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화. 소울푸드 (4)
식사를 맛있게 했기 때문인지, 간담회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연회장에는 와인과 차, 그리고 간단한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다 같이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부스코프스키 위원은 잔을 들며 말했다.
“한국은 EU와 긴밀한 협력을 맺고 있고, 한국 기업은 EU의 매우 중요한 파트너입니다.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원래 한국 기업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장은 중국이었다.
한때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자 세계의 시장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세계의 공장이자 세계의 시장이다.
그러나 이전과 크게 달라진 점이 하나 있으니, 그건 바로 자신들이 만들어 자신들이 소비하는 시장으로 변했다는 것.
다시 말해 중국은 과거 수입하던 제품들을 자급자족하는 중이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중국으로의 수출액이 계속 줄어드는 추세인 반면, EU로의 수출액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EU 입장에서 한국은 반도체, 배터리 등 주요 공급망 중 하나.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역시나 친환경과 지속 가능한 발전 등이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RE100, 그린에너지, 수소 발전, 친환경 원전, 전기차, 수소차 등등.
다들 열의를 갖고 한마디씩 하다 보니, 어느새 나한테 발언권이 왔다.
부스코프스키 위원은 웃으며 말했다.
“컨티뉴 캐피탈 측 얘기도 한번 듣고 싶군요.”
“예.”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이러고 있으니, 신입사원 때 전무 앞에서 발표하던 게 떠오른다.
그때는 엄청 떨었던 것 같은데.
“자연환경은 우리가 과거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자, 미래 세대에 물려줘야 할 유산입니다. 이제 환경보호는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기업이 자율적으로 따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곳들도 있는 만큼 법으로 강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몇몇 회장들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EU의 친환경 규제로 인해 한국 대기업들이 골머리를 앓는 중이기 때문.
이러한 환경규제는 아무래도 디지털 산업보다는 제조업에 훨씬 치명적이다.
한국은 제조업 중심의 기업들이 많아서 큰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컴퓨터와 서버가 에너지를 많이 쓰겠는가, 용광로를 끓이는 제철소가 에너지를 많이 쓰겠는가?
난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했다.
“특히 전자기기 폐기물은 매년 크게 늘어나고 있고, 이는 환경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내 말에 부스코프스키 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디지털 폐기물은 심각한 문제죠.”
이를 해결하기 위해 EU는 각종 법안을 만들었다.
친환경설계의무화지침(EuP)을 만들어 설계와 제조 단계에서부터 납, 수은, 카드뮴 등 유해금속 사용을 금지하고, 수리를 쉽게 할 수 있도록 강제했고, 폐전자제품처리지침(WEEE)을 만들어 제조사가 폐기물에 대해 책임지고 수거해 처리하도록 했다.
이러한 규정을 따르지 않으면 아예 EU 내에서 제품을 판매할 수 없다.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제품은 스마트폰 등의 휴대용 디바이스입니다. 하지만 독자 규격을 고집하는 기업으로 인해 소비자들은 여러 개의 충전기를 구매해야 하는 불편을 겪고 있고, 다량의 디지털 폐기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환경보호를 위해 이러한 문제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옆에 있는 동호 선배가 입을 쩍 벌리는 게 보였다.
딱히 특정 기업을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어떤 기업을 말하는지 눈치챈 듯했다.
난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친절하게 기업 이름을 말해주었다.
“거의 모든 기업이 충전 규격으로 C타입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는 라이선스 비용 없이 누구나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 범용 규격입니다. 하지만 유독 엔플만은 자사 제품에 독자 규격인 나이트링을 채택해 소비자의 선택권을 침해하고 환경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비공개 만남이라 해도 듣는 귀가 한둘이 아닌 만큼 여기서 오간 대화는 외부로 새나갈 수밖에 없다.
그 어떤 기업도 빅테크 기업들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때문에 차기 EU 집행위원장 앞에서 엔플을 직접 거론하며 비판한다는 것은 한국 재벌들 입장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
나 쯤 되니까 하는 거다.
부스코프스키 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제는 유럽의회에서도 여러 차례 논의된 사안입니다. 현재 기업들에게 충전 규격을 C타입으로 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권고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엔플이 독자 규격을 고집하는 이유는 협력사들에게 막대한 라이선스 비용을 받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를 놔둔다면 다른 기업들도 독자 규격을 채택할 테고, 이는 극심한 환경파괴로 이어지게 될 겁니다.”
사실 말은 이렇게 해도 엔플 외에 누가 독자 규격을 만들겠는가?
다른 기업이 엔플처럼 독자 규격을 밀 수 있을 만큼 판매 규모와 충성고객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요?”
“모바일 기기 충전방식을 통일하도록 강제하는 법안이 필요합니다.”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난 계속해서 말했다.
“엔플과 구블은 모바일 운영체제와 앱마켓을 독과점하며 전세계 수많은 개발사에게 마치 세금처럼 30퍼센트의 수익을 거둬가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경쟁 OS와 애플리케이션 회사들에게 차별적인 조치를 취함으로써 이들의 발전과 시장 진입을 가로막고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이는 개발자는 물론이고, 소비자에게도 악영향을 끼치는 행위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유럽의 모든 개발사들은 영원히 엔플과 구블에 종속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흠, 어떤 부분에서 차별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겁니까?”
“먼저 엔플은 자사 NOS에 엔스토어를 통하지 않은 외부 앱 설치를 허용하지 않고 있고, 구블의 경우에는 안드로메다 기기에 자신들이 만든 구블 보이스, 구블 지도, 구블 포토, 구블 브라우저, 큐메일, 에이튜브, 플레이마켓 등의 선탭재를 강제하는 방식으로 경쟁 애플리케이션 기업들의 성장과 시장 진입을 불법적으로 방해하고 있습니다.”
