?
-유재호 회장이 극찬했다는데, 진짜인가?
-가끔 치킨도 시켜먹는다던데, 닭 엄청 좋아하나 보네.
-ㅋㅋㅋ 재타이거도 우리 민족이었음~
-저 가게 유명한 곳인가?
-ㄴㄴ 그냥 동네 맛집인가 봄.
-회사 근처니 한번 먹으러 가봐야겠다. 먹고 와서 후기 남김.
뉴스와 기사가 나자, 점심시간 한참 전부터 근처 직장인들이 우르르 몰려 줄을 섰고, 가게 문이 열리자마자 물밀 듯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닭한마리 주세요!”
“이모! 여기 주문이요!”
“얼른 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100석이나 되는 테이블은 순식간에 꽉 들어찼다.
한발 늦게 온 사람들은 자리가 날 때가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 반조리 상태로 테이블에 올라오는 닭한마리 특성상 회전율이 빠른 편이었다. 애초에 닭한마리는 빨리 조리하고 빨리 먹기 위해 토막 내 끓이는 것에서 유래한 음식이다.
며칠 동안은 점심 손님만으로 재료가 떨어져 저녁 장사를 못 할 정도였다.
단체예약 역시 밀려들었다.
주변 회사들이 회식 장소로 잡으며, 두 달치 예약이 꽉 들어찼다.
김숙자는 끝도 없이 늘어선 줄과 불난 듯 울리는 전화기를 보며 행복한 비명을 내질렀다.
* * *
레전드게임즈가 엔플과 구블을 반독점법 위반으로 제소하며 시작된 세기의 소송전은 현재도 진행 중이었다.
인앱결제, 앱마켓 독점 등, 쟁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소송은 미국에서 진행되는 중이지만, 이를 시작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할 것 없이 유럽 전역에서 비슷한 소송이 벌어졌다.
엔플은 로펌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출하며 소송에 맞섰다. 만약 소송에서 패한다면 막대한 손실이 발생할 테니, 반드시 이겨야 했다.
탐 키튼은 관련 내용을 직접 보고 받으며 챙겼다.
그러던 도중 차기 EU 집행위원장으로 내정된 부스코프스키 위원이 한국에 들러 기업인들을 만난다는 뉴스를 접했다.
어차피 형식적인 만남이겠지만, 왠지 신경이 쓰였다.
그 이유는 가장 껄끄러운 존재가 현재 한국에 있기 때문.
‘설마 한미루랑 만나지는 않겠지?’
그런데 놀랍게도 간담회 명단에 한미루가 끼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며칠 후.
관련 내용을 보고 받은 탐 키튼은 깜짝 놀랐다.
“이게 정말인가? 정말로 이런 말을 했다고?”
“그, 그렇습니다.”
한미루는 엔플과 구블의 반독점법 위반과 탈세 문제를 집중 지적하며, 이를 막기 위한 법안의 구체적인 내용과 처벌 조항까지 제시했다.
이 정도면 거의 본인이 법안을 만드는 수준이었다.
심지어는 하다 하다 충전 포트까지 걸고 넘어졌다!
사실 엔플의 독자 규격인 나이트링은 C타입에 비해 장점이 하나도 없다. 호환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충전 속도도 느리고, 데이터 전송 속도도 느리다.
그럼에도 엔플이 이 규격을 고집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바로 관련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에게 라이선스 비용을 받기 위함이다.
어차피 대세는 C타입이다.
굳이 법이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엔플은 나이트링으로 뽑아 먹을 만큼 충분히 뽑아 먹은 다음, 점진적으로 C타입으로 바꿀 예정이었다.
그런데 만약 EU가 규제에 나선다면, 그에 맞춰 C타입 탑재 시기를 앞당겨야 할 것이다. 어쩌면 당장 앞으로 출시할 제품들부터 적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엔플은 물론 협력업체들까지도 향후 로드맵을 전부 수정해야 할 판이다.
안 그래도 EU 집행위원회는 이전부터 반독점법 위반과 탈세 문제를 놓고 엔플과 구블을 조사 중이었다.
미국이야 굳이 다른 나라에서 돈 잘 벌어오는 자국 기업을 제재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유럽은 그렇지 않다.
규제 법안이야 어차피 유럽의회가 결정할 문제지만, EU 집행위원장의 발언과 행동은 여기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U라는 거대한 칼을 휘둘러 엔플에 타격을 입히겠다는 속셈인가?’
문제는 이 방식이 엔플에게는 치명적이라는 것.
한국이 특정 법을 만들어 규제를 한다고 해서 모든 나라가 따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EU의 규제는 국제 표준으로 통한다.
만약 EU가 정말로 충전 단자 규격을 통일시키고, 디지털세를 징수하고, 앱마켓 독점 등을 금지하는 법을 만든다면, 모든 OECD 국가들이 이를 따를 가능성이 크다.
엔플이 지금과 같은 수익을 낼 수 있는 것은 독점적 지위를 활용해 금액은 올린 반면, 세금은 적게 냈기 때문.
따라서 가격을 낮추거나 세금을 제대로 내야 하면, 이는 곧 엔플의 수익 감소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이 손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대체 누가 천하의 엔플을 상대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을까?
탐 키튼은 일전에 만났던 한국인 청년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이런 개자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