엔플과 구블의 모바일 시장 독과점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건 한국뿐만이 아니다. 이는 유럽 역시 마찬가지.
독일은 모두가 알다시피 벤츠, BMW, 아우디, 포르쉐 등이 있는 제조업 강국.
그러니 의외로 소프트웨어 역량 역시 뛰어나다. 훌륭한 실력을 지닌 창업자들이 많고, 수많은 스타트업과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은 SAAP.
폭스바겐 그룹을 제치고 현재 독일 시총 1위에 올라있다.
기업용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다보니,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기업하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곳이다.
주력은 클라우드 기반 ERP로 기업을 대상으로 클라우드 및 디지털 전환 솔루션을 제공한다.
“빅테크 기업들은 결코 스스로 바뀌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불공정 행위에 대해서는 법을 만들어 강력하게 규제해야 합니다.”
법을 대충 만들면 안 따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법을 반복적이고 고의적으로 위반한다면, 글로벌 연매출의 최대 20퍼센트까지 과징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얘들은 이 정도는 때려야 말을 듣는다.
실제로 엔플은 EU가 각종 반독점법으로 규제를 가하고, 앱마켓을 통하지 않고 앱을 설치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디지털시장법(Digital Markets Act)을 신설하자, 꼬리를 내리고 외부 앱 설치를 허용했다.
부스코프스키 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세금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벤츠가 한국에서 차를 팔면 한국에 세금을 냅니다. 반대로 대연차가 독일에 차를 팔면 독일에 세금을 내죠. 어떤 나라에서 팔리는 제품과 서비스에 대해 그 나라에 세금을 내는 것은 국제적인 상식입니다. 하지만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온갖 편법을 동원해 이익을 세율이 낮은 조세피난처로 빼돌리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법인세는 이익의 일정 비율을 세금으로 낸다.
이는 바꿔 말하면 이익이 없으면 세금도 없다는 것.
“심지어는 더블 아이리시 위드 어 더치 샌드위치(Double Irish with a Dutch Sandwich)라는 기법을 통해 세금을 거의 내지 않고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방법이 좀 복잡하긴 한데, 본사를 주식회사로 놓고, 현지 법인을 유한회사로 놓은 다음, 수익을 다른 이리저리 옮기며 세금을 내지 않는 방법이다.
이걸 한 기업만 하는 것도 아니고, 엔플, 구블, NS, AMZ, 페이스노트, 에도바 등 거의 모든 빅테크 기업들이 하고 있다.
“이건 단순히 세금을 내고 안 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금을 안 내는 만큼 가격 경쟁력이 생기고, 제대로 세금을 납부하는 유럽 기업들에게는 역차별이 되니까요.”
애초에 스타트업과 빅테크 기업의 싸움은 라이트급 선수와 헤비급 선수가 붙는 거나 다름없는데, 여기에 헤비급 선수에게 어드밴티지까지 주는 셈이다.
“탈세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EU 집행위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먼저 조세피난처로 이익을 빼돌리지 못하고 법인세 하한선을 정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지금처럼 이익이 발생한 국가가 아닌 법인세가 가장 낮은 곳으로 빼돌릴 테니, 이익이 아닌 일정 이상의 매출에 대해 세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세금 빼돌리는 걸 어느 나라가 좋아하겠는가?
때문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나라들은 유럽연합을 시작으로 속속들이 이를 도입했다. 정식 명칭은 디지털세(Digital Tax)지만, 보통은 구블세나 엔플세로 부른다.
부스코프스키 위원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관련 얘기를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예.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하루 종일 얘기할 자신이 있다.
어차피 내가 말한 것들은 전부 1회차 때도 똑같이 문제가 불거졌었고, EU 집행위원회에서 관련 법안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굳이 내가 이 자리에서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1회차 때와는 여러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
내가 롤프 부치와 알렉스 프레스턴을 쫓아내고 기업을 인수한 덕분에 스노우 크래시는 1회차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성장 중이다.
또한 인앱결제와 수수료를 둘러싼 소송전도 이전보다 시기가 빨라졌고 판이 훨씬 커졌다.
그러니 EU의 규제 역시 더욱 빨라져야 우리가 승기를 잡을 수 있겠지.
내가 더욱 강한 어조로 빅테크 기업들의 행트를 비난하자, 10대 그룹 회장과 사장들의 표정이 점점 충격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난 그 반응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니까 까는 거다.
설마 내가 닭한마리 먹으려고 여기 왔겠는가?
음식점 예약만 해줬어도 됐는데, 굳이 이 자리에 따라 나온 건 차기 EU 집행위원장에게 눈도장도 찍고,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세 시간에 걸친 간담회가 끝나고 나자, 우리는 이별의 악수를 나눴다.
부스코프스키 위원은 내 손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유재호 회장님께 들으니, 저를 위해 시간 내서 음식점을 찾아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난 유재호 회장을 슬쩍 보았다.
그냥 본인이 찾았다고 해도 됐을 텐데, 나에게로 공을 돌린 모양이다.
“뭘요.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제 인생 음식이었습니다 내일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먹고 갈 생각입니다.”
“…….”
누가 닭한마리 성애자 아니랄까 봐.
그에게 있어서 닭한마리는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 아닐까?
그는 차기 EU 집행위원장.
다 알아두면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참고로 그는 모르는 사실이지만, 그의 임기 중에 유럽에서는 엄청난 일이 발생한다. 유럽뿐 아니라 세계가 뒤흔들릴 만한.
그때가 되면 다시 만나게 되겠지.